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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25화)
10장 팔자에도 없는 파락호라니(2)
“난 파락호니까.”
틈날 때마다 변명처럼 중얼거려 봤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파락호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그와 비슷한 일을 계속 해야 할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짓도 해야 하리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던 백무건이 한숨을 토해 냈다.
임추량의 말이 옳았다.
파락호로 살아가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됐고, 조금이라도 일찍 이 세계에서 발을 빼야 했다.
그러나 백무건은 결국 다른 대답을 꺼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다? 왜지?”
“제대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쯧쯧.”
임추량이 혀를 찼다.
어느새 비워진 병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임추량은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지며 입을 뗐다.
“파락호 생활? 겉에서 보면 근사해 보이지. 땀 흘려서 일하지 않아도 잘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을 벌고, 밤마다 예쁘장한 기녀들을 옆에 끼고 질펀하게 놀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아? 착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눈물을 쥐어짠 돈이야. 남의 눈에서 눈물을 나오게 하면 언젠가 넌 피눈물을 쏟게 될 거야. 그게 세상의 이치거든. 못 믿겠어? 아직 실감이 안 나? 그럼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 줄까?”
“…….”
“날 똑바로 봐. 내가 바로 그 증거니까.”
백무건은 시키는 대로 임추량을 살폈다.
퀭한 두 눈에는 생기가 없고, 형편없이 멍이 들고 부어올라 있는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모아 둔 돈도 없을 것이고, 혼기를 놓치는 바람에 마흔이 가까워지는 여태까지 혼인도 하지 못했으리라,
임추량에게서 풍기는 퀴퀴한 홀아비 냄새만 맡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처럼 살지 마.”
담벼락에 기대앉아 있던 임추량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파락호의 말로는 쓸쓸하기 그지없으니까.”
어둠 속으로 묻혀 가는 임추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무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삶의 고단함이 묻어 있는 쓸쓸한 임추량의 뒷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묘시가 가까워질 시간에 임추량은 용선 고서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임추량이 돌아오자마자 회의가 시작됐다.
“염노부터 시작하시겠소?”
“그러지.”
철무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염노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 의뢰를 한 서연이는 내가 아는 아이였어.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어릴 적이랑은 얼굴이 딴판이라서. 그래서 갑자기 슬퍼지더라고. 저 꼬맹이가 벌써 여자가 됐으니 내가 나이를 먹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땐 내 손아귀에 강호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던 시기였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말이지…… 아얏!”
담서인이 참지 못하고 염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하여간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도 끝은 늘 한결같으니.
“왜 그래?”
“옛날에 염노가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가는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요.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거예요.”
“뭐지?”
“염노가 말했던 백가장이 내가 알고 있는 그 백가장이 맞아요?”
“강호는 넓고 백가장이라 이름 지은 문파도 많지만, 내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백가장은 하나뿐이지.”
설마했는데 그 백가장이 맞았다.
“하나 더요.”
“또 뭐지?”
“둘이서 무슨 얘기 했어요?”
“그냥 옛날 얘기를 나누었지.”
“옛날 얘기 하면서 딸뻘인 우리 의뢰인에게 작업을 걸었어요?”
“아니. 사과를 했지.”
“…….”
“너무 늦게 도착해서 미안했다고.”
염노의 주름진 두 눈이 허공으로 향했다.
아련한 눈빛으로 추억을 더듬던 염노가 덧붙였다.
“그리고 약속을 했지.”
“무슨 약속요?”
“이번에는 늦지 않겠다고. 그래서 후회하지 않겠다고.”
처음이었다.
염노가 조금 멋있어 보인 것은.
그래서 의외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 염노가 음흉하게 웃었다.
“마누라, 솔직하게 말해 봐.”
“뭘요?”
“방금 나한테 반했지?”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더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직 궁금한 게 남아 있었지만 더 듣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달걀로 피멍이 든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 임추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백무건은 어때요?”
“꽤 괜찮은 놈이야. 근성도 있고, 고집도 있더군. 어느 정도냐면 내 제자로 삼고 싶을 정도였어.”
“꿈 깨세요.”
‘제자는 아무나 받나?’
누군가를 제자로 받아서 남의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면 명색이 스승이란 양반이 실력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삼류 무사.
강호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인 임추량이 제자를 받아 봐야 아까운 한 사람의 인생만 망칠 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니 어떤 것 같아요? 백무건이 파락호 생활을 그만둘 것 같던가요?”
“아니. 고집이 있더라니까.”
“그래요? 곤란하네.”
“흑오방의 방주인 벽구패에게 관심이 많은 걸 보니 방주 자리까지 노리는 것 같아.”
“방주요?”
“근성에 고집, 거기다 야심까지 갖춘 놈이야. 놓치기는 확실히 아깝군.”
아직도 제자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남의 인생을 망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임추량이 퍼뜩 떠오른 듯 덧붙였다.
“아, 괜찮은 놈이기도 해.”
“근거가 뭔데요?”
“백무건이 고아였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처럼 돌봐 주었던 임태촌이라는 병든 노인을 팼더라고.”
“헐, 그런 몹쓸 짓을 했는데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말 그대로 인간 말종이구만.”
“아니, 괜찮은 놈이야. 손등이 다 까졌으니까.”
퍼뜩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빤히 바라보고 있자 임추량이 히죽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파락호 된 지 열흘도 안 됐으니 아마 파락호로서 독심을 갖추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시험이었을 거야. 흑오방에서 함께 나온 누군가가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을 테고, 당시의 백무건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거야.”
“결국 결정을 내렸잖아요. 아버지처럼 자신을 돌봐 준 병든 노인을 두드려 패는 인간 말종이 되기로.”
“얼핏 보면 그렇지. 그런데 내가 아까 손등이 다 까져 있었다고 그랬잖아? 백무건은 파락호로서의 독심을 시험하는 시험도, 자신을 돌봐 준 노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모두 포기하지 않은 거야.”
“대체 뭔 소리냐니까요?”
“그 짧은 순간에 기지를 발휘한 거지.”
“기지?”
“차마 아버지처럼 돌봐 준 노인을 진짜로 패지는 못했을 거야. 그렇지만 흑오방에서 함께 나온 놈이 두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하고 있으니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겠지. 그래서 자기 손등을 바닥에 찧어서 피를 낸 거야. 그리고 그 피를 임태촌이라는 병든 노인의 얼굴에 잔뜩 묻혀 놓은 거지.”
“아!”
비로소 이해가 갔다.
어느 쪽도 선택하기 힘든 상황.
그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기지를 발휘했을 줄이야.
담서인이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임추량이 입맛을 쩝, 다셨다.
“확실히 탐이 나. 근성에 고집, 야심, 거기다 기지까지 갖추고 있는 놈이니까.”
임추량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백무건의 인생을 망칠 계획을 꾸미고 있는 사이, 담서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계속 이야기를 들으니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백무건에 대한 그림이 대충 그려졌다.
백무건은 무척 의지가 강하고, 한 번 결정을 내리고 나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면이 있었다.
파락호가 되기로 이미 결심했으니 쉽게 마음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서 담서인이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조용히 앉아 있던 철무경이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직접 만나봐야겠군.”
“어떻게요?”
“찾아가야지.”
“설마 흑오방으로 찾아간다는 거예요?”
“그래.”
“하지만…….”
“간단해. 파락호가 되면 되니까.”
철무경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래간만에 던진 농담인 것 같은데, 전혀 재밌지가 않았다.
“둘이서 찾아간다. 나와 한 사람 더.”
‘두 명? 한 명은 대형이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담서인이 주변을 살폈다.
우선 고양이의 목덜미를 간질이고 있는 염노가 보였다.
“설마 염노와 함께 가려는 거예요?”
“염노는 파락호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지.”
그래, 철무경의 말이 맞다.
백발이 성성한데다가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깡마른 염노를 파락호로 받아 주는 곳은 없을 테니까.
“그럼 임 선배랑 함께 가려는 거예요?”
“추량은 파락호가 되기에는 너무 잘생겼지. 그리고 이미 백무건과 만난 적도 있고.”
험상궂게 생긴 파락호들 사이에 서 있는 곱게 늙어가는 임추량을 떠올리니 확실히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철무경의 말처럼 이미 백무건과 만난 적도 있으니 적합하지 않았다.
“그럼 누구하고 같이……?”
무심코 질문을 던지던 담서인이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염노도 아니고, 임추량도 아니면…….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설마 나?”
“그래. 너와 함께 간다.”
철무경이 딱 잘라 말했다.
―말도 안 돼! 난 여자라구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얼마 전에 철무경과 만났을 당시, ‘난 어때요?’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대형이 했던 대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밝히는 게 흠이긴 하지만, 단점보단 장점이 훨씬 더 많은 녀석이지. 사람에 대한 애정도 있고.”
철무경은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나 담서인이 원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철무경은 녀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철무경은 자신이 남장을 한 여자라는 사실조차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둔하긴!’
괜히 심술이 나서 입술을 삐죽이던 담서인이 소리쳤다.
“까짓것, 가요! 파락호가 별건가!”
팔자에도 없는 파락호까지 되다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모습을 지켜보며 통곡이라도 하고 계실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가늘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강호소사전담반』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