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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24화)
4. ‘검’의 능력(6)


체셔는 재차 유시엘의 생문에 기를 쏟아붓는 순간, 척추를 내달리는 기이한 통증에 섬뜩함을 느꼈다.
“체셔! 너 식은땀이…….”
아무리 유시엘이라도 이쯤 되면 체셔의 상태가 많이 나쁘다는 것을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산장에 올라올 때만 해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다가 자신에게 기를 쏟아붓자 식은땀을 줄줄 흘린다.
분명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다.
체셔도 놀라고 있었다.
한 달은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보름도 안 되서 한계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런 상태라면 로니어 캐니언을 지나기 힘들지도…….
그 순간이었다.
챙!
체셔의 검이 평소와 다르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뽑히면서 불꽃이 튀었다.
퍽!
후두두둑.
검에 맞고 튕겨 나간 암기는 암벽에 부딪치며 돌 조각을 떨어트렸다.
유시엘은 정수리에 돌조각이 떨어지는 것도 잊고는 놀란 눈으로 체셔의 얼굴을 바라봤다.
“체셔…….”
체셔의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선홍색의 피.
죽은피가 아닌 생피다.
매일같이 내상이 심해지다 보니 이젠 장기까지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갑시다.”
체셔는 검을 뽑아 든 채로 유시엘을 앞세워 산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좀 오래 쉬었는지 적들의 수가 늘어났다.
현재는 두 명이 더 붙어서 좌우와 후방을 점하고 있었다.
피익!
눈의 색깔과도 비슷한 새하얀 비침(匕針)이 날아들었다. 단지 이목을 속일 뿐이라서 기로 감지하고 그것을 쳐 냈지만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게다가 기감이 기감 같지가 않다.
무척 흐리다. 마치 짙은 안개 속을 보는 것 같다.
‘산장이 함정이었군.’
대놓고 입에서 피를 흘려 대고 있으니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장님이 아닌 이상에야 알아챈다.
그래서 이렇게 암기로 견제를 하며 힘을 빼 놓는 것이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기를 계속 소모하는 것도 그렇고, 다음 시간에 유시엘의 생문에 기를 불어넣지 못하게 된다. 최후의 수단으로 선천지기를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근래 너무 심하게 사용했다.
그 부작용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자칫하면 그대로 혼절해서 유시엘을 무방비 상태에 빠트릴지도 모른다.
슈슛!
쐐액!
암기가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검으로 일일이 쳐 내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점점 몸에 무리가 쌓인다.
천만다행으로 유시엘은 잘 달려 주었다.
사방에서 암기와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기는데도 앞만 보고 달렸다.
‘정말 날 믿어 주시는군.’
이젠 좀 무리하더라도 적을 쳐야 한다.
이대로는 한 시간도 못 버틴다.
체셔는 유시엘에게 미리 약속한 신호를 보냈다.
팟!
그 순간 유시엘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날아들던 암기의 공세가 일시적으로 멈췄다. 체셔는 온전히 보충해 뒀던 기를 터트리듯 끌어올리면서 땅을 박찼다.
우측에서 암기를 던지던 베러세인은 코앞에 귀신의 얼굴이 비치나 싶었더니 이내 사라져 버리는 환상을 보았다.
갑자기 목표물이 사라져서 놀란 탓일까?
정말 기분 나쁜 환상을 보고 말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휴! 놀라라.’
그는 오한에 몸을 한 번 떨고는 다시 목표물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자리를 살폈다.
하지만 눈앞이 까맣게 변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의식이 사라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좌측에서 따라오던 베러세인은 목표물인 유시엘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있다’라는 것을 눈치챘다.
‘검’이 자리를 떴다는 것은 그 찰나를 이용해 이쪽을 공격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술수는 안 통한다.’
그는 유시엘이 사라졌던 장소로 내달렸다.
설산에서 위장할 수 있는 하얀 위장복과 눈 색이 하나가 되어 희끗한 그림자로만 보였다.
쉬익!
베러세인의 품에서 날카롭게 다듬어진 철편(鐵片) 하나가 쏘아지며 유시엘이 있는 장소로 날아갔다.
픽!
허공에서 피가 튀었다. 유시엘이 자리에는 있다는 사실이 육안으로 확인된 거다. 그는 득의양양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칼만 찔러 넣으면 이 찬바람을 날려 줄 따스한 피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
유시엘이 유지하고 있던 공간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잘려 나간 금빛의 머리카락이 허무하게 바람에 흩날렸다.
‘잡았다! 요 녀석!’
살기등등한 베러세인의 눈과 유시엘의 놀라고 있는 눈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둘의 거리는 불과 두어 걸음!
한데, 그 순간 번갯불이 떨어졌다.
‘어…… 라?’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정신이 어딘가로 붕붕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하늘 높이 저 어딘가로 날아가는 걸까?
마냥 시린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촤악!
베러세인의 머리가 갈라지면서 속에 있던 것들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유시엘은 기겁을 하며 몸을 숙였지만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머릿속에 있던 내용물을 반쯤 뒤집어쓰고 말았다.
머리가 갈라진 베러세인은 가속도 탓에 그대로 벼랑으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점이 되었다.
유시엘의 곁으로 돌아온 체셔는 검을 바닥에 꽂으면서 무릎을 꿇었다.
“우욱!”
결국 참지 못하고 됫박은 될 법한 피를 토해 냈다.
좌측에 있던 베러세인이 암기를 던져서 유시엘을 다치게 했다.
아니, 한 치만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면 유시엘은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체셔는 상대를 너무 우습게 봤다고 생각하며 자책했다. 이들은 보통 암살자가 아니다.
그 흑인 암살자와 반대로 ‘과감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허를 찔렀다.
기감에 걸린 세 명을 모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좌측에 있던 암살자 탓에 후방에 있는 녀석에게는 다가가지도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이래서는 처음으로 돌아간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상황을 모두 보고 겪었으니 같은 수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체셔는 유시엘의 뺨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와 흉측하게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유시엘은 물을 묻힌 수건으로 이물질을 닦아 내면서 자책하고 있는 체셔를 내려다봤다.
“고개 들어.”
유시엘은 화려한 금장식이 된 호신용 소도(小刀)를 꺼내더니 한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휘감아 쥐었다.
“마침 잘됐다. 달리는데 불편하다고 느끼던 참이었지.”
서걱.
허리까지 자라 있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차가운 바람을 타고 저 멀리 흩어졌다.
체셔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운이 좋아서 살았다곤 하나 엄연한 실책이다.
수치스럽고 미안했다.
유시엘은 머리카락을 털어 내고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머리카락은 자란다. 상처도 낫는다. 하지만 그 죄책감은 나를 위험에 빠트릴 것이다.”
체셔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새파란 빛을 머금었다.

유시엘과 체셔가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에는 또 기감에 들어온 십여 명의 암살자들 때문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비록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암살자들만이 아니다.
한 장소를 점하고 매복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말과 같다.
즉, 트랩(Trap)이 설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트랩은 기감에 걸리지 않는다.
앗! 하면 이미 발동하고 있으니 상대하기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체셔의 몸 상태가 정상이라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조금 전에도 유시엘의 생문에 기를 쏟아부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도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준비된 적은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다지.’
체셔의 머리에 병법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들은 준비된 암살자다.
자신들, 아니, 유시엘을 죽일 준비가 된 암살자다.
‘되돌아갈 수도 없다…….’
현 상황이나, 몸 상태는 기호지세.
여길 뚫지 못하면 어떻게든 죽는다.
뚫어도 무사히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피를 토해 죽던가, 암기에 죽던가, 트랩에 죽던가, 주군을 지키지 못해서 죽던가.
어째 선택지는 많은데 빌어먹게도 죄다 사망 플래그가 서 있다.
탱!
왜 가만히 있냐는 듯 암기가 날아들었다.
체셔는 검으로 어렵지 않게 쳐 냈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호랑이는 다치고 이가 빠졌다고 해도 호랑이다.
이리들이 호랑이와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다.
무심코 휘두른 앞발에 얻어맞기라도 하면 저승행 편도 티켓 강제 당첨이다.
그래서 이리들은 호랑이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괴롭힌다.
방심하고 있으면 슬쩍 다가서서 툭툭 건드려 보기도 하고, 신경을 분산시켜서 등을 노려보기도 한다.
체셔는 검을 꼭 쥔 채로 눈을 감았다.
다시 선천지기를 써서 이기어검을 펼칠 수만 있다면 여기 있는 모든 암살자를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말했듯, 혼절해서 유시엘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사이에 암살자가 더 나타난다면 유시엘은 살아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선천지기를 쓰더라도 일 년만 살 수 있으면 된다. 일년전쟁 동안 유시엘을 지키는 것이 ‘검’의 의무다.
“유시엘 아가씨, 저를 끝까지 믿어 달라고는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 자신이 선택한 사람조차 믿지 못하는 주군이 어디 있겠어?”
“무능한 검이라 죄송합니다.”
체셔는 유시엘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만약 제가 쓰러지면 어디든 숨어 계세요. 얼마 동안 정신을 잃을지는 모르겠지만…….”
휘류류류류!
체셔의 몸에서 새하얀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유시엘은 팔에 닿는 체셔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움찔거렸다.
쩌엉!
그 순간 얼음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체셔의 검에 새파란 검강이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이, 이런 미친?!’
암살자들은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다친 호랑이가 아니라, 다친 ‘용(龍)’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