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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악! 이 더러운 놈들!”
2미터에 육박하는 키에 오크들마저 압도할 만한 덩치와 근육을 자랑하는 자는 대륙 전체에서도 그 개체 수가 극히 적다는 블랙 타이거의 가죽을 전신에 걸친 사내였다.
“꾸위익!”
또 하나의 오크가 그의 도끼에 명을 달리했고, 남아 있는 오크의 수는 겨우 다섯. 그중 몸이 성한 것은 둘뿐이었다.
인간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마적들의 시체는 오크들의 시체와 뒤섞여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숨이 붙어 있는 자는 지금 발악하듯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사내까지 합해 셋뿐이었다.
“후욱, 후욱.”
“우윅, 구윅.”
아마도 이자가 마적단의 두목인 것 같았다. 눈빛도 몸짓도 우두머리의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맞은편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오크 역시 옆에 서 있는 다른 오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차림새나 무기를 보아 오크들의 리더인 것 같았다.
리더 대 리더!
둘은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듯 불꽃 튀는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그것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죽어라, 인간!”
“흐야압!”
한 손엔 인간들의 피로 뒤범벅이 된 글레이브를, 다른 손엔 싸움 도중 주운 듯해 보이는 핸드엑스를 들고 달려드는 오크 족장이었고, 맞은편에서 노려보던 마적 두목 역시 양손도끼를 붕붕 휘돌리며 그를 맞이했다. 아니, 맞이하는 척했다.
“먹어라!”
문득 두목의 양옆에서 튀어나온 나머지 마적들이 좌우에서 오크 족장을 공격했고, 일대일이라 믿고 있다가 방심한 듯 움찔한 오크 족장은 그중 하나의 검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동시에 달려든 자의 검을 허용해 복부에 심한 자상을 입었다.
악을 쓰며 팔을 휘둘러 그자의 가슴팍에 글레이브를 꽂아 넣긴 했지만 곧바로 달려든 마적 두목의 커다란 양손 도끼를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푸욱.
“크허헉?!”
오크 족장은 공격을 당하는 순간에도 눈을 감지 않았기에 앞에서 벌어진 일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이대로 끝이구나 싶었던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두 인간이 마적 둘을 공격한 것이다.
“……!”
마적 두목은 자신의 가슴팍 위로 솟아 있는 뾰족한 꼬챙이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것이 푸직, 하며 몸 밖으로 빠져나가자 당장이라도 눈앞의 오크를 찍어 버릴 듯 커다란 도끼를 세워 들고 있던 두 팔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터턱.
커다란 양손도끼가 모래 바닥에 떨어져 반쯤 박혔다.
“아론의 빚을 갚으러 왔다.”
상대는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은 채 재차 그의 등을 찌르고, 또 찔렀다.
아론. 아론이 누구지.
마적 두목은 그대로 서서 자신의 가슴으로 솟았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뾰족한 무언가를 보며 생각했지만 쉽게 기억나지 않았다.
“처, 천사상?”
몸에 열 곳이 넘는 구멍이 생긴 후에야 기억난 듯 창백해진 얼굴로 신음처럼 내뱉은 마적 두목은 몸을 돌려 상대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두 다리가 굳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적당히 버티고 죽어라. 피도 꽤 많이 흘려서 살긴 틀린 것 같은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적대심도 없고, 그렇다고 친근함도 없는 그저 무덤덤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자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 버린 두목은 따스한 모래 바닥에 누운 뒤에야 상대를 올려다볼 수 있었지만 눈부신 햇빛 때문에 그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상단은 분명, ……몰살시켰을 텐데.”
케이는 마적 두목의 질문에 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앞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오크 족장을 바라보았다.
“…….”
케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보면 부상 입은 오크를 걱정하는 얼굴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방의 오크들을 둘이서 쓸어버릴 수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비록 부상을 입었다고는 해도 녀석들을 전부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이 서자 케이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대체 너희들은 누구냐?”
마적단 두목은 아직도 숨이 붙어서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죽었어도 벌써 죽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케이는 문득 퀘스트 진행상 뭔가가 더 남은 것이 아닌가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말했잖아. 아론의 빚을 갚으러 왔다고.”
“……아론이라면 상단의 호위대장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끄윽……. 분명히 내가 해치웠을 텐데.”
그자의 불신 어린 시선에 피식 웃은 케이는 꼿꼿이 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뒤가 어설펐어.”
“…….”
“물건은 우리가 대신 호송하기로 했다.”
“크, 크큭. 크크크……!”
이미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까지 띠고 있는 얼굴로 웃기 시작하는 마적 두목의 모습에 케이는 조금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자는 한참이나 더 웃고 나서야 꾸역꾸역 피를 뱉어 내고 말을 이었다.
“그걸 어디로 가져간다는 말이냐?”
“물론 가엘리안이다. 신전에 가져다주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더군.”
“크, 크하하!”
기분 나쁜 웃음소리.
케이는 퀘스트고 뭐고 그냥 완전히 입 다물게 해 주고자 창을 고쳐 쥐었지만 그 뒤에 들려온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헛소리냐. ……이제 와서 전쟁을 막겠다니.”
“……?”
“레이든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것은 벌써 1년도 더 전인데 말이다! 크하하하!”
“뭐라고?”
케이가 갸웃하며 되묻자 마적 두목이 끌끌 혀를 찼다.
“천사상의 탈취는 가엘리안에서 의뢰해 온 것이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그 쓸모없는 돌멩이가 아니라 레이든 왕국이었으니까!”
“……그런 거냐.”
“일 년도 더 지난 일을……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
케이는 대답 없이 그자의 머리를 걷어차 목을 꺾었다. 주저 없는 그의 행동은 앞에서 지켜보던 오크 족장마저 움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멜하드 마적단’을 몰살시켰습니다.
명성이 조금 올랐습니다.
업적으로 인하여 레벨이 3상승하였습니다.
행동 방식에 따라 호칭 ‘비열한’을 획득하였습니다.
호칭 획득을 통해 새로운 스킬을 배웠습니다.
액티브 스킬 <뒤치기>
“젠장. 뒀다 팔아먹을 걸.”
등급이 높은 퀘스트.
보상이 좋을 거라 생각해서 나름 머리를 굴렸는데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아무리 봐 줘도 좋은 거라곤 레벌 3업뿐.
케이는 죽어 버린 마적 두목에게는 흥미가 사라진 듯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겨 구석 쪽의 작은 천막으로 향했다.
이미 정찰을 통해서 대략적인 천막 배치는 알고 있었다.
“뭐. 안 팔아먹은 게 다행일지도.”
작은 천막의 휘장을 걷고 들어가자 마적단이 약탈한 수많은 물건들과 돈, 각종 무구들이 가득했다.
뒤이어 천막으로 들어온 레이 역시 눈을 빛냈다.
“여기 있군.”
딱히 찾지 않아도 확실히 보이는 천사상. 그것은 실제 사람 크기였기에 저절로 눈에 띄었다.
“천사상은 개뿔이. 낚시왕 상이라고 해라.”
손으로 툭 건드리며 투덜거리자 문득 안내창이 떠오르며 음성이 들려왔다.
퀘스트 변경 <하밀란의 천사상>
영웅의 보폭은 악당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목숨을 걸고 노력하여 망자의 부탁을 지키려 했지만 이미 레이든 왕국은 1년 전 가엘리안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천사가 돌아갈 곳은 고향뿐.
그대는 천사상을 레이든 왕국, 이제는 레이든 공국이 되어 버린 그곳으로 돌려보내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할 것이다.
<퀘스트 충족 요건>
레이든 공국의 용병 길드에서 ‘데일란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당신에게 잊혀진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줄 것이다.
난이도 : B
“레이든이 어딘지 알아야 가든 말든…….”
금빛이었던 퀘스트 두루마리가 은빛이 되었고, 케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앞에 있던 천사상을 그대로 인벤토리에 드래그해 넣었다.
“무게로 따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인벤토리는 각 아이템이 한 칸씩 차지하는 단순한 구조였다.
기본적으로 50칸이 주어지고, 추가하고 싶다면 가방을 구입하여 칸을 늘릴 수도 있다.
무게 제한 없이 50칸이라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긴 하지만 유저로서 많이 들 수 있다는 것에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
“우윅, 구윅.”
“어서 수거하라!”
천막 근처에서 들려오는 오크들의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뜬 케이는 서둘러 천막 안에 있던 물건들 중 값져 보이는 것들을 인벤토리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구석에 있던 은화 상자도 잊지 않았고, 인벤토리 한 칸만 차지하는 촛대나 찻잔 따위보다 묵직하고 튼튼해 보이는 갑옷이나 무기류 위주로 넣었다.
애석하게도 그곳에 쌓여 있는 방어구들 중에는 사막 늑대 셋의 메리트를 뛰어넘을 만한 것이 없었기에 그나마 금속이 많이 들어간 것들 위주로 고르고 있었다.
인벤토리를 10칸 추가해 주는 가방을 두 개 찾아낸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중 하나를 레이에게 넘긴 그는 신나게 아이템들을 쓸어 담은 뒤 배부른 얼굴로 천막을 나왔다.
“우윅, 구윅.”
몇 안 남은 오크들은 언제 부상당했냐는 듯 벌써 그럭저럭 회복되어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쪽 공터에 쌓이기 시작한 오크와 인간들의 시체, 그리고 그 옆쪽에 따로 모이고 있는 무구들을 본 케이는 혹시 쓸 만한 물건이 없을까 그쪽으로 가려다 앞을 막는 오크들에게 제지당했다.
“인간!”
“왜 불러.”
“너는 누구인가?”
가만히 묻는 오크 족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케이는 대답 여부에 따라서 당장 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분위기의 오크들을 돌아보고 잠시 고민했다.
“너는 왜 우리를 도왔…… 구윅, 는가?”
“그것은…….”
옆에서 레이가 그를 바라보며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까닥거렸다.
레이는 녹슨 검을 버리고 꽤 쓸 만한 검을 두 자루나 챙겨 양쪽에 차고 있었다.
여차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상대는 거의 다 회복된 장성한 오크 다섯, 게다가 가장 앞에 있는 것은 다른 오크들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 당연히 그들의 눈으로 레벨을 알아볼 수 없는 오크 족장이었다.
“……형.”
고민하고 있던 케이는 옆에서 마른입을 달싹이는 레이에게 한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앞에 선 오크 족장을 당당하게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 오크들을 도운 이유는.”
“…….”
나머지 오크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영진을 향했다.
케이는 전혀 숨김없는 얼굴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나에게도 오크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