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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경계 태세로 경비를 선 지 한 달째.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계 태세를 유지하다 보니 미래건설의 직원과 백호 PMC의 용병들 모두 한껏 지쳐 있었다.
그로 인해 현장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날카로워져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번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외출을 허가해 줄 수는 없었다.
이미 이 지역 지배자인 이그노아 마피아와는 척을 진 상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외출을 허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 팀장, 이대로 가다가는 직원들이 폭발할 것 같아. 뭔가 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뭔가 사고가 터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업무를 중단하면 어떨까 해서 말이야…….”
박명수 전무는 일단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미래건설 직원들을 귀국시키기로 이미 현장 감독관들과 이야기를 끝낸 터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용을 경비를 맡은 백호 PMC의 책임자인 김정민 팀장에게 말하는 중이었다.
그로서는 이들에게 현장의 경비를 맡겨 두고 안전한 곳으로 직원들을 보내려니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해서 백호 PMC에서 현장을 좀 지켜 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김정민 팀장은 그가 하려는 말의 뜻을 금방 캐치하고는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흔쾌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희가 계약을 한 사항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박명수 전무가 말을 덧붙였다.
“현장 상황이 어려워지면 여러분도 안전을 먼저 도모하십니다. 괜히 끝까지 현장을 고수하여 희생이 발생할 필요는 없으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박명수 전무는 지금 시베리아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정보통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백호 PMC에 애꿎은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하는 것이었다.
다른 기업 같았으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현장을 지키라 강요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미래건설과 백호 PMC 간의 계약이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날 사이가 아니었기에 서로의 입장을 생각한 것이었다.
시베리아 주둔군 사령관인 알렉세이 이그나초프 사령관은 무슨 이유에선지 현재 이그노아 마피아들이 벌이는 일에 관하여 그 어떤 제제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힘입은 이그노아 마피아들이 시베리아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주변 상황은 무척이나 살벌하였다.
일반 기업들은 물론이고, 시베리아 지역 마피아들까지도 구역을 벗어나 이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상황을 살펴 형편이 어려워지면 말씀대로 몸을 피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김정민 팀장은 박명수 미래건설 전무와의 협의가 끝나자 바로 백호 PMC 사무실로 돌아와 변경된 사항을 용병들에게 전달하였다.
한편으로는 현장에 백호 PMC의 용병들만 남게 되었기에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경계를 할 수가 있었다.
미래건설 직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수동적으로 경계를 하던 것에서 이제는 자신들의 안위만 살피면 되는 것이었다.
이제 족쇄에서 풀려난 용병들은 눈을 빛내며 그동안 자신들을 힘들게 한 누군가를 향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껏 이렇게 좁은 지역에 웅크린 채 오랫동안 참고 있던 것은 용병인 이들에게는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승균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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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건설와 기술자와 인부들이 모두 떠난 현장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수용소를 연상시킬 정도의 건설 현장.
러시아 시베리아 주둔군의 비밀 기지가 될 예정이라 주변을 둘러싼 벽은 무척이나 높고 단단하였다.
파워 슈트가 보급되면서 철책만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부대시설은 방어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파워 슈트를 착용한 특수부대들에게 철책쯤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의 방어 시설들은 고대의 성벽을 능가할 정도로 단단하고 높게 지어지게 되었다.
그런 건축 기술은 군 시설뿐 아니라 여러 곳에 적용이 되었다.
그리고 주로 쓰이는 곳 중 한 곳이 부호들의 해저 저택이었다.
20세기 무렵,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나오던 바다 속 건물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대변혁 이후 첨단 과학을 통해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특수 소재를 이용하여 수면 위로 스노클을 노출하지 않고도 실내 공기를 정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부호들에게는 오염된 지상보다 더욱 인기가 많았다.
거기에 수중 저택이 부호들에게 각광받는 것은 그 이유뿐만이 아니었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침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내부에서 승인을 하지 않으면 절대 저택 안으로 출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군에서도 비밀 기지를 건설할 때 수중 저택에 적용되는 특수 공법을 사용해 보안과 방어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미래건설이 러시아 정부와 계약을 맺어 건설 중인 이곳도 그런 특수 공법을 이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추운 날씨를 막는 것은 물론, 파워 슈트를 장착한 타국 특수부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특수 공법으로 짓는 중이라 무척이나 튼튼한 것이었다.
그리고 담장 위에는 20곳이나 되는 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모든 부분에 대해 사각이 없었다.
미래건설은 고대 조상들이 건설했던 산성을 연구하여 보다 진보된 형태의 기지를 설계하는 중이었다.
그러하였기에 지금 백호 PMC의 용병들만 남아 있는 기지 건설 현장의 보안은 빈틈이 없었다.
용병들은 감시카메라에 의존하지 않고 초소만으로도 교차 감시를 통해 철통 경계를 할 수 있었다.

지금 승균이 근무를 서고 있는 4호 초소였다.
마침 바이칼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쪽에 설치되어 있어 승균은 경계를 서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귀여운 휴봇 노아의 재롱은 승균뿐 아니라 함께 근무를 서고 있는 이들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승균 형님, 배도 출출한데 노아에게 뭐 좀 가져다 달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함께 근무를 서고 있던 동철의 말에 승균도 마음이 동하였다.
마침 그 역시 시장기를 느낀 참이었던 것이다.
“그래, 노아야. 부식 창고에 가서 즉석라면 좀 가져와라.”
하여 승균은 노아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인공 지능이 갖춰져 있는 노아는 이미 수차례 그와 같은 일을 했는지 빠르게 초소 밖으로 빠져나갔다.
노아가 초소 밖으로 사라지자 초소장인 동철은 곧바로 부식 창고를 책임지고 있는 자신의 동기에게 무전으로 주문을 전달하였다.
“야, 밥통. 노아를 보냈으니 즉석라면 4인분하고 공기밥 4인분, 그리고 소주 1병 보내.”
동철은 승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백호 PMC의 직원으로 들어온 지 벌써 3년차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이르쿠츠크 현장에서 그보다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는 이는 순번이 빠른 1, 2, 3번 초소장들과 현장 책임자인 김정민 팀장이 유일하였다.
신참을 경험이 많은 이와 짝지어 보다 빠르게 제 몫을 하는 용병으로 만들기 위한 백호 PMC의 메뉴얼에 따라 승균도 이렇게 동철과 함께 근무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동철의 영향력(?) 덕분에 근무 중에도 이렇게 야식과 약간의 반주도 할 수가 있었다.
워낙에 추운 시베리아 지역인데다 러시아 특유의 문화 탓에 근무 중 약간의 반주 반입을 허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지위가 없으면 술을 초소에 반입하는 이들이 없었다.
요즘 주변 상황이 날로 혼란스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긴장 상태를 늦추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력이 오래된 용병들은 과도한 긴장감이 오히려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적당히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는 했다.
그렇게 4초소의 용병들이 즉석라면과 공기밥, 그리고 술로 적당히 요기를 채우고 있을 때였다.
삐비빅! 삐비빅!
잠시 쉬고 있는 용병들을 대신하여 경계를 하고 있던 노아가 무언가 반응을 보였다.
노아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다가와 밖의 상황을 알리자 승균은 초소에 설치된 적외선 망원경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바이칼 호수 위로 일단의 보트들이 기지 건설 현장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검정색으로 칠해진 보트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일반 관광객들의 배가 아니라 군에서나 사용할 법한, 선수에 기관총이 설치된 보트였다.
그리고 잠시 후, 5척의 검정색 보트에서 마찬가지로 검은색 복장을 한 이들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모습은 망원경으로 살피고 있는 승균의 눈에 정확히 들어왔는데, 지금 승균이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구형 파워 슈트를 착용한 자들이었다.
파워 슈트를 입은 일단의 인물들이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이곳 현장에 다가오는 것이었다.
승균의 판단으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듯했다.
“초소장, 지금 일단의 무장 병력이 접근하고 있어.”
승균의 말에 동철은 빠르게 통제실에 보고를 하였다.
러시아 군의 기지가 건설되는 현장에 무장 병력이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파워 슈트라는 특수한 무장까지 한 상태였다.
그랬기에 동철은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상이 걸린 각 초소와 현장으로 접근하는 의문의 병력은 한껏 긴장한 상태에서 잠시 대치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대치 상황은 금세 무너지고 말았다.
그 순간, 의문의 병력들이 보트에서 커다란 물건을 꺼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