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뇌왕무적 1권
뇌왕무적 1권(1화)
序
진가장 연무장.
그 중심에서 십오 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검법을 연무 중이었다.
휘릭!
바람을 가르는 검의 소리가 경쾌하다.
소년의 나이대치고는 제법 날카로운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동안 계속되던 검법이 멈춘 것은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무복을 흠뻑 적실 때쯤이었다.
“훅.”
소년이 움직임을 멈추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특별히 숨이 거칠어진 것은 아니다. 그저 수련으로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다.
씨익.
소년이 자신의 연무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을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하하하하.”
통쾌한 웃음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막대한 공력이 실린 대소였다.
소년이 머릿속을 뒤흔드는 대소에 얼굴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웃음이 연무장 전체에서 울리고 있기 때문에 특정 방향을 종잡을 수 없어서였다.
그런 소년의 시야에 한 노인이 들어왔다.
십여 장 떨어진 담벼락 위.
그곳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당당한 풍채만큼이나 패도적인 기도를 몸에 두른 노인이었다.
뇌신(雷神) 단리패.
그것이 노인의 이름이었다.
이십 년 전 벌어진 칠마혈사(七魔血事)를 종식시키고, 검신(劍神) 남궁현과 함께 절대이신으로 불리는 자.
아직 생존함에도 강호에 전설이 된 절대 강자가 바로 노인이었다.
그러나 소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리패를 알아볼 리 없었다.
단리패의 눈이 소년의 전신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비록 그 녀석보다는 못하지만.’
천재까지는 아니지만,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무골.
단리패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단리패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지더니 어느새 소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히 너를 제자로 받아 주마.”
선심 쓰는 말투로 단리패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소년은 정체도 모르는 노인의 제자가 될 마음이 없었다. 더구나 소년은 진가장의 소장주로 가문의 무공을 익혀야 했다.
노인이 뇌신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소년이 거절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단리패가 갑자기 소년의 손목을 잡아갔다.
그와 동시에 단리패와 소년의 신형이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진가장의 소장주 진유현이 자신의 세가 연무장에서 납치(?)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一章 세상에 나오다(1)
태산루(泰山樓).
태산루는 중원의 오악(五嶽) 중 동악(東嶽)인 태산(泰山) 근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풍스럽게 지어진 오층 전각은 그 거대한 크기에 웅장함마저 느낄 수 있어서 소태산으로 부르기도 했다.
태산루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지금에 이르러서는 중원 삼대주루로 이름을 날렸다.
태산루 오 층.
한 사내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갖가지 화려한 요리들이 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하지만 사내는 음식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창밖에만 시선을 주었다.
사내의 눈길이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창밖에만 시선을 주던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사내의 눈길이 계단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에 여러 사람이 오 층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사내의 눈길에 이채가 스쳤다.
청의를 걸친 수십 명의 무인들.
하나같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내는 이내 흥미를 잃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청의 무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더니 주변에 자리한 손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정천문에서 나왔소. 미안하지만, 이곳에 계신 분들은 아래로 내려가서 식사를 해 주시기 바라오. 대신 식대는 우리가 계산하겠소.”
무인의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주루를 울렸다.
그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무인이 언급한 정천문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정천문(正天門).
백검문(百劍門).
사혈성(邪血城).
산동을 지배하는 산동삼패.
산동에서 삼패의 말은 곧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정천문은 삼패의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대문파.
그렇기에 손님들은 인상을 쓰면서도 순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산동에서 감히 정천문의 행사를 방해할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그렇게 손님들이 다 내려가고, 오 층에는 창가의 사내만 남았을 때였다.
청의 무인이 사내를 향해 다가왔다.
“이보시오, 식대는 계산할 테니 이만 내려가시오.”
그에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청의 무인의 말투가 강압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스윽.
사내의 시선이 창밖에서 청의 무인을 향해 돌아갔다.
사내와 청의 무인의 눈이 마주치고.
부르르.
청의 무인이 몸을 세차게 떨었다.
사내의 눈동자.
심해처럼 어둡고 깊은 눈동자가 청의 무인의 심령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청의 무인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챙. 챙. 챙.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청의 무인들이 다급히 검을 뽑았다.
그들의 눈에는 사내가 동료를 향해 암습을 가한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후우웅!
우우우웅!
무인들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일어났다.
그들의 기세는 마치 합격진처럼 서로 엮이며 사내를 압박했다.
그로 인해 오 층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배해졌다.
사내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십 년.
사내가 산속에 갇혀 수련한 세월이다.
흔히 대문파의 무인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밥 먹듯 폐관수련을 많이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수련을 하는 무인은 거의 없다.
밀폐된 장소에서 혼자 수련한다는 것은 그만큼 외롭고, 정신적으로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주화입마를 부를 수도 있는 위험한 수련이다.
너무나 위험하기에 유명한 대문파일수록 폐관수련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현 무림에서 폐관수련을 한다는 것은 사문에 중한 죄를 지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폐관수련.
사내는 그런 수련을 십 년 동안이나 했다.
그렇다고 자발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사부로 인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폐관수련이었다.
그렇게 갇혀 지냈던 지난 십 년의 세월은 정말 견딜 수 없는 답답한 시간이었다.
사내가 태산루에 들른 것은 수련 장소인 태산과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높은 곳에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마을 전체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잊고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살기를 흘리자, 기분이 상했다.
동시에 사내의 전신에서 기세가 절로 일어났다. 지독히도 패도적인 기세였다.
진유현의 기세와 청의 무인들의 기세가 부딪쳤다.
쿠오오오!
끼이이익!
쩌어어억!
두 기세의 충돌.
기세의 충돌에 주루의 건물과 탁자가 요동치며 비명을 질렀다.
벽면에는 거미줄처럼 실금이 가고 있었다.
태산루 전체가 금방이라도 뒤틀릴 듯이 흔들렸다.
무인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상대는 한 명이건만 기세에서 밀리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였다.
“그만두세요.”
맑고 청아한 음성.
계단에서 한 여인이 걸어왔다.
대단한 미인이다.
커다란 봉목에, 붉은 입술과 거기에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이다.
절세가인(絶世佳人).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여인이다.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긴장감이 흐르던 공기가 느슨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아가씨,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입니다.”
무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조금 전 동료들과의 기세를 견디며 보인 여유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자신들에 비해 밀리지 않는 기세. 더구나 자신들은 오십 명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자신들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들은 정천문의 삼대 무력 집단인 정검대였으니까.
그런 자신들의 기세를 상대로 여유를 보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
그것은 자신들보다 사내가 고수라는 걸 의미한다.
문제는 이들이 유람 삼아 정천문을 나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 사혈성과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상태였다.
사혈성은 정천문과 함께 삼패의 한 곳에 속하는 거대한 문파.
그런 만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를 만났으니, 긴장하고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이분은 사혈성의 무인이 아닌 듯하니까요.”
여인의 말에 무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한 것이다.
사혈성은 사파 무림을 대표하는 곳이다.
사공을 익히는 무인들이 모인 대문파.
사공은 정공에 비해 성취가 빠른 편이지만, 몇 가지 단점이 존재한다.
그중에 한 가지가 공력을 운용하지 않아도 전신에 흐르는 사기를 감추기 힘들다는 것이다.
단전에 머무는 기운은 몸에 배는 향기와 같아서 특수한 무공을 제외하고는 감추기 불가능했다.
하물며 조금 전처럼 기세를 개방한 상태에서 사기를 감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실수했어요.”
여인의 말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걸 느낀 사내가 대답했다.
“괜찮소. 나는 조용히 식사만 하고 갈 생각이니 신경 끄시오.”
사내의 말에 여인이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정식으로 인사했다.
“저는 정천문의 적소화예요.”
산동일미(山東一美) 적소화.
산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정천문의 금지옥엽.
현 정천문주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손녀가 바로 적소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