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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소사전담반 1(24화)
9장 인간 말종(3)
백무건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건아.”
그때, 심태촌의 딸인 소향이 자신을 불렀다.
백무건이 시선을 돌리자 소향은 독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이러지 마.”
“…….”
“너도 기억하지? 우리 아버지가 너희 남매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지.”
“알아.”
“그걸 기억하면서도 우리 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하면 넌 사람도 아냐.”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심태촌이 자신과 누나를 위해 베풀어 준 은혜를 생각하면 그냥 여기서 모른 척 돌아가야 했다.
아니,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니라 저 짐승만도 못한 막동수를 때려눕혀야 했다.
그렇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을 때였다.
“이 한심한 새끼야, 빨리 안 나서? 그따위로 약해 빠져서 흑오방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잊지 마. 넌 인간 말종인 파락호야.”
백무건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바르르.
얼마나 힘주어 쥐었는지 가늘게 떨리는 주먹을 옷소매 속에 감춘 채 백무건이 소향에게 입을 뗐다.
“미안해.”
“미안하다니?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아?”
“정말 미안해.”
백무건은 헛숨을 들이켰다.
파락호로 살기로 이미 결정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이미 포기했다.
막동수의 말이 옳았다.
파락호는 인간 말종.
제대로 된 파락호가 되기 위해서는 아예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편이 맞았다.
간신히 결심을 굳힌 백무건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심태촌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이 나쁜 새끼! 너 지금 뭐하려는 거야?”
소향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무건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돈 갚아요.”
“너처럼 착한 애가 왜?”
“돈을 안 갚으니까요.”
“무건아!”
“빌어먹을, 내 이름만 자꾸 부르지 말고 돈을 갚아! 씨발, 당신이 빌린 돈을 안 갚으니까 내가 나서게 된 거잖아!”
옷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가늘게 떨리는 주먹을 꺼냈다.
그리고 병색이 완연한 심태촌의 얼굴을 향해 그 주먹을 날렸다.
퍽! 퍼억!
둔탁한 타격음이 귓가를 헤집었다.
“안 돼!”
소향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고막을 찢어 놓을 것 같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붉은 피가 튄 탓에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붉게 변해 버렸다.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백무건이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악! 씨발, 그러니까 돈을 갚으라고!”
주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거기에 짙은 분내가 가세했다.
“귀여운 도련님, 제 술 한 잔 받으세요.”
뽀얀 얼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기녀가 눈웃음을 짓자 색기가 자르르 흘러넘쳤다.
그 기녀의 얼굴에 잠시 시선이 뺏긴 사이, 기녀들을 둘씩이나 양 옆구리에 끼고 있던 막동수가 소리쳤다.
“크하하하! 귀엽다고 함부로 대하다간 큰코다칠걸!”
“어머, 왜요?”
“그놈 물건이거든.”
“물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기녀에게 막동수는 평소와 달리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독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야. 오늘 낮에 저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아이, 애 태우지 말고 얼른 말해 주세요. 나 숨넘어갈 것 같아요.”
“저년이 어울리지도 않는 앙탈은. 저 새끼, 고아야. 그런 저 새끼를 그동안 애비처럼 아껴 주었던 노인을 흠씬 두들겨 팼어.”
“어머, 왜요?”
“돈을 안 갚았거든. 어때? 이제 좀 무섭나?”
“아니요.”
기녀는 혀를 낼름 내밀며 팔을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을 더했다.
물컹거리는 가슴의 감촉이 팔에 닿았다.
그래서 백무건이 움찔할 때, 기녀가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
“오히려 더 매력적인데요. 난 나쁜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한층 짙어진 분내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아까부터 목이 탔다.
그래서 술잔을 들어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은 순간, 기녀의 작고 하얀 손이 허벅지에 닿았다.
“아까 막 대협께서 자기 보고 물건이라 그랬잖아. 자기 물건이 얼마나 크고 튼실한지 확인해 봐도 돼?”
허벅지에 닿아 있던 기녀의 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어느새 바지춤 안으로 들어와 허벅지에 닿은 기녀의 손은 매끄러웠다.
백무건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바지춤 안으로 들어와 있는 기녀의 손을 잡고 멈추게 하려다가, 관찰하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막동수의 시선을 느끼고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파락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마당이었다.
이젠 이런 술자리에도, 기녀의 손길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렇지만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향이 내지르던 악다구니가 자꾸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피투성이로 변한 심태촌의 병색 완연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허벅지 근처를 맴돌다가 사타구니 쪽으로 다가오는 기녀의 손길을 내버려 둔 채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다 잊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자기, 왜 혼자 마셔? 같이 마셔.”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있는 기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기녀가 집어 주는 안주를 씹으며 계속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라던 대로 기억이 끊겼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막동수의 두 눈은 풀려 있었다.
기녀들의 가슴을 꺼내 놓고 양손으로 주무르고 있는 막동수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뒷간에 가려고 합니다.”
“이 새끼, 취했지?”
“괜찮습니다.”
“이 생활 하려면 술도 잘 먹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얼른 갔다 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뒷간에 들렀다가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그렇게 기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콱.
머리에 뭔가가 닿았다.
그게 누군가의 신발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허락도 없이 머리를 밟은 남자가 담벼락을 넘어 눈앞에 떨어졌다.
“어, 미안. 여기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멍청해 보이는 웃음을 지은 채 사과하는 남자는 삼십 대 후반가량으로 보였다.
그리고 자세히 살피니 꽤 미남이었다.
“누굽니까?”
머리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백무건이 묻자 남자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나? 파락호 임추량!”
10장 팔자에도 없는 파락호라니(1)
“더럽게 아프네.”
파락호 임추량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허락도 얻지 않고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달걀로 얼굴을 살살 문질렀다.
백무건은 그런 임추량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는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했는데, 꽤나 잘생긴 임추량의 얼굴에는 피멍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약이라도 좀 구해 오겠습니다.”
“약? 에이, 약은 됐어. 파락호 생활 하다 보면 깨지고 터지는 게 일상이니까. 이 정도는 다친 축에도 못 들어.”
“하지만…….”
“약은 됐고, 목이 좀 타네.”
“물을 좀 가져오겠습니다.”
“물 말고 독한 술로 부탁하지.”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맞다 보니까 입안의 실핏줄이 다 터졌어. 아무래도 독한 술로 소독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백무건이 막동수가 있을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지나가던 기녀를 붙잡고 화주를 한 병 달라고 부탁했다.
화주를 얻어 오자 임추량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캬! 좋군.”
잔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켠 후 감탄사를 내뱉던 임추량이 갑자기 백무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경황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군. 자넨 누군가?”
“백무건입니다.”
“지금 뭘 하는가?”
“저는…….”
무심코 얼마 전까지 일했던 포목점의 직원이라고 대답하려 했던 백무건이 도중에 멈칫하며 말을 바꾸었다.
“파락호…… 입니다.”
아직 자신이 파락호라는 사실이 익숙치 않았다.
그래서 힘겹게 대답을 꺼내자 임추량이 히죽 웃었다.
“이거, 같은 바닥에서 일하는 친구였군. 그래, 어디에 적을 두고 있나?”
“흑오방입니다.”
“아, 흑오방.”
“아십니까?”
“알다마다. 흑오방의 방주인 벽구패와도 친하지.”
“방주님을 잘 아십니까?”
임추량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친하다니까.”
“어떤 분이십니까?”
“벽가, 그놈은 가짜야.”
“네?”
뜬금없이 가짜라니.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어서 부연 설명을 기다리자 임추량이 다시 입을 뗐다.
“파락호들을 잔뜩 끌어모아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지만, 벽구패는 파락호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럼?”
“벽가 놈은 강호인이야.”
“강호인이오?”
“그래, 무공을 익혔지. 그것도 꽤 고수야.”
백무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반신반의했다.
소문이라는 것은 항상 와전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방주인 벽구패와 친분이 있는 임추량의 말을 듣는 순간, 의심은 사라지고 확신만 남았다.
‘얼마나 강할까? 이류? 일류? 아니면 절정고수?’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임추량은 화제를 돌렸다.
“얼마나 됐나?”
“네?”
“파락호 생활한 지 얼마나 됐냐고?”
“열흘 정도 됐습니다.”
“열흘? 아직 초짜 중의 초짜로군.”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키득거리던 임추량이 다시 화주 한 모금을 들이켜는 것을 바라보던 백무건이 서둘러 입을 뗐다.
“아까 하시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벽구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임추량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관둬.”
“뭘 관두라는 말씀이십니까?”
“파락호 짓, 관두라고.”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사람이 못할 짓이거든.”
‘사람이 못할 짓?’
임추량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갈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 덕분에 간신히 지웠던 오늘 낮의 일이 자연스레 다시 떠올랐다.
친아버지처럼 의지했던 임태촌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고 그의 가슴에 씻기지 않을 비수를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