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검마유희록 1권(2화)
제1장 검마접속(劍魔接續)(2)


그는 무인(武人)이었다. 이런 기회를 결코 놓치려 하지 않는 무인!
“좋소.”
“오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선생님.”
“단!”
신철영의 말을 끊은 단세천이 조건을 달았다.
“세 가지 조건이 있소.”
“그게 무엇이신지요?”
“첫 번째 조건은 환상 연대기가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나는 환상 연대기를 그만두겠다는 것이오. 물론 받은 에그는 돌려드리겠소.”
“후후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신철영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단세천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신들의 장난을 해결하는 것 이외의 플레이에는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오. 모니터링까지는 허용할 테지만, 하나하나 지령을 내리지는 마시오.”
두 번째 조건을 들은 신철영은 망설임없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와 회사로서도 단세천의 플레이에 하나하나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플레이 운영자라 해도 유저는 유저. 회사 측에서 멋대로 유저에게 간섭했다간 법의 제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조건을 내건 단세천이 잠시 망설이다 마지막 조건을 말했다.
“세 번째 조건은…… 크흠, 내가 계속 환상 연대기를 즐길 경우, 에그 두 대를 추가로 얻고 싶소.”
“네? 에그 두 대를 추가로요?”
“그렇소. 딸아이가 에그를 갖고 싶다 조르더구려. 아내도 눈치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고. 그러니 만약 환상 연대기를 계속하게 된다면, 다 함께할 수 있도록 에그 두 대를 더 대여해 주시오.”
“하핫, 걱정 마십시오. 에그쯤이야 얼마든지 드리죠. 단, 그 경우, 선생님의 아내분과 따님도 함께 플레이 운영자 직을 역임한다는 조건입니다.”
그 정도쯤이야.
단세천이 고개를 끄덕였고, 신철영의 얼굴에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단세천은 모르고 있지만 무도계에서 그의 가족들은 꽤 유명했다.
젊은 시절, 온몸에서 뿜어내는 패기와 살기로 인해 가족들조차 다가가기를 두려워하던 그에게 접근해 결혼까지 성공한 대담무쌍한 여인이 바로 그의 아내였고, 부모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무도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인물이 그의 딸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딸까지 모두를 만나 본 무도계의 고수, 천유장(天柳掌) 고 노야(老爺)가 말하기를…….

“허어, 이 가족은 단체로 용(龍)이라도 씹어 먹은 것인가?”

…라고 평(評)할 정도니 단세천 일가에 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으리라.
신철영은 예상외의 소득에 기쁨을 감추지 않은 채 싱글벙글한 얼굴로 단세천의 집을 나섰다. 그런 그에게 조용히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팀장님.”
“음, 왜 그런가, 장철호 부팀장?”
“단세천이라는 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입니까? 팀장님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술 하시는 분 같던데 말이죠.”
“흠, 확실히 자네는 선생님에 대해서 모르겠구만.”
고개를 끄덕거린 신철영이 장철호라는 이름의 사내에게 물었다.
“자네는 선생님의 연세를 몇이라고 생각하나?”
“스물 중반 정도? 많이 쳐줘도 스물 후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틀렸네.”
신철영이 씨익 웃었다.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는 미소였다.
“선생님의 연세는 올해로 마흔일곱일세.”
“네, 네에?”
당황한 장철호는 잠시 단세천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짙고 선명한 색의 눈썹과 일자로 굳건하게 닫힌 입술,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스물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아니, 어쩌면 사복을 잘 차려입을 경우, 조금 겉늙은 복학생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그런 얼굴이 마흔일곱이나 되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혹시 팀장님께서 나를 놀리시나?’
그렇게 생각한 장철호가 신철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신철영의 얼굴에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로군. 하지만 믿는 게 좋을 걸세. 선생님은 이십오 년 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쭉 그 모습이었으니까 말이야.”
“허, 이십오 년 동안 쭉 같은 모습이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신철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약간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얼굴은 동경하는 이에 대해 말하는 소년의 그것과 같았다.
“선생님에 대한 건 그뿐만이 아니지. 자네, 아까 선생님의 방에 있을 때 그분의 뒤에 걸려 있던 곰 가죽을 보았는가?”
“네? 아아, 그거요?”
“그거, 선생님이 직접 잡은 걸세. 맨손으로.”
장철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본 곰 가죽은 2.5미터는 훌쩍 넘길 정도의 크기였다.
그런 곰을 직접 잡았다? 그것도 총을 쓴 게 아니라 맨손으로?
“거짓말이죠?”
“글쎄? 나도 그 장면을 실제로 본 건 아닌지라 잘 모르겠군. 하지만 선생님께서 윗옷을 벗고 수련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선생님의 등에는 커다란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다고 하더구만.”
‘마치 곰의 것 같은 발톱 자국이 말이지.’
신철영은 그렇게 속으로 덧붙이며 자신의 차에 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장철호는 재빠르게 운전석에 오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대단하신 분이로군요.”
“그럼. 대단하신 분이고말고.”
장철호는 천천히 차를 끌고 나가며 방금 자신이 나온 가옥을 바라보았다. 들어갈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가옥이 지금 와서 바라보니 마치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마치 은거기인이 사는 태산(太山)처럼 말이다.
도로로 나온 지 십 분 즈음 지났을까?
가만히 앉아서 밖을 내다보던 신철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는가? 선생님을 아는 사람들은 말일세…… 선생님을 소개할 때, 단 한 마디만을 말한다네.”
신철영의 말에 장철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뭐라고 말입니까?”
신철영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답답할 정도로 꽉 매여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런 뒤에 그는 짧막하게, 하지만 그 어떤 말보다 전달력있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전설.”

* * *

―사용자 확인 중…… 뇌파 일치, 홍채 일치, 인증 완료. 반갑습니다, 단세천 님.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진다.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기계적인 목소리. 이 목소리는 에그에만 설치되어 있는 특별 프로그램인 오퍼레이터 시스템(Operator System)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사용자의 명령에 따라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는 것이지만, 그밖에도 여러 가지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일종의 도우미랄까?
단세천에게는 예전, 가상 현실 게임을 접속하는 경험을 통해 몇 번 접해 본 적 있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환상 연대기 접속.”

―환상 연대기 접속. 실행하겠습니다.

위잉거리는 진동음이 단세천의 귓가에 들려왔다.
다음 순간, 그는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몸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하나의 거대한 문이었다.
그의 앞에 떡하니 자리한 문은 실로 거대했다. 크기는 4m 정도 되어 보였는데, 겉에 마법진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문의 양쪽 기둥도 마찬가지였다.
찬찬히 살피던 그는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철문에 닿자, 조금의 소음도 없이 철문이 스르륵 열렸다.
철문 안쪽은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해서 주변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단세천은 철문 안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주변의 광경이 갑작스럽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어둠이 새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창공으로 변하고, 아래에서는 땅이 솟구쳐 올랐다. 쑥쑥 자라난 나무와 풀들이 허허벌판이었던 땅을 가득 메웠다.
가장 장관이었던 것은, 이제는 숲이 된 땅의 중심에서 커다란 신전 하나가 솟아오르는 장면이었다.
우르릉! 하는 천둥 소리와 함께 솟아난 신전은 회백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태양빛을 받아 반짝였다. 신전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평소 건축물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을 가지지 않던 단세천마저도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판타지 크로니클(Fantasy Chronicle).
무한한 환상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허공에 새겨진 고풍스러운 필체의 금색 문장을 읽은 단세천이 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금색 문자에서 뿜어진 황금빛이 단세천의 몸을 한차례 슥 훑었다. 단세천은 피하지 않고 빛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허공에 새겨졌던 문장이 먼지처럼 사라지더니,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냈다.

신체 데이터 검색 결과, 계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계정을 생성하시겠습니까? 신체 데이터는 자동으로 등록됩니다.

“생성한다.”

계정을 생성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몇십 초의 시간이 흘렀다. 단세천은 발아래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숲의 중앙에 솟아난 신전은 한없이 성스러워 보였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신전의 모습에 그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걸렸다.
‘신이라…….’
단세천이 신전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순식간에 주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지던 하늘과 땅, 그리고 신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처음과 같은 새카만 공간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빛 한 점 없는 암흑이 바닥으로 가라앉으려던 단세천의 몸을 떠받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단세천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리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정 생성을 완료하셨습니다. 다음 절차는 안내의 요정 실리아가 진행하겠습니다.

글을 전부 읽은 단세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정면에 나타났던 황금색 글씨가 한곳으로 뭉치더니, 이내 하나의 빛의 구체가 되었다. 허공에 떠오른 빛의 구체는 위아래로 슥슥 움직이다가 약 30센티 정도로 커졌다.
단세천은 흥미로운 눈으로 빛의 구체를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끼기라도 한 듯 빛의 구체가 지잉, 하고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그마한 요정을 퐁, 하고 빛의 구체로부터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단세천 님이시죠? 저는 안내를 맡은 요정 실리아라고 합니다! 유저님들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 저의 사명! 부디 모르는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주세요!”
빛의 구체에서 튀어나온 작은 요정이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작은 몸으로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요정의 모습은 귀엽다 못해 사랑스러울 정도였다. 이상한 취향이 아닌 한, 요정을 보면 참으로 귀엽다 생각할 것이었다.
그것은 검에만 미쳐 살아왔던 단세천도 마찬가지였다. 실리아의 애교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보일 듯 말 듯하게 웃으며 실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갑구나.”
“에헤헷! 저도 반가워요!”
“그래, 실리아. 이제부터 내가 뭘 하면 되겠느냐?”
단세천의 물음에 실리아가 손에 들고 있던 별 모양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단세천의 앞으로 커다란 크기의 거울이 빛과 함께 생겨났다. 번쩍거리는 황금색 거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