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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25화)
4. ‘검’의 능력(7)
쐐액!
쏴아아!
조급함을 품은 암기가 새까맣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체셔의 몸에서 시작된 거센 용권풍(龍卷風)에 몸에 닿기도 전에 하늘 높이 솟아서 흩어져 버렸다.
‘뜨거워…….’
유시엘은 체셔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부탁한다!’
체셔는 손에서 서서히 힘을 빼며 필사적으로 바랐다.
이미 말도 안 될 만큼의 선천지기를 태웠다.
몸 가득히 기운이 차오르면서 일시적으로 본래의 몸 상태 이상의 강대한 힘이 전신을 휘감았다.
키이이이이잉!
체셔의 손을 떠난 검이 떨어지려다 멈추었다.
푸른빛이던 검강이 시리도록 새하얀 빛을 머금었다.
유시엘은 그 날카로운 소음을 듣고는 용권풍 속에서 실눈을 떴다.
‘저건!’
도망치던 기병대를 도륙하던 ‘새하얀 검’이다!
체셔는 쓰러져 있었지만 마치 본인의 의지인 것마냥 자신을 지켜 주었던 새하얀 빛의 검.
암살자들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살육도 모른 채…….
핏!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새하얀 섬광이 날았다.
퓨웃!
“헉!”
서걱!
그것을 시작으로 빛줄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억! 하는 소리가 들리면 동료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뜨끔한 느낌이 들면 의식이 멀어졌다.
“으, 으으!”
베러세인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검강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는데, 전설로 회자되는 이기어검이 동료들의 목을 잘라 내고 있었으니까.
스윽!
막아도 소용없다.
검강 앞의 쇠붙이는 두부만도 못한 방해물이다.
부딪치는 소리도 나지 않고 잘려 나간다.
기감의 범위 내에 있던 암살자들의 목이 모두 떨어져 나가는 데는 십여 초도 걸리지 않았다.
주르륵.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체셔는 칠공에서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이미 혼절했는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선천지기가 타오르며 일으킨 용권풍도 멎어 들었지만 체셔는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쿵!
쿵……!
유시엘은 버들가지 같은 팔로 체셔의 가슴을 두드려 봤다. 정말 죽은 것이 아닌지 무서워졌다.
“앗!”
체셔가 갑자기 유시엘을 안아 들면서 땅을 박찼다.
유시엘은 몸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체셔의 품에서 몸부림을 쳤다.
주변의 전경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색이 사라지고 흙색이 비치는가 싶더니 다시 녹색빛이 비쳤다.
잠시 후, 유시엘이 정신이 차렸을 때는 가슴골을 타고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체…… 셔?”
피는 분명 뜨거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오싹함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
이해 못할 감각이다.
쿵!
체셔가 무릎을 꿇었다.
품에서 굴러떨어진 유시엘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퀭하게 벌어진 동공과 순식간에 늙어 버린 것 같은 안색…….
유시엘의 부름에 체셔의 눈동자에 일시적으로 빛이 돌아왔다. 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쉬고…… 계십…….”
풀썩.
체셔는 말도 다 잇지 못하고 혼절했다.
대체 어디까지 달려왔는지 사방이 허허벌판이었다.
유시엘은 근처를 둘러보다가 개울을 찾아냈다.
수건을 적셔서 체셔의 얼굴을 닦아 주기도 했지만 간호라곤 생전 해 본 적도 없는 유시엘이 그 외에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만 닦아 주던 유시엘의 생문에 차갑게 식어 버린 손이 닿았다.
“자, 잠깐!”
말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녀는 너무 황당해서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또 무리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이제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서늘한 기운이 생문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아직 정신도 못 차린 체셔가 마치 본능처럼 생문에 기를 불어넣어서 독기를 붙잡은 것이다.
“이런……!”
체셔가 시커먼 피거품을 무는 것을 본 유시엘은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녀에겐 똑바로 누운 상태에서는 피를 토하면 기도가 막힌다는 상식은 가지고 있었다.
유시엘은 체셔를 옆으로 눕혀 주었다.
거무죽죽한 피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피가 더 이상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수 분 후에는 그 피도 멈추었고, 체셔는 한결 진정된 것처럼 고르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유시엘은 그제야 대부분의 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은 것이라곤 파우치의 개인 도구들과 체셔가 ‘저희 저택의 수위 아저씨가 이러고 다녔습니다’라고 하며 목에 걸고 있던 노란 수건 하나뿐이었다.
그때 옷 스치는 소리와 함께 체셔가 고개를 들었다.
“체셔!”
유시엘은 감동보다는 안도감에 어깨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앉은 채로 다시 주저앉을 수도 있구나!’하는 엉뚱한 생각도 할 수 있었다.
“다행입니다, 아가씨.”
체셔는 몸을 추슬렀다.
그에게서 수려한 외모와 고운 인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수년을 병석에 누웠던 사람처럼 얼굴이 아주 반쪽 나고 말았다.
체셔가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많이 안 좋아 보일 겁니다. 쉬면 나아지긴 하겠지만 예전의 모습으로는 못 돌아가겠죠.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선천지기는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이 살아 있는 채로 존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운이다.
체력과 기력은 소모되면 보충할 수 있지만 선천지기는 정말 귀한 영약 같은 것을 먹지 않는 이상은 쉽게 회복할 수 없다.
유시엘은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체셔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분명 이번만큼은 그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정말 잘해 주었다!”
“저는 ‘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
엘반토르로 향하던 베러세인들은 유시엘을 발견했다는 신호탄을 보고 돌건 산맥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고작 유시엘을 처리하는데 전부 몰려가는 것도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쉬어 가야 할 상황이고 쓸모없으나마 봉신가의 ‘검’도 있는 터라서 자주 어울리는 열 명의 동료끼리 길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데,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는 사람은 고사하고 상황을 알려 주는 신호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에 다른 한 명이 상황을 보러 갔다.
남아 있는 베러세인들은 내심 불안한 상상을 하면서도 유시엘 하나를 처치하는 데 실패했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유시엘은 가진 세력이 없다.
봉신가의 ‘검’조차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이다.
봉신가의 ‘검’이 아무리 강해 봐야 여자 하날 지키면서 ‘준비된’ 베러세인 열 명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저런 추측이 오가며 긴장감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쾅!
펍의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그곳에는 동료들을 찾으러 갔던 베러세인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뭘 그렇게 급하…….”
“모두 죽었소!”
그 한마디에 펍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뒤늦게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노, 농담하지 마!”
숨을 고르던 베러세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농담이 아니오. 모두 목이 잘려서 죽었소. 그리고 후발대로 산맥을 넘던 둘은 실종됐소.”
후발대 둘은 내려오는 도중에 체셔에게 당한 둘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자세한 설명을 듣는 이들의 얼굴이 불신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다시 불신으로 변했다.
“대신 그 ‘검’도 무사하진 못한 것 같았소. 상당히 많은 피를 토한 것 같소. 분명 멀리가진 못했을 거요.”
“봉신가 최고의 ‘검’인 아스발란도 우리 베러세인 열을 상대하긴 힘들 것이라 생각하는데. 다른 지원자가 있는 것 아닌가?”
“장담컨대 없소. 시신의 상처가 모두 같았소.”
모두의 시선이 한 베러세인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어깨에는 베러세인을 상징하는 검은색 단도문양의 겉에 삼각형의 테두리가 그려져 있었다.
“일단 이실리엔에게 알리고, 두 명은 남아서 흔적을 추격해 보도록. 나머지는 예정대로 엘반토르로 간다.”
저녁 무렵.
베러세인에게 보고를 듣게 된 이실리엔은 멀쩡한 베러세인 열 명이 유시엘의 ‘검’에게 당했다는 소릴 듣고는 이들과의 계약을 심각하게 재고해 보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실리엔의 볼멘소리를 들은 베러세인이 콧등을 구겼다. 이들은 주종 관계가 아니다.
막대한 돈을 써서 은영성과 일 년간 계약했을 뿐이다.
돈은 곧 신뢰.
그만큼 은영성은 계약에 철저했지만 자존심 또한 강했다.
“결사대 목을 딸 준비를 하라고 보냈더니 목을 헌납하러 간 거야? 그것도 왜 있는지 모를 유시엘의 ‘검’에게?”
이실리엔은 황당해서 차마 화도 못 냈다.
일년전쟁이 시작되고 벌써 며칠이 흘렀는가?
유시엘이 소리안 공작령에 있다는 것도 황당하다.
돌건 산맥의 바로 위쪽에는 이스티아의 사교도 본거지와 바하누스 결사대의 주둔지가 있는데도 말이다.
“뭐, 어찌 됐든 잘됐네. 추격은 하고 있겠지?”
베러세인이 죽은 이유는 둘째치고, 그 얄미운 유시엘을 완전히 놓쳤다고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잡을 기회를 얻은 것은 마음에 들었다.
“물론이오. 원하는 대로 생포해 오도록 하겠소.”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 언니에게도 그 사실을 전해 줘. 지금 너희 상태를 보니 함께 잡아야 그나마 낫겠군.”
말은 그렇게 해도 에틸랑쥬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유시엘 쪽으로 돌려놓겠다는 생각이다.
보고하던 베러세인이 이를 갈았지만 옆에 있는 리온 때문에 그 눈빛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다음번 보고는 좀 유쾌했으면 좋겠네, 가 봐.”
베러세인으로부터 유시엘에 관한 정보를 얻은 에틸랑쥬도 마찬가지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돌건 산맥이라고? 대체 왜?”
“단문의 전서로 받은 정보라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군. 후발대가 갑작스럽게 발견했지만 놓쳐 버렸다.”
에틸랑쥬의 붉은 눈에 스산한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좋아! 베러세인과 호흡을 맞춰서 생포하려면 나도 그에 걸맞는 카드를 내어야겠지.”
에틸랑쥬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하던 베러세인은 ‘걸 맞는 카드’라는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저 아가씨가 설마…….’
그의 얼굴에 불안감에 드리워지는 순간 에틸랑쥬는 베러세인의 얼굴을 즐기듯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알카수스 레인저’를 붙여 주겠다고 전해.”
‘역시!’
이실리엔도 그렇고 에틸랑쥬도 사람이 짓궂다.
알카수스 레인저는 드래드 랜터가 살막을 세우는 데 반대하던 베러세인들이 사막을 떠나서 만든 용병들이다.
그들은 베러세인의 살인 기술은 어디까지나 부족의 생존을 위한 신성한 행위라고 여기며 돈을 버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드래드 랜터는 살막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그들을 내쳐 버렸고, 결국 그들은 루비 사막을 나와서 생존을 위해 용병단을 세웠다.
그리고 베러세인의 살인 기술을 쓰지 않고 잠입, 은신, 추적술을 발전시켜 그들의 무대가 된 알카수스에서 크나큰 명성을 떨치며 ‘알카수스 레인저’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드래드 랜터는 죽고, 지도자도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은영성과는 제법…….
아니, 상당히 어색하고 언짢을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 그렇게 전하지.”
아무래도 골치 아픈 아픈 일이 될 것 같았다.
<『크림슨 티어즈』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