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검마유희록 1권(24화)
제8장 검마입대(劍魔入隊)(3)


‘끌끌, 한 번 된통 당해 보거라.’
노인은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노인에게는 턱수염사내, 왕팔(枉捌)이라는 이름의 그가 이끄는 패거리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왕팔 패거리는 노인이 늙었다는 이유로 봉급을 일부 빼앗아 가는 등, 몇 번이나 핍박하고는 했다.
그랬기에 노인에게는 단세천을 응원했으면 응원했지, 왕팔 패거리를 말릴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어이, 너! 같잖게 무게 잡는 짓 그만하지?”
왕팔이 건들거리며 단세천 앞쪽의 흙을 걷어찼다. 툭 튄 흙이 단세천의 몸에 뿌려졌다.
그제야 단세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 허! 무슨 일이냐고?”
왕팔이 기가 찬다는 듯 외쳤다. 그리고 피식 웃은 그는 이내 정색하며 단세천을 향해 윽박질렀다.
“네놈이 죽고 싶어 아주 환장을 했구나! 나에 대해 몰라서 그따위 태도를 보이나 본데, 맞아서 죽는 꼴 당하기 싫으면 순순히 내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거다!”
단세천은 무덤덤한 얼굴로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팔이 꽤 장신이기는 하나, 그에 못지않은 신장의 소유자인 단세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왕팔 패거리가 순간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생각보다 단세천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안색을 바꾸고 당당히 섰다. 자신들은 이미 숫자에서부터 앞서고 있었다. 고작 한 명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선다면 그런 망신도 없을 터!
“어디 한 번 끝까지 가 보자, 이거지!”
왕팔이 사납게 얼굴을 구기며 으르렁댔다.
사실 지금 상황은 누가 보아도 단세천이 불리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상대는 세 명. 그것도 근육질에 사나운 인상의 사내들이다.
그에 비해 단세천은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에 깔끔하게 정돈된 외모의 소유자!
단순히 겉으로만 본다면 단세천에게 승산이 없어 보였다.
단세천과 노인을 제외한 막사 내의 모든 사람들은 단세천의 패배를 점쳤다. 이제 곧 단세천이 왕팔 패거리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십인대장 직을 넘길 것이라 생각했다. 단세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왕팔을 제대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단세천이 고개를 들어 왕팔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는 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일변했다.
“으, 으으……!”
왕팔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방금까지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얼굴은 진한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와 함께 있던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막사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들을 이렇게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단세천이었다. 그가 이들로 하여금 얼굴이 새파랗게 변할 정도의 공포를 느끼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단세천이 어마어마한 무력을 선보이거나, 잔인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제자리에 서서 왕팔 패거리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니까.
문제는 그의 기세였다. 그의 전신에서 유형화되어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새카만 수라기와 금방이라도 왕팔 패거리를 찢어발길 듯한 살기!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그의 기세는 막사 안에 있던 이들의 심령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공황 상태로 빠뜨렸다.
고오오오오!
어마어마한 기세에 대기가 미미하게 진동했다. 단세천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기세가 8,000이 넘는 내공으로 키워지자, 그것은 그야말로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이 되어 막사 안의 이들을 덮쳤다.
“으으으으!”
덜덜덜!
왕팔의 입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를 딱딱 맞부딪치며 끊임없이 몸을 떨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느릿하게 그의 앞까지 걸어간 단세천이 그를 향해 마찬가지로 느릿한 움직임으로 손을 뻗었다.
단세천의 손이 왕팔의 얼굴에 닿으려는 찰나,
털썩! 쿵!
“사, 살려 주십시오!”
무너지듯 무릎을 꿇은 왕팔이 이마를 바닥에 처박으며 소리쳤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가 동생으로 삼았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 장삼(裝三)과 쥐 상의 얼굴인 서청(鼠請) 또한 털썩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고개를 조아리는 그들을 내려다보는 단세천의 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나를 대장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나?”
단세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저 아침 인사처럼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왕팔과 장삼, 서청은 그래서 더욱 공포에 질렸다. 이만한 살기를 내뿜으면서도 차분하게 말을 한다는 건 상대가 이런 살기를 내뿜은 행동이 익숙하다는 뜻이니까!
“대, 대장님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왕팔이 급히 외쳤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간 금방이라도 목이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세천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명령에는 절대복종. 상명하복의 원칙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할 수 있나?”
“네! 절대복종하겠습니다!”
“내가 내린 명령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오롯이 목숨으로 따를 것이라 맹세할 수 있나?”
“네! 목숨으로 따르겠습니다!”
단세천의 질문에 왕팔 패거리가 이마를 땅에 쿵! 찧으며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왕팔 패거리는 지금 단세천이 무어라 말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만큼 단세천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공포였다.
왕팔 패거리들이 완전한 복종을 나타내자, 그제야 단세천이 내뿜던 기세가 천천히 사그라들어 이내 처음으로 막사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왕팔 패거리는 머리를 조아린 채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워낙에 단세천의 기세가 패도적이었던 터라, 이미 심령을 완벽하게 제압당한 까닭이었다.
요컨대, 단세천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영혼 깊숙하게 각인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그들은 죽기 직전까지 단세천이 느끼게 해 준 공포를 잊지 못할 것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에는 말이다.
“내가 두려운가?”
막사 안을 쭉 훑어본 단세천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를 물음을 던졌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두려움이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존재를 볼 때 느끼는 것. 내가 두렵다면 나의 부하가 되어라. 나는 결코 나의 것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부하가…… 되겠습니다.”
왕팔이 막사 안의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단세천이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들은 죽은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이전까지의 너희들은 잊어라.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상, 너희들은 오로지 나의 부하일 뿐이다. 나의 명령에만 살고, 나의 명령에만 죽어라!”
단세천의 목소리에는 더없이 강렬한 위엄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 가문의 가주로서 키워 온 위엄이었고, 또한 현대 무술계에서 최강이라 불리며 길러진 위엄이었다.
거기에 수라기가 미미하게나마 섞여들어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아수라가 선언하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그의 기세에 심령이 제압되어 있던 왕팔 패거리가 그의 목소리에 담긴 위엄에 항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더욱 극진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나는 또한 너희들에게 약속하마. 나는 가장 앞서 싸울 것이고, 가장 뒤에서 퇴각할 것이다. 내 능력이 되는 한, 나의 그늘 아래로 들어온 너희들을 지켜 주겠다.”
어느새 막사 안의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내는 ‘무언가’가 다르다고. 이 빌어먹을 전쟁터에 뒹구는 이들과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다르다고.
그것은 마치 전쟁터라는 진창 속에서 빛나는 보석과도 같았다. 너무나도 찬란하여 전쟁터라는 진창 속으로 떨어진 정도로는 결코 범할 수 없는 보석!
풍운의 꿈을 품고 전쟁터에 뛰어든 청년들도, 몇십 년간 전쟁터를 뒹굴며 싸워온 노인도, 어쭙잖은 힘을 믿고 날뛰던 사내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그 빛에 매혹되었다.
그것은 마기가 가지는 심령 제압의 효능과 단세천의 압도적인 위압감이 만나 이루어 낸 상승효과였지만, 이 안에서 그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좋군.’
단세천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그의 앞에는 앞으로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될 열 명의 인원이 무릎을 꿇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해라. 내 이름은 단세천.”
잠시 말을 끊은 그는 막사 안의 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춰 본 뒤, 느릿한 어조로 선언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의 대장이 될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