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4)/


“…….”
레이는 조금 멍한 얼굴이 되어 형을 지켜보았다.
케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써먹을 만한 건수를 찾아내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콧구멍을 세 개로 만들어 주마, 이 더러운 녀석!”
“우, 우윅!”
케이는 잔뜩 겁을 주다가도 조금 느슨하게 풀어 주며 말로 살살 약을 올리기도 하고, 노골적인 적개심을 담아 오크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너희가 살고 있는 보잘것없는 동굴이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나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
윽박지르고 있지만 사실 아주 친절하게 돌아갈 방향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었다.
케이는 새끼 오크의 체력이 거의 다 떨어질 때까지 때리거나 찌르는 것을 하다가도 위험하겠다 싶을 때면 그것을 중단하고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며 입으로는 모욕을 주었다.
“앞으로 정확히 하루 주겠다.”
“……우윅?”
한참을 괴롭히던 케이가 옆으로 물러서자 조금 놀란 얼굴이 된 오크는 혹시나 또 찰까 싶은지 여전히 누워서 두 손을 올린 채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앞으로 하루. 그때까지 이 사막을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일족을 몰살시킬 것이다. 우리 멜.하.드 마적단은 너희가 살고 있는 동굴에서 아래로 한 시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지.”
“우, 우윅, 우리가 왜. 왜…… 떠나야 하냐?”
“그건 어른들한테 물어봐! 물론 떠나지 않으면 열 명이나 되는 인간들이 너희들을 모두 쓸어버릴 거라고 가서 전해라.”
엉거주춤 일어난 녀석은 케이가 엉덩이를 걷어차자 달려가기 시작하더니 그래도 의심스러운 듯 몇 차례 돌아보며 둘이 쫓아오지는 않나 확인했다.
“열 명이라고?”
레이의 물음에 케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50명이라고 하면 오크라고 해도 조금 신중해지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열 명이라고 얕보고 조금만 가면 어쩌지?”
레이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케이는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50명이라고 해도 100% 상황은 아닐 테니까.”
“음.”
레이는 이틀 전 정찰했던 오아시스의 상황을 떠올렸다.
돌아다니는 경계병들이나 가끔 천막을 오가는 다른 자들 중 부상자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상단과의 전투가 무척 격렬했던 모양이다.
소국이긴 해도 한 나라의 중요 물품을 호송하는 임무. 그만큼 뛰어난 이들이 호위를 맡았을 것이 당연했을 테니까.
물론 결과로 보아 마적단이 더 강했기에 호위병들을 해치우고 물건들을 탈취할 수 있었겠지만 마적단 역시 본래의 전투력에는 미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런 것까지 계산에 두었던 것일까? 레이는 또 한 번 케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오크 녀석이 동굴까지 가는 데 걸릴 시간은 대략 늦어도 한 시간. 녀석들이 당장 오아시스로 쳐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그렇게 된다고 가정할 경우 빠르면 지금부터 두 시간 정도 후가 되겠지.”
“그동안 뭘 하지?”
레이의 물음에 케이는 가시 창을 고쳐 쥐었다.
“이 근처에 전갈 밭이 있지 않나?”
블랙 스콜피온. 달려가면 10여 분 거리에 있는 몬스터로, 레벨은 4에서 6 정도다.
하나하나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놈들이었지만 수십, 수백 마리가 시커멓게 몰려다니기 때문에 신발과 옷에 신경 써야 했다.
개개의 경험치는 별로지만 역시 한꺼번에 몰아서 잡다 보면 나름 쏠쏠한 녀석이었고, 전갈 꼬리나 독침, 해독제 따위를 드롭 했다.

뿌지직.
시커멓게 펼쳐진 전갈들의 시체 사이사이로 증발되고 있는 연기와 더불어 몇몇 잡템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지만 섣불리 줍진 않았다.
모래 속 혹은 죽은 전갈들의 시체 틈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녀석들이 있기 때문인데, 전갈에 쏘여 혹 중독 상태에 빠지더라도 해독제가 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 특유의 기분 나쁜 통증이 싫은 것이다.
“흐이차!”
레이는 방패의 넓은 부위로 내려쳐 전갈들을 으깨고 다녔고, 케이는 발로 밟고 다니거나 창끝으로 푹푹 찔러 잡았다.
창으로 작은 녀석들을 일일이 찔러 잡는 것은 밟고 다니는 것에 비해 비효율적이긴 했지만 창술 관련 스킬의 숙련도 향상에는 좋은 방법이었기에 종종 행하고 있었다.
“후우.”
으깨진 전갈들이 대부분 증발되고 나서야 바닥 곳곳에 떨어진 잡템들을 수거하던 둘은 문득 떠오른 안내창과 무거운 종소리에 같은 곳을 향했다.

‘사막 오크 부족’과 ‘멜하드 마적단’이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얼래?”
“……!”
둘은 서둘러 잡템들을 수거한 뒤 오아시스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아름다운 녀석들, 정말 당장 치는 건가?”
“적대만 되고 당장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
앞으로 내달리던 둘은 오아시스 근방의 한 모래 언덕 위에서 엎드려 지켜보았다.
조금 돌아서 왔지만 달렸기 때문에 평소 걷던 것과 비슷한 속도였고, 당장은 마적단의 반응에 큰 변화가 없었다. 아마도 아직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여기서 대기해야 할 것 같군.”
“응.”
둘은 각자 인벤토리에서 꺼낸 선인장 물통으로 목을 축인 뒤 말린 늑대고기를 질겅거렸다.
불을 피울 능력이 없어 고기가 있어도 구워먹지 못하던 그들은 날것을 먹을 수는 없으니 일단 적당히 잘라서 햇빛에 말려 비축해 두었다.
양념을 하여 잘 가공한 육포와는 천지 차이로, 비릿한 냄새까지 났지만 그럭저럭 고기의 질감은 느껴졌고, 포만감 역시 같은 양의 선인장보다 훨씬 좋았다.
“오호.”
“정말이네.”
멀리 북쪽에서 잔잔하게 일어나고 있는 모래먼지가 확실히 눈에 보였다. 그것은 분명 일반적인 모래바람과는 달랐다.
“시간 아껴서 좋군.”
무엇이 재미있는지 껄껄 웃던 케이는 말린 고기 하나를 더 꺼내 씹기 시작했다.
문득 이곳까지 확실히 들릴 만큼 크고 우렁찬 목소리가 사막에 울려 퍼졌다.
“오만 방자한 인…… 구윅, 들! 쓸어버려라!”
“우윅, 구윅!”
“우우우우우우윅!”
케이는 눈을 빛냈다.
“제대로잖아?”
분명히 인간은 열 명이라고 했는데도 굉장히 많은 수의 오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전부 장성한 오크들이군.”
“……저기 하나 빼고.”
레이의 손가락을 쫓아가 보니 둘에게 얻어맞았던 새끼 오크가 눈에 보였다.
오크들은 생김새가 비슷비슷하긴 해도 구별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녀석을 알아보았다.
“뭐냐? 무슨 일이냐?!”
“오크들이다! 오크들이 쳐들어왔다!”
오아시스의 경계병들이 다급히 소리치며 천막 사이를 뛰어다니자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인간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수가 50여 명. 예상대로였다. 그나마 일부는 부상으로 절뚝이거나 무기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자들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불리할 거라 판단되었다.
오크들을 보라.
저 우락부락한 몸집! 특별히 강조된 단단한 대흉근!
장성한 오크가 서른이 넘는다.
“불쌍한 놈들. 다 죽겠네.”
혀를 차며 일어난 케이가 언덕 아래에서 시작된 오크와 인간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다 가시 창 하나를 꺼내들었다.
“무슨……?”
레이는 이 상황에서 어느 한쪽을 도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케이는 이미 잔뜩 힘을 실어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가시 창을 던지고 바로 엎드려 버렸다.
쇄애액―
푸욱!
“끄애애액!”
그가 던진 가시 창은 40여 미터를 날아가 한 오크의 뒷목을 꿰뚫었다.
당연히 해당 오크는 즉사했고, 주위에 있던 오크와 인간들이 서로 흠칫해 주위를 돌아보나 싶더니 다시금 싸움에 집중했다.
“너무한다.”
레이의 말에 케이는 내가 뭘, 하는 얼굴로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케이가 창을 던져 죽인 오크는 아까 전 두들겨 팼던 그 새끼 오크였던 것이다.
“우리 얼굴을 알아.”
“얼굴을 보여야 돼?”
레이의 물음에 케이는 낮게 끄덕이며 다시금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저 녀석들 새끼랑 암컷 빼고 다 몰고 온 것 같은데……. 마적단 놈들 생각보다 강한데? 어설프게 왔으면 그냥 쓸릴 뻔했어.”
그의 말대로다. 처음 생각으로는 오크들이 쉽게 이길 싸움인 것 같았지만 전장 곳곳을 보니 개개인의 기량 때문인지 전술도 없이 개싸움을 벌이고 있던 오크들이 하나하나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내 팔자야.”
오크를 도와야 하다니.
투덜거리며 다시 일어난 케이가 인벤토리에서 가시 창을 두어 개 꺼내 모래에 푹 쑤셔 박고 그중 하나를 뽑아 거리를 잰 뒤 힘껏 던졌다.
“훅.”
던지고 나서 바로 엎드린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이번에는 누굴 노렸는지 모르지만 완전히 빗나가 맨 땅에 꽂히는 가시 창이었다.
“누굴 맞출 생각인데?”
“당연히 마적단이지.”
케이가 노리는 것은 상쇄. 어느 한쪽도 유리함이 없이 둘 다 무너지는 것이었기에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었다.
“마적단이라는 거지?”
레이도 슬금슬금 일어나 가시 창을 꺼내기 시작했고, 둘은 언덕 위에서 몇 회에 걸친 투창으로 세 명의 마적단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각각 그 주변에서 눈에 띌 만큼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자들이었기에 그들이 무너지자 다시금 양쪽의 균형이 팽팽하게 유지되며 격해지는 싸움이었다.
“길어야 30분이겠군.”
퇴로도 없고 전술도 없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개싸움. 그야말로 난전.
오크들의 거친 숨소리와 인간들의 외침이 뒤섞여 전장의 화음을 이룬다. 듣기 좋은 소리라며 웃고 있던 케이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언덕 아래로 발을 내딛은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20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