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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무제 1권(25화)
제4장 흑룡회(黑龍會)(4)
거대한 흑룡상이 새겨진 태사의에 앉아 있는 중년인의 밑으로 수십의 무인들이 고개를 조아린 채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절대의 충성과 존경을 표한다는 오체투지를 받고 있는 중년인의 정체는 흑룡혈존에게 현 흑룡회의 모든 것을 위임 받은 흑룡마검 독고진이었다.
독고진의 옆에는 민머리의 꼽추 노인이 한 장의 서찰을 들고 있는 서 있었는데 그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서찰은 합양에서 독고정이 특급으로 보낸 전서구였다.
민머리 꼽추 노인의 정체는 용뇌자(龍腦者) 탁해로 현 흑룡회의 책사였다. 탁해의 입술을 비집고 흉측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키키키. 부회주, 현재 화봉이 배를 타고 화음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으음.”
흑룡회의 부회주, 독고진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용뇌자 탁해가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입니다! 화봉은 화산의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 기둥이라 칭해지는 존재입니다. 그녀를 죽여 화산으로 보낸다면 승기는 단숨에 저희 쪽으로 기울 것입니다.”
“물론 실컷 범하는 것도 좋고 말이야. 크흐흐.”
“난 예전부터 봉황의 맛이 궁금했다고. 흐흐흐.”
“흐흐흐.”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무인들이 흉소를 터트리며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무인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악명(惡名)을 가진 마인들로 흑룡회의 간부들이었다. 무인들이 기이한 열기에 휩싸이자 보다 못한 독고진이 입을 열었다.
“조용해라.”
독고진의 목소리에 소란스러웠던 무인들이 저마다 입을 다물었다.
“용뇌자.”
“예, 옛!”
탁해가 바싹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흑룡회주인 흑룡혈존이 커다란 포용력으로 사람들을 감싼다면 그의 아들인 흑룡마검 독고진은 커다란 절망감으로 사람을 내리누른다.
끝없는 두려움과 공포.
이것이 독고진이 사람을 부리는 방법이었다.
“배의 위치는?”
“현재 파류호(破流浩)의 지척에 있습니다.”
파류호는 기이한 소용돌이들이 모여 강한 물살을 만들어 내는 곳으로 강에 익숙한 어부들마저 꺼리는 곳이었다. 커다란 배가 아닌 이상, 그곳에 들어간 배는 순식간에 조각으로 나뉠 정도였다. 하지만 합양에서 화음으로 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크기가 작은 중소 선박들은 커다란 대형 선박의 곁에 붙어서 가곤 했다.
“흐음.”
낮은 신음을 흘린 독고진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뒤, 독고진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청홍쌍마(靑紅雙魔), 탈혼검마(奪魂劍魔), 대룡부마(大龍斧魔).”
스윽.
독고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무인들 중 네 명의 무인들이 고개를 들어 독고진을 바라봤다.
각각 청색과 홍색의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부부가 청홍쌍마였고, 냉막한 얼굴에 오른쪽 눈을 가로지르는 검상을 가진 중년인이 탈혼검마, 그리고 거대한 덩치에 온몸을 휘감는 커다란 용 문신을 한 자가 바로 대룡부마였다.
그들 모두 섬서에서 알아주는 마두들로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떨게 한다는 흉악한 무인들이었다.
스윽.
움찔.
그런 그들도 독고진의 핏발 선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가라. 그리고 화봉을 데려와라. 혈룡대(血龍隊)를 붙여 주겠다.”
“……!”
독고진의 말에 네 명은 물론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무인들의 얼굴마저 일그러졌다.
화봉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애송이다. 그런 애송이를 끌고 오는 일에 간부 네 명이 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흑룡회의 실질적인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혈룡대를 붙여 주겠다니. 아무리 화봉을 생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지만 이것은 너무 과한 처사였다.
더군다나 혈룡대는 탈혼검마의 휘하에 있는 부대였다. 혈룡대가 사용하는 혈룡궁(血龍弓)은 혈룡시(血龍矢)라는 커다란 철시(鐵矢)를 사용하는 대궁(大弓)으로 고수들도 쉽사리 막지 못하는 패도적인 병기였다.
“부, 부회주.”
탁해가 붉어진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동시에 굳게 닫혔던 독고진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독고진의 말에 네 명의 얼굴이 긴장으로 얼룩졌다.
“들고 오기가 힘이 들면 목 아래는 물고기 밥으로 던져 줘도 좋다.”
“……!”
독고진의 말을 이해한 마두들이 소리 없이 음험한 웃음을 터트렸다.
힘없이 축 늘어진 손을 들어 올린 독고진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떠나라.”
“존명!”
네 명의 마두들이 힘차게 대답하고는 몸을 날렸다.
“나머지 간부들 또한 각자 맡은 무인들을 관리하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주의해라.”
“존명!”
오체투지하고 있던 마두들 또한 힘찬 대답과 함께 몸을 날려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독고진과 탁해뿐이었다.
“용뇌자도 그만 가서 쉬시오.”
“예, 예.”
탁해가 굽실거리며 발을 놀려 사라졌다. 무공을 모르는 그로서는 그저 최대한 발을 놀리는 것이 전부였다. 마침내 탁해의 기척마저 완전히 사라지자 독고진이 태사의에 몸을 파묻으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스윽.
그런 독고진의 뒤에서 나체의 여인이 귀신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빛이 감도는 기다란 흑발을 탐스럽게 흐트러트린 여인이었다. 처음부터 태사의 뒤에 있었던 듯했다. 방금 전까지 있던 탁해나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마두들이 봤다면 까무러칠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독고진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여인의 등장을 반기는 듯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어…….”
여인의 손길에 몸을 맡기는 독고진의 눈 위로 붉은 핏줄이 불거졌다.
텅텅텅!
“아씨, 황 아저씨! 장사 안 해요?”
멍한 얼굴로 객잔의 바닥을 고치던 소년, 왕삼이 망치질을 하다 말고 황 숙수를 향해 불평을 토했다. 독고정 패거리가 갔으니 이제 장사를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저 황 숙수는 청연이 떠나고 나서부터 멍하니 있더니 이제는 장사를 시작할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하루를 보내기가 일쑤였다.
‘늙은이가 주책이야!’
우당탕!
손에 들린 망치를 내던진 왕삼이 성큼성큼 황 숙수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장사 안 해요? 이러다 우리 망한다구요!”
“…….”
“아씨, 황 아저씨! 정말…….”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예?”
난데없는 황 숙수의 말에 왕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 숙수는 미친 사람처럼 안 되겠다는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콰앙!
콰당탕.
왕삼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막 고친 문이 바스러지며 파편을 튀겼다.
“어떤 새끼…… 헉!”
붉어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던 왕삼이 부서진 파편을 밟고 있는 인영의 모습에 숨을 집어삼켰다.
“도, 독고정!”
인영의 정체는 바로 며칠 전 청연과 홍단야게서 도망친 독고정이었다. 경악하는 왕삼의 모습에 독고정이 싸늘한 웃음을 터트렸다.
“프흐흐, 잘 있었느냐.”
스르릉.
한바탕 괴소를 터트린 독고정이 허리춤에 달린 검을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검이 빛을 받아 번뜩였다.
“아, 아저씨! 어서 도망쳐요! 저 미친놈이 진짜 우릴 죽이려 한다고요!”
왕삼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 숙수를 재촉했지만 황 숙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전과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황 숙수를 재촉하는 왕삼의 얼굴에 당혹감과 함께 고민이 서렸다. 지금 도망친다면 자신은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 숙수는 길에서 굶어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황 숙수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잘해야 좀도둑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제기랄!”
한차례 욕을 내뱉은 왕삼이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주어 들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기랄! 내가 이 미친 자식을 막을 테니까 아저씨는 빨리 도망쳐요!”
“흐흐흐, 감히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이 객잔을 중심으로 철웅회(鐵熊會) 녀석들이 진을 치고 있다.”
독고정의 말에 왕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철웅회는 흑룡회가 관리하는 집단으로 그저 그런 삼류 문파였다. 하지만 왕삼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상대였다. 애초에 전문적으로 무공을 배운 놈들을 점소이 일만 하던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을 삼킨 왕삼이 절망적인 눈으로 황 숙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 숙수만은 살려야 했다.
황 숙수의 앞을 막아선 왕삼이 독고정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딴에는 위협을 하기 위해 했다지만 독고정이 보기에는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프흐흐, 귀엽게 노는구나.”
음침한 웃음을 터트린 독고정이 가볍게 발을 놀렸다.
“이놈!”
“허억!”
가볍게 발을 놀린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왕삼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독고정이 소리를 지르며 검을 들어 올리자 왕삼이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떨어트리며 비명을 질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떠는 왕삼의 모습에 독고정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 나도 바쁜 몸이니 이제 그만 죽어라!”
쐐애액!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독고정의 검이 왕삼의 머리를 향해 쇄도했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왕삼이 눈을 감고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응?”
아무리 기다려도 느껴지지 않는 통증에 천천히 열리던 왕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바로 코앞에서 멈춘 날카로운 검 때문이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기운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머리를 가를 듯했지만 검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이익!”
독고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무, 무슨 사술을 사용한 거냐!”
아무리 힘을 가해도 검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때다!’
미친놈 보듯이 독고정을 바라보는 왕삼의 눈이 번뜩였다.
독고정이 왜 저런지는 모르지만 그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기회였다. 밖의 철웅회가 문제였지만 지금은 독고정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때마침 방금 전 자신이 떨어트린 쇠망치가 눈에 들어왔다.
“이 자식……!”
망치를 주워 들은 왕삼이 막 독고정의 정수리를 향해 망치를 내려치려는 순간, 왕삼의 뒤편에서 인영이 스윽 나섰다.
“화, 황 아저씨!”
인영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던 황 숙수였다. 방금 전까지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왕삼이 반색하며 황 숙수를 향해 물었다.
“아저씨, 정신이 돌아온 거예요?”
“…….”
황 숙수가 말이 없자 왕삼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아, 아저씨?”
“되었단다, 아가야. 이제 비키거라.”
“예, 예?”
생소한 황 숙수의 말투에 왕삼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아가라니? 이제껏 황 숙수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라 봐야 저놈, 저 새끼가 전부였다. 검은색 가득한 공허한 눈으로 독고정을 힐긋 쳐다본 황 숙수가 객잔의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십살객(十殺客)들 모두 거기 있느냐.”
쉬시식.
황 숙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객잔의 천장에서 총 열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 아저씨! 충 할아버지! 철 형!”
인영 중에는 왕삼이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도 있었다. 대장간의 금 아저씨라든가 푸줏간의 충 할아버지, 그리고 시장의 건달인 철 형까지. 모두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게 대체…… 읍!”
반가움을 표하며 막 인영에게 다가가려던 왕삼이 인영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혈향에 코를 움켜쥐고는 뒤로 물러섰다.
“시, 시, 십살객…….”
쨍그랑.
저도 모르게 검을 떨어트린 독고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십살객(十殺客)은 자객문의 일백(一百) 살수들 중 정점에 서 있는 살문의 정예 살수들로 그들 모두가 절정의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오직 자객문의 문주, 부동살(不動殺)의 명령만을 수행했다.
부동살은 천하삼객 중 살객의 또 다른 별호로 살수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십살객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이유는 단 하나, 자객문의 문주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경악 서린 독고정의 시선이 황 숙수에게서 멈췄다.
“서, 설마…….”
“…….”
스윽.
독고정의 시선을 무덤덤하게 흘려보낸 황 숙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독고정을 지나쳤다. 동시에 파랗게 질린 독고정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다, 당신은…… 우웩!”
투두둑.
말을 하던 독고정이 돌연 거멓게 죽은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독고정의 입 사이로 검은색 죽은피가 꾸역꾸역 뿜어져 나왔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독고정에게 황 숙수의 시선이 향했다. 눈앞에 파리 한 마리를 죽인 듯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당신이 왜……!”
툭.
심한 경련을 하던 독고정이 게워 내던 피를 멈추는가 싶더니 곧 힘없이 몸을 늘어트렸다.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황 숙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홍단야의 무표정함이 얼음의 차가움이었다면 황 숙수의 무표정함은 쇠에서나 느껴지는 비릿한 차가움이었다.
귀찮은 것을 치웠다는 공허한 황 숙수의 눈빛에 왕삼의 등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화, 황 아저씨…….”
냉막함이 흐르는 황 숙수의 모습에 왕삼이 당황했다. 자신이 황 숙수와 함께한 몇 년간 저런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황 숙수는 괴팍하지만 다정한 노인이었다.
“십살객은 들어라.”
척!
황 숙수의 말에 열 명의 인영들이 고개를 숙이고 황 숙수의 말을 기다렸다.
“일객(一客)은 이 객잔을 저 아이의 명의로 바꾸고 믿을 만한 사람을 저 아이에게 붙여라. 기간은 저 아이가 혼자서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다.”
“예!”
푸줏간의 충 노인이 고개를 숙이며 짧게 답했다.
“이객(二客).”
“옛!”
대장간의 금 씨가 앞으로 나서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화음까지의 거리는?”
“문주님은 열흘. 저희는 열사흘 거립니다.”
“모두 여드래 안에 화음에 있는 안전가옥으로 모여라.”
“예!”
못한다며 우는 소리라도 할 법하건만 인영들에게서는 그런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문주가 하라면 하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살수들의 전설이다. 그는 자신들이 가능하기에 시킨 것이다. 그는 가능하지 않다면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다.
스윽.
이내 고개를 돌린 황 숙수가 왕삼을 바라봤다.
황 숙수의 눈빛이 예전의 다정한 눈빛과 다르지 않았기에 왕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저씨…….”
“아가야.”
다정한 황 숙수의 목소리에 왕삼이 맘을 멈췄다. 그런 왕삼을 따스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황 숙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만큼은 피를 묻히지 말고 행복하게 살거라.”
이 말만큼은 황 숙수의 진심이었다.
그는 왕삼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비록 정체를 숨기기 위해 차린 객잔이고, 또한 우연치 않게 목숨을 구해 준 아이라지만 황 숙수는 진정으로 왕삼에게 애정을 느꼈다. 그렇기에 황 숙수는 왕삼이 피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다.
말을 마친 황 숙수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객잔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황 숙수가 문에 가까워질수록 멍하니 풀려 있던 왕삼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아, 아저씨! 식사 거르지 말고 제때 꼭 챙겨 드세요!”
“…….”
왕삼의 말에 황 숙수의 걸음이 멈칫했지만 잠시였다.
피식.
황 숙수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아이는 언제나 순진하다. 그렇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고단하겠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으리라.
스윽.
객잔의 문을 나선 황 숙수의 눈앞에 수많은 무인들의 시신이 펼쳐져 있었다. 하나같이 가슴에 ‘철(鐵)’ 자를 새긴 무인들은 모두 철웅회 소속의 무인들이었다. 아마 십살객들 작품이리라.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에 무표정한 황 숙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걸은 길이고, 이제부터 다시 걸어야 할 길이다.
‘하지만 그 아이만큼은 절대 걷지 말아야 한다!’
한 살수가 있었다.
살수는 임무 도중 어느 여자와 정을 통했고 여자는 아이를 임신했다. 여자는 기뻐하며 살수에게 그 사실을 알렸지만 살수는 기뻐할 수 없었다. 자신은 살수였다. 목표를 죽이면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살수는 목표를 죽이고 여자의 집에 숨어들었다.
단검 한 자루를 건네준 살수는 훗날 자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아이에게 단검을 물려주라는 말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그것이 끝이었다. 아니, 끝인 줄 알았다.
십몇 년의 세월이 흘러 살수는 유명해졌고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수는 화산파의 어느 도인을 죽이기 위해 숙수로 위장하고 화산파에 숨어들었다. 몇십 일이 걸려 목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 뒤 목표를 죽이기 위해 야밤을 틈타 연무장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소녀가 날카로운 단검으로 목검을 다듬고 있었는데 그 단검은 바로 과거 자신이 여자에게 건넨 단검이었다. 살수는 아이에게 기묘한 끌림을 느꼈다. 살수는 무감정했던 자신이 느끼는 어색한 감정에 불안해 했고, 그 불안감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살수는 문파의 모든 일을 일객에게 맡기고 오직 아이를 사랑하는 일에 매진했다.
비록 숙수의 신분이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산파의 문주가 자신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이가 있는 곳에서 피를 흘리기 싫었던 살수는 조용히 화산파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도 아이의 소식이 살수의 귀로 흘러들었다.
화산파의 여협.
정파 무림의 기대주.
사람을 죽이는 일로 먹고사는 문파의 문주인 자신과는 상반되는 평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숨겨야 했다.
하지만 그리움을 참지 못한 살수는 서찰을 이용해 아이와 연락을 취했고, 가끔 아이를 찾아가 먼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며칠 전, 아이가 찾아왔다.
그리고 아이가 혈로를 걷기 위해 길을 떠났다.
화산파와 화봉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짓눌린 채 피의 길을 걷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것은 막아야 했다. 아이 또한 무인이기에 영원히 피를 묻히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 피를 최소한으로 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일이다.
“이번 목표는 화봉 청연이다.”
황 숙수, 아니 살객(殺客)의 눈이 서서히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이번에는 암살이 아니라 보호가 목적이다.”
“예!”
살객의 두 눈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화산을 좇았다.
‘그 아이에게 해를 가한다면 감히 하늘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살객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북천무제』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