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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24화)
제4장 흑룡회(黑龍會)(3)


그런 노인의 모습에 홍단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젓가락을 던진 사람은 바로 홍단야였다. 전의 반응으로 보나 지금의 반응으로 보나 평범한 노인이 취할 행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화산파에서 숙수 일을 했다지만 설마 숙수가 무공을 배우거나 사람을 죽였을 리는 만무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시체의 옷에 검을 비벼 피를 닦은 청연이 노인을 향해 물었다.
“저야 괜찮지요. 그런데…… 안 쫓아도 되겠습니까?”
노인이 독고정이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일당들이 있나요?”
청연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한 삼 일 전쯤에 수로를 이용해 떠났습니다. 남아 있는 놈들은 이것들이 전부였습니다. 수는 얼마 안 되지만 모두 흑룡회의 힘이 두려워 쉬쉬하고 있던 거지요.”
“그렇군요. 그럼 그냥 놔두세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요.”
청연이 침울한 얼굴로 답했다.
“죄송해요. 오랜만에 뵀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서.”
“아닙니다! 저는 아가씨께서 협녀가 되신 것 같아 기쁜걸요, 껄껄. 시체야 왕삼이 놈이랑 같이 치우면 될 겁니다.”
“예…….”
말끝을 흐린 청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죄송한데 지금 화음(華陰)으로 향하는 배를 구할 수 있을까요?”
“화산파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예.”
뭔가를 말하려던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강가에 가면 여객선 한 대가 있습니다. 관부와 연결된 상인들이 타는 여객선이지요. 제아무리 흑룡회라도 관부는 건드릴 수 없을 테니 그 배는 안전할 겁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그 배의 관리자가 저와는 오랜 지기입니다. 아마 제 부탁이라면 들어줄 겁니다.”
“다행이네요.”
청연이 환히 웃었다.
“황 아저씨, 서둘러 주세요.”
“어이쿠.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시려고 하십니까!”
“한시가 급해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청연이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노인이 황급히 손을 뻗어 청연을 제지했다.
“저 같은 놈에게 고개를 숙이려고 하십니까. 허허. 제가 왕삼이를 보내 미리 언질을 할 테니 강가에 가셔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예. 정말 감사드려요, 황 아저씨.”
“전 아가씨의 웃음을 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 마세요.”
노인의 웃음에 청연 또한 웃음으로 답했다.
꼬옥.
청연의 손을 꼬옥 잡았던 손을 놓은 노인이 청연을 향해 말했다.
“먼저 나가서 기다리세요. 전 이 친구와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예? 아저씨, 하지만…….”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이면.”
노인의 떠밀림에 청연이 객잔 밖으로 쫓겨났다.
이내 청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노인이 고개를 돌려 어느 무인의 검을 챙기는 홍단야를 바라봤다.
“뭐하는 건가?”
“검을 챙긴다.”
홍단야의 말에 노인의 미간이 구겨졌지만 그것뿐이었다. 노인 또한 홍단야의 실력을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허허. 손이 참 곱구먼.”
억지로 홍단야의 손을 잡은 노인이 웃음을 흘리며 홍단야의 두 눈을 바라봤다.
꾸욱.
콰르르르.
노인의 손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에 홍단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악력으로는 이 정도 힘을 낼 수 없다. 분명한 상승 내공의 힘이었다.
‘음?!’
청연보다 몇 배는 더 지고한 수준의 내공이었다.
‘단순한 숙수가 아니었단 말인가?’
손을 통해 들어오는 힘은 점점 거대해져 갔다.
이 정도 힘이라면 청연이 이 노인에게 감쪽같이 속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갔다. 이 노인의 힘은 최소 참천부왕, 오왕급이라는 이야기였다.
홍단야가 막 맞서 내공을 보내려는 순간, 노인이 주입하던 내공을 끊으며 누런 이가 보이도록 웃었다.
“우리 아가씨를 잘 부탁하네.”
천연덕스러운 노인의 모습에 홍단야의 얼굴 위로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지.”
꿈틀.
홍단야의 대답에 노인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잠시 멈칫한 노인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이가 죽는다면, 네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겪은 뒤 천천히 죽게 될 것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목소리였지만 홍단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내 노인의 손을 푼 홍단야가 입매를 비틀었다.
“단순한 겁쟁인가.”
“……!”
노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내 노인의 얼굴 위로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아가씨, 아니 연이를 부탁하네.”
전과 같은 말을 내뱉은 노인이 털레털레 삼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노인의 등을 뚫어지게 응시한 홍단야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청연을 따랐다.
철컹.
홍단야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홍단야 대신 노인을 향해 답했다.

노인의 도움으로 탄 여객선은 노인의 지기인 추 노인이라 불리는 사람의 배였다. 관부와 연줄이 있는 추 노인은 여객선으로 관부와 거래하는 상인들을 나르곤 했다. 배 또한 상당히 커다란 크기여서 수백여 명의 선원들이 있는 배였다.
“흘흘. 화음까지는 금세 도착할 것이니 너무 걱정 말게.”
“감사합니다.”
“흘흘, 감사는 무슨. 식사는 일꾼들이 시간에 맞춰 가져다줄 것이네. 그리고 멀미 기운이 있으면 갑판에 나와서 바람을 좀 쐬게.”
“예.”
다소곳한 청연의 모습에 웃음을 흘린 추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난 가 보겠네.”
“안녕히 가세요.”
홍단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추 노인을 배웅했다.
추 노인이 선실에서 나가자 작은 한숨을 내쉰 청연이 멋쩍은 얼굴로 홍단야를 바라봤다.
‘설마 방이 하나밖에 안 남았을 줄이야.’
황 숙수의 힘으로 어떻게 화음으로 가는 배를 타기는 했지만 문제는 방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홍단야에게 짐칸에서 자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휴우.”
청연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뭐냐.”
흠칫.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작스런 홍단야의 물음에 청연이 흠칫하며 붉어진 얼굴을 돌려 홍단야를 외면했다. 문제는 당사자인 홍단야가 자신과 한방을 쓰는 것에 대해 전혀 자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화봉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신이다. 그런 자신과 하루도 아니고 십 며칠 동안 한방을 쓰게 된 주제에 자각이 없는 홍단야의 모습에 괜스레 청연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 함인지 청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검을 다룰 줄 아셨나요?”
“……그래.”
검을 사용한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눈앞에서 자신이 검을 사용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에게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군요.”
청연이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명절기인 뇌라혈풍수가 그의 전부인 줄 알았던 그녀의 생각은 화향객잔의 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빨라. 그리고 강해!’
빠른 검은 강하지 못하다. 강한 검은 빠르지 못하다.
강한 힘을 실으면 자연히 속도가 떨어지고 속도에 치중하면 힘이 떨어진다. 물론 절정에 이른 고수들은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 ‘절정’이란 거대한 벽이 결코 오르기 쉽지 않다. 적어도 검 하나에 몇십 년을 바쳐야 넘을 수 있는 벽인 것이다.
그건 다른 병기들 또한 마찬가지다.
도를 든 무인이라면 응당 도 하나에 모든 것을 바친다. 창을 든 무인은 창에 모든 것을 바친다. 하지만 풍객은 달랐다. 그는 뇌라혈풍수라는 수법(手法)과 함께 검 실력 또한 뛰어났다.
일수일살(一手一殺).
그의 손이 한 번 움직이면 여지없이 무인 하나가 목에 구멍이 나서 피를 뿌렸다.
언뜻 본 풍객의 경지는 자신에 비해 처지지 않았다. 검기를 두르지 않았을 뿐이지 검로(劍路)의 효율은 풍객이 더 앞섰다.
풍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검을 모르는 자가 자신에게 깨달음을 줄 리 만무했다. 물론 검이라는 병기 이전에 단순한 무리를 통해 깨달음을 줄 수도 있지만 풍객이 검을 사용한다면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복잡함이 뒤섞였던 청연의 얼굴 위로 웃음이 피었다.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그그긍.
여객선이 거친 소리와 함께 육중한 몸을 이끌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네요.”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청연이 진동하는 배를 느끼고 눈을 뜨며 말했다. 홍단야가 침묵으로 답했다.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청연과는 달리 홍단야는 선실에 난 창문을 통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강의 모습에 내심 감탄한 홍단야가 그윽한 눈빛으로 강가의 풍경을 감상했다.
조선에는 이런 큰 강이 없다.
만약 이런 커다란 강이 조선에 있다면 조선은 몇 배는 더 발전하리라.
강은 풍요의 상징이다.
수로를 이용해 짐을 나를 수 있고 강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강은 진정으로 황금 젖줄인 셈이다.
“저기…….”
청연의 부름에 홍단야가 고개를 돌려 청연을 바라봤다. 침상에 앉아 있던 청연은 어느새 일어나 선실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청연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일로 섬서로 오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정작 홍단야가 왜 섬서로 왔는지 이유를 몰랐다.
자신이야 화산파의 일 때문에 가는 것이라지만 홍단야는 아니었다. 막말로 홍단야가 지금 당장 자신을 떠난다고 해도 자신이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람을 찾으러 간다. 그렇기에 화산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고.”
“아!”
홍단야의 대답을 들었지만 청연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혹이 남아 있었다.
홍단야의 입장에서는 괜히 청연을 따라 분쟁 지역으로 가서 피를 볼 필요 없이 섬서의 개방 분타에 가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만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화산파가 섬서에서 가진 영향력이 절대적이라지만 지금 섬서의 상황으로 보건대 홍단야의 일에 힘을 빌려 주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화산의 입장에서 본다면 홍단야라는 존재 자체는 환영할 만한 존재였다.
누가 뭐래도 홍단야는 열 명의 절정 고수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 또한 절정 고수인 풍객이었다. 만약 그가 화산에게 힘을 빌려 준다면 화산의 입장에서는 양팔을 벌리고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청연이 일부러 홍단야에게 깊게 묻지 않는 것이다.
당장은 화산파의 일이 먼저였다. 대사형을 꺾기 위한 깨달음은 분쟁이 끝나도 늦지 않았다.
‘죄송해요.’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홍단야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청연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그렇기에 청연은 보지 못했다.
싸늘한 웃음이 걸려 있는 홍단야의 입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