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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



검마유희록 1권(1화)
서장 검마출관(劍魔出館)


검마단가(劍魔斷家)의 제36대 가주, 단세천(斷勢天)은 천천히, 그러나 깊숙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싸늘한 폐관동(閉關洞)의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오랫동안 들이마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공기였다.
한 차례 깊은 호흡을 반복한 그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폐관동 내를 밝히는 야명주의 빛은 매우 미약했다. 아마 범인(凡人)이 이 안에 들어왔다면 그저 어둠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을 터다.
그러나 단세천,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고의 무가(武家)라 불리는 검마단가의 가주.
고작 이 정도의 어둠은 그에게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다.
안력을 돋운 단세천은 어둠 속을 꿰뚫고 그의 앞에 있던 벽을 바라보았다. 회색의 대리석으로 구성된 벽에는 칼로 긁어낸 듯한 흠집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흠집의 개수는 총 백 개.
그것은 그가 이 폐관동에 들어와 단련하기 시작한 지 백 일이 지났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이 백련(百鍊)의 마지막 날이었던가.’
벽에 새겨진 흠집들을 헤아린 단세천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행한 백련은 검마단가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천혹단련법(千酷鍛鍊法) 중 하나였다. 천혹단련법은 천 가지의 가혹한 단련법이라는 이름답게 그 과정이 가혹하기 그지없는 단련법이다.
천혼단련법에서도 특히 더 가혹한 단련법 열 개를 꼽아 귀독제(鬼毒祭)라 부르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백련이었다.
백련을 행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저 백 일간 세상과 자신을 격리해 오로지 본인의 무(武)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만 하면 된다.
말로 하면 이렇게 쉬운 것이 없다. 당장에라도 하려고만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말로는 쉬워도 실제로 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철저하게 끊은 채, 오로지 스스로에 대한 단련만을 거듭해야 한다. 그것도 무려 백 일간이나!
그 고독함과 공포는 보통 사람이라면 미쳐 버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리라.
적잖게 무(武)에 대한 갈증이 없다면, 그리고 반드시 높은 경지에 이르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백련인 것이다.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쉰 단세천은 가부좌를 틀며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철검을 옆에 내려놓았다.
딸랑.
철검에 매어져 있던 수실의 방울이 바닥과 부딪치며 맑은 영성(鈴聲)을 울렸다. 단세천의 시선이 금색 방울이 달려 있는 수실로 향했다.
수실은 음울한 회색으로만 가득한 철검에서 유일하게 유채색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수실을 쓰다듬었다. 이 수실은 그의 아내와 딸이 힘내라며 붙여준 장식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검에 매단 장식이기도 했다.
‘아내와 딸이 보고 싶군.’
가족들을 떠올린 단세천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변했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히 그리움이다.
그의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에 자그마한 파장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 파장이 다름 아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나가자.’
가부좌를 푼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걸치고 있던 검은 무복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듯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 그는 벽에 있던 장치를 조작했다.
철컥, 하는 기계음이 울린 후, 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폐관동의 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단세천은 폐관동을 나섰다.

세계 무술 협회에서 ‘검마(劍魔)’라는 이명(異名)으로 불리는 단세천의 출관이었다.



제1장 검마접속(劍魔接續)(1)


“환상 연대기라…….”
짧게 읊조린 단세천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환상 연대기[Fantasy Chronicle].
달리 에프씨(FC)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 이것은 현재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가상 현실 게임[Virtual Reality Game]의 이름이다.
일개 가상 현실 게임 주제에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슈라 하면 우스울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이 게임을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 게임이 아직 정식으로 오픈하지도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아직 오픈조차 하지 않은 상태로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된 것은 환상 연대기를 개발한 게임 회사, (주) 위저드 사가 환상 연대기를 광고하며 말한 두 가지 이야기 때문이다.
최고의 현실감과 무한한 자유도!
가상 현실 게임이 나온 이래, 모든 유저들이 꿈에서조차 바라 마지않던 그 두 가지를 실현해 냈다고 하는 게임, 환상 연대기!
최초의 가상 현실 게임을 개발해 냈으며, 현재 게임 랭킹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어나더 월드(Another World)라는 대작을 만들어 낸 위저드 사이니만큼 유저들이 거기에 거는 기대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라고 딸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 있었다.
‘최고의 현실감이라…… 흥미는 있으나, 쉽사리 믿기지는 않는 소리로구나.’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들이 그렇듯, 단세천도 가상 현실 게임을 몇 차례 접해 본 적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가 느낀 것은 진한 실망감뿐이었다. 현실 감각의 반의반조차 구현해 내지 못한 가상 현실 게임 따위는 그의 눈에 차지 않았던 탓이다.
하다못해 마음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공간을 가상 현실이라 부르다니!
현재 나온 최고의 가상 현실 게임이라는 어나더 월드조차 그의 입장에서는 마음 먹은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갑갑하고 쓸모없는 공간에 불과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일까?
단세천의 앞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개발된 환상 연대기는 어나더 월드와는, 아니, 지금껏 나온 모든 가상 현실 게임과는 격이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현실감과 무한한 자유도. 이 두 가지를 진정으로 구현해 낸 최고의 가상 현실 게임! 백 년 이내로는 환상 연대기보다 뛰어난 가상 현실 게임이 절대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사내는 열변을 토해 냈다. 어떻게든 단세천을 설득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마 평소의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내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옆에 있던 다른 사내는 변한 사내의 모습에 놀라 입이 쩍 벌어진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위저드 사의 제1운영팀 팀장 직함과 위저드 사를 여기까지 키워온 신진권 회장의 아들이라는 신분! 이 대단하기 그지없는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사내, 신철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상대를 설득하기 위하여 열변을 토하는 것은 진정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단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세천의 대답은 지극히 무덤덤하였다.
“그렇게 대단한 게임을 개발한 회사에서 굳이 나를 끌어들이려 하는 이유를 모르겠소만. 그것도 플레이 운영자인가 뭔가 하는 거창한 직책에 고가의 에그까지 줘 가면서 말이오.”
“그건 제가 선생님의 팬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 웃어넘기실 테니, 진짜 이유를 말씀드리죠. 아, 그리고 제가 선생님의 팬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의 한 가지인 건 맞습니다.”
쓴웃음을 짓던 신철영이 길게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대략 이야기드리자면, 환상 연대기의 시스템 때문입니다.”
“시스템?”
“네. 본래 환상 연대기는 열세 명의 신을 중심으로 두고 제작된 게임입니다. 이 신들이 세계를 만들고, 싸우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식이지요. 여기서 열세 명의 신이란 건 열세 대의 슈퍼 컴퓨터를 이야기합니다. 환상 연대기를 구축할 때 필요한 데이터를 제공한 것은 우리지만, 실제로 그 데이터를 이용해 게임을 만들어 낸 것은 이 열세 대의 슈퍼 컴퓨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죠.”
열세 대의 슈퍼 컴퓨터를 바탕으로 구축된 열세 명의 신.
위저드 사 쪽에서 제공한 데이터로 새로운 세계, 환상 연대기를 창조해 낸 그들은 각기 다른 자아를 갖고 있는 일종의 초(超) 슈퍼 컴퓨터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발생했다.
자아를 갖고 인간과 비슷한 감정까지 느낄 수 있는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다 보니, 그들 자신이 만든 세계에 일종의 애착을 갖게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세계를 보라!
이 세계가 바로 우리만의 낙원이다!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킴으로써 한껏 고무된 그들은 위저드 사에서 내려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완벽한 거부는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신이고 뭐고 곧바로 삭제될 테니까.
그들이 기껏 하는 것은 어딘가에 틈을 만들어 둔다거나, 시간을 질질 끌다가 나중에서야 처리한다는 식의 거부였다.
위저드 사에서는 그것을 신들의 장난이라 불렀다.
“환상 연대기에는 버그가 없습니다. 있다면 신들의 장난으로 탄생한 사소한 것들뿐이지요. 저희 쪽에서도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신을 지우고 다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라 그냥 두고 있습니다.”
단세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몰라도 슈퍼 컴퓨터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쓴 신철영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환상 연대기는 완벽하게 우리의 제어하에 있지 않습니다. 약간 벗어난 부분이 있지요. 그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저희 회사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플레이 운영자입니다.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며 신들의 장난으로 발생한 일들을 처리하는 직책이지요.”
“요컨대, 플레이 운영자란 건 신들의 장난이라는 버그를 잡기 위해 고용된 유저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 측의 작은 지원으로도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유저들이 필요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세계 최강의 사나이, 무도(武道)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칭해지는 선생님이시죠.”
신철영의 낯 뜨거운 칭찬에 단세천이 쓰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세계 최강은 무슨. 아내나 딸아이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못난 가장일 뿐이라오.”
“하핫, 재밌는 농담이로군요.”
신철영이 껄껄 웃었다. 그를 힐끔 본 단세천은 사람들은 가끔 눈앞의 진실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사람은 바로 눈앞의 진실을 놓치고는 하는 법이다.
“그 환상 연대기가 그토록 대단한 게임이오?”
“그렇습니다! 대단하다는 말도 부족하죠. 완벽합니다. 신들의 장난질만 제외한다면, 그 어떤 게임보다도 더.”
“흐음, 그렇소이까?”
플레이 운영자. 제법 흥미가 돋는 소리다. 단세천은 실로 오랜만에 무술 이외의 것에 관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만약 신철영의 말대로 환상 연대기가 최고의 현실감과 무한한 자유도를, 아니, 하다못해 최고의 현실감만이라도 구축해 냈다면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상대가 있는 상태에서 ‘전력을 다한 대결’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단세천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그런 사실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상대가 있는 상태로 전력을 다한 대결이라…….’
긴 고민 끝에 단세천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