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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예상대로였다며 지도에 새로운 지형과 몬스터들을 그리던 케이는 멀리 보이는 바위 동굴. 모래 한가운데 불쑥 솟아 있어 조금 위화감이 드는 그곳 안팎을 오가는 수많은 오크들을 살피며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
현재 그들의 주제파악 능력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보다 10레벨 위의 상대까지였는데 오크들 중 일부가 파악불가인 것을 보아 40레벨 이상인 놈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외의 녀석들은 몇몇 새끼들을 제외하곤 평균 30 안팎이었다. 한두 놈이라면 레이와 둘이서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셋 이상 모이면 그들로서도 어려웠다.
울룩불룩한 근육과 손에 든 조잡한 무기.
몇몇 녀석들은 갓 잡은 듯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생으로 씹어 먹으며 뭐가 좋은지 낄낄거리고 있었다.
“됐다. 돌아가자.”
케이가 짧게 말한 뒤 몸을 돌려 기어가자 그 옆으로 레이가 따라붙었다.
“어쩔 생각이야?”
“말이 통한다는 건 상당히 유용한 상황이지.”
케이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레이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오크랑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물론 통하지.”
동굴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자 일어선 케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기를 시전, 이동 속도를 두 배로 높여 달려가기 시작했고 레이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케이가 향한 곳은 아까 전 새끼 오크를 발견했던 그곳이었다. 정확히는 새끼 오크가 제자리를 맴돌던 그 장소. 새끼 오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검은 넣고 방패만 들어.”
창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는 케이를 레이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형이 시키는 대로 해서 크게 잘못된 적은 아직 없었기에 지시를 따랐다.
“꾸윅?”
문득 옆쪽에서 달려오는 한 인간을 보고 놀란 새끼 오크가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인간! ……인간이 여기에. ……인간 있으면 안 된다!”
나름 머리를 굴려 보던 새끼 오크는 무기가 될 것이 없자 돌처럼 단단한 두 주먹을 들어 올려 나름의 준비를 했다.
“인간…… 우윅!”
10레벨의 새끼 오크라고 해도 그 힘은 장성한 녀석들 못지않은 것. 주먹이라고 무시했다간 골로 갈 수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는 여전히 가까이 접근하며 이제는 두 주먹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도와주기 위해 그쪽으로 달려가던 레이의 눈에 보인 것은 마주 싸울 것처럼 올렸던 두 주먹을 앞으로 휘두른 케이와 그 안에서 튀어나와 앞으로 뿌려진 모래였다.
“……꾸윅!”
크고 부리부리한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뜨고 있던 새끼 오크는 눈에 들어간 모래 때문에 시력을 잃은 채로 발악하듯 두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패.”
레이는 케이의 말을 잘 못 들었는지 고개만 갸웃했고, 케이는 다시금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새끼 오크를 가리킨 뒤 레이가 든 방패를 턱짓했다.
“패라고.”
“…….”
어쩌면 형이 태생부터 비겁한 사람이라던 사람들의 평판이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게 된 레이였다.
투탁! 퍽―! 퍼억―!
가죽 방패가 새끼 오크의 단단한 몸 여기저기를 두드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다가온 케이가 가볍게 다리를 걸자 허우적거리며 머리 위를 막던 새끼 오크가 벌러덩 자빠졌다.
“계속.”
“…….”
레이는 혀를 내두르며 방패 구타를 이어 갔다. 날이 없는 방어구긴 하지만 넓적한 곳으로 다지듯 때려도 레벨빨 때문인지 그럭저럭 녀석의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뒤늦게 시력을 회복한 새끼 오크는 뿌드득 이를 갈며 발악했지만 한참이나 맞던 것을 일거에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교대.”
방패 구타가 끝났나 싶더니 처음 모래를 뿌렸던 자가 방패를 든 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서서 새끼 오크를 잘근잘근 밟기 시작한 것이다. 막아 보려고 팔을 뻗으면 반대쪽을 밟고, 일어나려 하면 걷어차 도로 눕혔다.
“그, 그만 때려라! 그만 때려! 우윅!”
“……!”
새끼 오크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이려면 쉽게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들은 자신을 마치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놀듯 그야말로 자근자근 다져 놓고 있었다.
“…….”
새끼라고 무시하는 건가? 오크는 잔뜩 얻어맞아 부은 얼굴을 들어 두 인간을 보았다.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정반대였다.
하나는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어색하게 방패를 들고 있었다. 옆에 차고 있는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하면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고 죽여 주고 싶은 생각인 것 같았다.
반면 여전히 그를 밟고 있는 하나는 표정이 없었다.
아무런 감정이 서려 있지 않은 얼굴로 무덤덤하게 자신을 밟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를 걷는 듯 무료함마저 느껴지는 눈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왜, 왜 때리냐! 우윅, 그냥 죽여라!”
두려움과 억울함,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부르짖자 그제야 오크를 밟던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오크는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조심조심 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사내의 얼굴에 표정이 생겨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짜증인 것 같았다.
“…….”
레이는 여전히 침묵한 채로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런 궁금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드는 생각은 저 오크의 비명이 오크들의 아지트까지 들리지나 않았을까, 혹은 근처에 저놈의 동료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케이는 일부러 과장된 분노를 얼굴에 담으며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새끼 오크를 내려다보았다.
“네놈. 오크냐?”
“우, 우윅. ……오크다! 오크 맞다!”
당연한 물음에 이제는 울먹거리기 시작한 새끼 오크가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답하자 케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노려보았다.
“오크는 취익, 하고 운다던데?”
그의 말에 새끼 오크가 발끈했지만 슬쩍 올라오는 케이의 발에 움찔해 수그러들었다.
“오크는 울지 않는다!”
“네놈, 지금 울잖아?”
“안 운다! ……우윅, 구윅.”
“취익, 하고 울어야 오크라던데?”
“오크들, 다르다! 츄, 츄이익―, 하는 오크 질 나쁜 오크다!”
보통의 오크들은 취이익―하는, 숨을 들이마시다 어딘가에 긁히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녀석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돼지가 뭔가를 먹거나 중얼거릴 때처럼 우윅, 구윅 소리를 냈다.
“우윅이나 취익이나…….”
낮게 중얼거리던 케이는 더욱 짜증스럽고 분노에 찬 얼굴로 오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걸어 다니는 거냐.”
옆으로 뻗은 케이의 손엔 인벤토리에서 꺼낸 가시 창이 들려 있었다.
“우위……익?!”
뾰족한 창끝이 안 그래도 납작한 콧등을 꾹 누르자 흥분하던 것도 잊고 딱딱하게 굳은 새끼 오크는 따끔한 통증과 함께 피가 조금 흐르는데도 꿈쩍하지 못하고 그저 마른침을 꼴깍 목 뒤로 넘길 뿐이었다.
레이는 죽일 거면 진작 조용히 죽일 것이지, 하는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하지만 뒤이어 케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크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더러운 오크들아! 이 사막은 우리 멜하드 마적단의 영토다!”
멜하드 마적단!
아론의 퀘스트에 적혀 있는 그들의 아지트는 지금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한 시간쯤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물론 현재의 이동 속도로 따져 본 거리였고 그곳을 처음 발견한 것은 이틀 전, 세레크를 사냥하기 전이었다.
놈들의 규모는 예상한 것보다는 작았지만 그에 속한 자들 하나하나가 무척 강해 보였다. 당시로서는 상대하기 어려운 녀석들로만 스물 이상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열 곳이 넘는 크고 작은 천막 안에 몇 명이 더 있을지는 확실히 장담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드러난 수를 보니 수백은 될 거라 예상했던 것보다는 확실히 적을 듯했다. 많아 봐야 50명 정도.
문제는 그들 하나하나가 꽤 강해 보인다는 것. 그리고 마적단에 걸맞게 말과 낙타들을 갖고 있어 기동력이 좋다는 것이었다.
한번 싸움에 휘말리게 되면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할 거라 판단한 케이는 정찰만 하고 그대로 빠졌다.
당시 30이 조금 안 되는 레벨로도 퀘스트 난이도가 AA―로 단 두 단계 떨어진 것에 불과했기에 그들 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구차한 임기응변을 했더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라는 말이 나온 것도 돌아선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겠지만.
멜하드 마적단의 아지트는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름이 20여 미터쯤 되어 보이는 연못 주위로 십여 그루의 크고 작은 야자수가 있고, 그 둘레를 역시 크고 작은 천막들이 둘러싼 형태였다.
아지트를 둘러싼 방책 따위는 없었고 그저 10여 명 정도가 교대로 순찰을 도는 것이 경계의 전부였다.
겉으로는 허술해 보이는 경계였지만 당장 사막을 오래 돌아다녀 본 케이와 레이는 오아시스 주위에는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기에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