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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유희록 1권(25화)
제8장 검마입대(劍魔入隊)(4)
도마군가(刀魔君家).
검마단가와 함께 무술계를 양분하고 있는 무가 중 한 곳으로,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단가와는 다르게 도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가문이다.
대대로 검마단가와는 앙숙지간으로 대립해 왔으며, 현 도마군가의 42대 가주 군염정(君炎霆)은 검마단가의 36대 가주 단세천과 숙명의 맞수로 여겨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맞수라는 말답게 몇 번이나 싸워 왔고, 그 결과 각각 오승 오패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싸운 것은 10년 전 무술 협회의 주최로 열린 무술 대회에서였다. 그 때에는 단세천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 뒤로 한 번 더 싸웠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인된 바 없었다.
다만 마지막 싸움에서 단세천이 제법 여유롭게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점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칭호를 단세천이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도마군가의 가주전, 패도천(覇刀天).
수백 년간이나 이어져 내려온 전통있는 가문답게, 도마군가의 가주전은 무척 아름다웠다. 잘 꾸며진 대리석 기둥이 천장을 지탱하고, 온갖 조각품들과 도자기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결코 외관의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니, 과연 수백 년 역사를 지닌 가문의 가주전이라 할 만했다.
그런 도마군가의 가주전에는 머리카락을 마치 사자처럼 풀어헤치고,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가주전의 상석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마치 한 마리의 사자와도 같은 기세를 뿜어내는 그가 바로 단세천의 맞수이자 도마군가의 가주인 도마(刀魔) 군염정이었다.
“호오. 단세천, 그놈이 하고 있는 게임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군염정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검은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내였다. 그는 예전에 단세천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환상 연대기의 플레이를 권했던 사내, 신철영이었다.
단세천을 플레이 운영자로 환상 연대기에 끌어들였던 그가 단세천의 맞수라 불리는 군염정에게 찾아온 것이다.
톡톡.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군염정은 의자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동자가 번쩍 빛을 발했다.
“재미있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군염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흥분과 즐거움, 그리고 호승심이 한데 섞여 있는 미소였다.
“그 제안, 수락하겠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군 가주님.”
신철영이 빙긋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군염정이 시선을 돌려 가주전의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도마군가의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증표, 염룡마도(炎龍魔刀)가 걸려 있었다.
염룡마도를 바라보던 군염정이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더할 나위 없이 흥분된 감정이 느껴졌다.
‘기다려라, 단세천!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자!’
도마군가의 42대 가주.
도에 미친 마귀[刀魔].
단세천의 유일한 맞수.
군염정이 환상 연대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 * *
천무신류문(天武神流門).
달리 천문(天門), 혹은 북명신문(北冥神門)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검마단가와 도마군가를 제외하면 가장 커다란 성세를 자랑하는 문파였다.
이제는 거의 모든 무술가들이 가입하게 된 세계 무술 협회의 출회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수많은 문파들에게 자신의 무술을 아낌없이 베풀어 현대 무술의 어버이라 불리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비록 지금에 와서는 검마단가와 도마군가라는 검도쌍마가(劍刀雙魔家)에 밀려 그 성세가 많이 위축되었다고는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천무신류문이었다.
그런 천무신류문에는 문파의 원로들조차 감히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금지가 한 곳 있었다.
천무신류문의 본관을 지나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작은 초옥.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허름한 이 초옥이야말로 천무신류문이 금지로 지정한 곳이자, 천무신류문의 전전대 문주인 천검(天劍) 무제하(武齊廈)의 거처였다.
천검 무제하는 올해로 백 세가 넘는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비록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 있기는 했지만, 검버섯 하나 없는 얼굴 피부와 작게 오그라든 체구에도 불구하고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근육, 그리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세가 그를 평범한 노인으로는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흘흘. 그래, 신진권 그 아해의 아들이라고?”
“예. 신철영이라고 합니다, 무 노사님.”
무제하의 물음에 신철영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지극히 예의바른 그 모습에 무제하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신진권과는 매우 다른 녀석이로구나! 아니, 다르면서도 같아. 흘흘흘, 재밌는 아해로구나.”
“칭찬,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서 예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고?”
신철영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는 입가에 빙긋 미소를 띤 채로 환상 연대기에 대해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환상 연대기의 대단한 현실성과 자유도는 물론, 검도쌍마가의 가주가 시작했다는 것까지도.
그의 설명을 모두 들은 무제하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턱에 난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재밌구나, 재밌어!”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무제하.
살아 있는 역사나 다름없는 그의 흥미를 이토록 끈 것은 이십오 년 전, 검마단가의 가주 단세천이 세상에 나와 자신의 무를 드러낸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플레이 운영자 직을 수락하는 순간, 검도쌍마가와 천무신류문을 게임 선전에 이용하려는 신진권의 술수에 넘어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너의 청을 수락하마!”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무 노사님.”
무제하는 천천히 노구를 일으켰다.
그러자 마치 태산이 일어나는 것과도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천검이라 불렸던 자의 기세!’
신철영의 눈동자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누구보다도 마음을 잘 숨기는 그조차 감탄을 숨길 수 없을 만큼 천검 무제하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흘흘, 오랜만에 쌍가의 아해들이나 만나 보아야겠구나.”
천무신류문의 전전대 문주.
하늘의 검을 지닌 자[天劍].
일찍이 최강이라 불렸던 사내.
무제하가 환상 연대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 * *
봉황정가(鳳凰晶家).
검마단가와 도마군가, 즉 검도쌍마가를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세가라는 삼대세가의 하나로, 은하수류창(銀河水流槍)이라는 대단한 창술을 가전 무예로 전하고 있는 가문이다.
봉황이라는 명칭을 가문을 상징하는 말로 쓰는 것을 보아 추측할 수 있겠지만, 봉황정가는 대대로 여자들이 가문의 실권을 잡아 왔다. 가주 자리는 물론이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는 거의 대부분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현 봉황정가의 가주는 정유아(晶流娥).
이제는 검마단가의 안주인이 된 정시아의 언니였다.
그녀는 봉황정가의 가주답게 봉황창(鳳凰槍)이라는 이명을 지니고 있으며, 매우 아름다운 용모로 유명했다.
비단과 같은 흑색 머리카락을 비녀로 잘 틀어 올리고, 단아한 한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미인이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한 폭의 미인도를 보는 듯한 모습이랄까?
놀라운 것은 지금 그녀의 나이가 올해로 오십이라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이십대 초반과도 같이 잔주름 하나 없이 고운 피부를 지니고 있으니, 감히 누가 이런 아름다운 여인을 이제 오십인 아줌마라고 생각할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눈이 제대로 달려 있지 않을 것이다.
봉황정가의 가주전, 봉황전 상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동시에 마치 은하수와 같은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가 자그마한 분홍빛 입술을 열어 고운 목소리를 냈다.
“그 사람과 시아가 하고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정 가주님.”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내, 신철영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그에 정유아의 맑은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신기하군요. 그 사람이나 시아는 게임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 성격이 아닌데…….”
“그만큼 환상 연대기가 대단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신철영이 너스레를 떨며 하는 자랑에 정유아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워낙에 아름다운 그녀이기에 작은 미소만으로도 넓은 공간의 공기가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어지간한 신철영마저 그녀의 미소를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고 말았을 정도!
그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만약 조금만 더 바라보고 있었다가는 그조차도 그녀에게 매혹당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감탄했다. 이런 아름다운 여인을 뿌리치고 자신의 사랑을 지켜 낸 단세천의 대단한 정신력에 말이다.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게임…….’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받아들이겠어요.”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정 가주님.”
정유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천장의 남쪽을.
아마도 그 사람, 단세천이 있을 그곳을…….
‘현실에서는 당신을 놓쳤지만, 가상 현실에서만큼은 당신을 놓치지 않겠어요. 기다리세요, 세천.’
봉황정가의 46대 가주.
아름다운 봉황이 깃든 창의 주인[鳳凰槍].
그리고…… 단세천을 사랑하는 여인!
정유아가 환상 연대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 * *
검마단가의 가주, 검마 단세천.
도마군가의 가주, 도마 군염정.
천무신류문의 전전대 문주, 천검 무제하.
봉황정가의 가주, 봉황창 정유아.
후일, 사대무신이라 불리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이야기되는 네 명의 무인이 환상 연대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수많은 무인들을 좌절시킬 소식임과 동시에 동대륙에 들이닥칠 풍운의 전조였다.
<『검마유희록』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