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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전 1 -
귀검(鬼劍)



검성전 1권(1화)
<序>


중원.
이 땅의 무인이라면 한 번쯤, 백귀일성(百鬼一聖)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지 않을까?
한 가지에 미쳐 버린 귀신(鬼)들 사이에서 진정한 성자(聖)를 찾기 위해서, 약 이백여 년 전부터 무림에서 계속해서 비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심지어는 황제(皇帝)마저도 그 결론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지원해 주었다.
그 결과가 바로 검성전(劍聖戰).
황제조차도 공인하는 무성(武聖)을 가리기 위한 대회.
이십 년마다 수도에서 한 번씩 열리는 검성전의 제일회 참석자는 고작 십여 명에 불과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새 검성전은 무림최강(武林最强)을 가리는 거대한 제전으로 변모해 있었다.
검성전을 제패하는 자가 바로 무종(武宗)이다!
명예와 힘, 계략과 금전, 배신과 어둠을 안고 이백여 년간 검성전의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져 갔다.
이것은, 우연히 검성전(劍聖戰)에 평생을 얽혀 버린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1. 태오(太烏)(1)


내 이름은 태오(太烏).
어머니가 나를 낳을 때 큰 까마귀가 지나가는 걸 보고, 촌장님이 추천해 주신 이름이라고 한다.
정말로 쓸데없이, 내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할 만한 얘기 중 하나다.
나, 태오는 어렸을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다. 문필(文筆)이 출세의 수단인 세상에서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평민에다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도 힘든 집의 첫째 아들이 책을 좋아하다니, 주제넘다고들 했다. 일년 내내 일해서 얻은 농작물을 환전해도 책 열 권을 살 돈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난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글 읽기를 즐겼다. 부모님은 평민인 내가 출세해서 관리가 되려는 야망이 있는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말은 안 했지만 은근히 내가 책 보는 걸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책을 보기 좋아하는 이유는 일곱 살 무렵에 우연히 한 문사(文士) 형이 내게 글을 가르쳐 주며 권했던 책 때문이다.
출세에 도움이 되는 정서(政書)도 재서(財書)도 아니다. 기초 글자를 다 뗀 후에 더듬거리며 읽기 시작했던 책은 바로 무협(武俠)이다.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나는 그냥 무협소설 읽는 게 좋다.
문사는 스무 살배기 동네 형 같은 사람이다. 그는 몇 번이고 수도에 가서 시험을 쳤고, 작년 즈음에 성(城)의 하급 관리로 발령이 났다.
마을이 다섯 개 이상 합쳐져서 큰 고을로 불리고, 고을이 다시 모여서 령(領)이 되고, 령이 또다시 모여서 성이 된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했다.
사람이 수천, 수만 명씩 바글거리는 세상에서 어르신으로 대접받는 건 틀림없이 즐겁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사 형님은 이따금 말하기를, 자신은 사실 무예(武藝)를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무림(武林)이라고 불리는 세계의 의협(義俠)이 되어서 활약하고픈 꿈이 있었다.
뭐가 문제일까.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지 않느냐.
나는 그러면 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나로서는 별로 생각도 하지 않았던 물음이었다.
그러자 문사 형님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할 수 있다면 했을 거야. 하지만 일 년 정도 무술을 수련하면서, 도저히 아니란 걸 깨닫고 말았지. 나는 근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 형이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는 건 처음 봤다.
문사 형은 대신에 무림의 협사들이 활약하는 무협이라는 글을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이 붕붕 날아다니고 무공을 수련하는 부분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주 읽곤 했다. 나는 내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거나 뛰는 건 싫었지만 인간이 그렇게 강해진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뭐,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현실감 없이 하루하루가 무협소설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보였다. 눈 뜨고 숨은 쉬지만 여기가 현실이 아닌 것만 같다.
문사 형의 말로는, 무협소설은 실제 무림에서 활약하는 고수들 중에서 은원관계가 크게 없는 유유자적한 자들이 취미로 적는다고 한다. 그래서 현실과 꽤 다르지만 일치하는 점도 많다고 한다. 실제로 성주나 고관대작들은 무협소설 읽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내가 가진 무협소설 중에서 제일 재밌게 본 것은 환룡(幻龍) 작가의 탈혼경(奪魂經)이라는 책이다. 사람들은 환룡이 실제로 무림의 고수라는 평을 내렸다고 한다. 무림에 대한 고증도 훌륭한 책이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현실은 무협소설과 달리 상당히 따분하다.
“하아. 뭔가 재밌는 일 안 생기려나…….”
문사 형이 마을에서 환송받으며 성으로 간 지도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나는 논에서 상한 벼를 골라내면서 땡볕에 땀을 훔치곤 했다. 날씨가 더워져서 벌써 공기에서 더운내가 났다. 목이 말라서 오늘은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는 요즘은 아주 무협소설을 쌓아 놓고 읽고 있다. 문사 형이 성으로 가면서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까막눈인 내 부모님은 그게 공부하는 책인 줄 알고 계신다.
지금도 <탈혼경>을 허수아비 어깨 위에 잠시 덮어 놓고 쉬는 중이다.
다그닥, 다그닥.
“어라?”
이질적인 소리.
논 사이의 조그마한 길로 말(馬) 한 마리가 걸어왔다. 거리가 멀어서 희미하게 보일 정도다. 위에는 누군가가 타고 있다.
‘아니 이건? 설마 소설의 도입부!’
나는 잡초를 뽑아내다가, 순간 이 장면이 무협소설에 나오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 경우에 말 위에는 사람이 타고 있는데, 그 사람은 악독한 마두(魔頭)던가 주인공(主人公)이곤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역할은 대화를 받아 주는 마을 사람 갑(甲)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휘파람을 불며 일부러 쓸데없는 생생한 벼를 뽑아냈다. 긴장하니까 손에 힘이 들어가서였다.
이윽고 삼 장 거리까지 말이 다가왔을 때, 나는 약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자애?!’
좋지 않다.
여자애라고 해도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녀석들 같진 않다. 나이는 나보다 너댓 살 많은 정도일까? 확실히 혼기의 처녀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흰색과 검은색이 교차되어 있는 특이한 비단 옷감을 입고 있어서 부잣집의 여식 같았다.
얼굴은 그럭저럭 예뻤지만, 아니, 많이 예뻤지만 내 실망감을 충족시켜 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틀림없이 무림영웅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야기가 전개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협소설 같은 삶은 안 되나.
내가 한숨을 쉴 때, 희고 고운 얼굴을 한 여자애가 잠시 나를 봤다. 나는 여기서 또다시 뭔가 시작된다고 직감했다.
‘말을 건다면? 아마도 길을 묻는 거겠지. 말을 안 건다면? 비천한 내 꼴을 보고 무시하는 거겠지. 자, 와라. 어느 쪽이든 내가 생각한 대로다! 이것도 무협소설에 나와 있었어!’
마을 사람 갑(甲)의 의지를 보여 주마!
나는 알 수 없는 승부욕에 불타 여자애를 살짝 노려보았다. 그러자 여자애는 흠칫하더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아차하면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상대방의 주의를 끌어 버린 모양이다. 조금 전과는 달리, 현실적인 이유에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일 상대방이 무가(武家)의 자식이라면 건방지다고 해서 날 베려고 할지도 모른다. 지체 높은 관리의 자식이라도 행동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내가 조마조마해하고 있을 때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지 않겠느냐?”
옥구슬 굴러가는 듯, 사성 고저가 확실한 목소리.
“네?”
잘못 들었다. 햇볕이 뜨겁고 꽤 거리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 걸음을 옮기자, 여자애는 갑자기 왼쪽 품에 차고 있던 진검(眞劍)을 꺼내어서 내게 겨누었다.
시퍼런 날이 내 코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우리 문파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이건 무슨 상황일까.
잘은 모르지만 무협소설로 치면 서장(序章)일 것이다.
나는 뭐가 뭔지는 잘 몰랐지만, 그 순간 내가 겪은 평생의 선택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걸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러죠.”
난 주인공은 아니겠지만, 어떤 이야기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을 사람 갑(甲)이니까.
현실감이 없는 이 이야기는 이윽고 내게 검성전(劍聖戰)이란 현실이 되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눈 앞의 여자애, 사호(沙湖)와 평생 동안 목숨을 걸고 겨루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