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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2화)
1. 태오(太烏)(2)


“근데 이름이 뭐요?”
길을 걷던 중 내 가벼운 질문에 여자애가 대답했다.
여자애의 왼 손에는 <탈혼경>이 들려 있었다. 내가 재밌게 읽는 책이라고 하니까 다짜고짜 뺏아가 버린 것이다.
“사호(沙湖).”
여자애의 이름은 사호(沙湖)다.
여자이름 치고는 특이했지만 나는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사호는 말을 꺼내자마자 내게 우리 집으로 향하라면서 칼을 들이밀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안 가면 찌를 거요?”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무서워져서 나는 입을 닫고 서둘러 집으로 걸어갔다. 왠지 한마디만 더 하면 찔려 죽을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호는 내 뒤에서 천천히 말을 타고 따라왔다.
과연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될까? 어쩐지 예상이 안 된다.
이런 경우, 환룡 작가라면 아마도 내게 절세기연을 주겠지!
곧 우리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창 일을 하다가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부모님은 내 뒤에서 칼을 들이밀고 있는 사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사호는 태연하고 뻔뻔하게 말했다.
“이 아이에게 검재(劍才)가 보여, 우리 유극문(有極門)에서 제자로 거둬 가고 싶소. 허락해 주시길 바라오.”
“네?”
아버지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나도 뜬금없이 뭔 소린지 몰랐다.
‘무슨 개소리야?’
뜬금없이 논일하던 꼬맹이를 데려다가 무림문파의 제자로 받겠다니, 개가 웃을 소리다.
보통 무림문파들은 제자들을 선별해서 받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혹시 나도 모르는 재능 같은 게 있었나 생각해 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이게 만일 소설이라면 삼류소설일 것이다. 다만 어머니는 뭔가 빠르게 감을 잡았는지 물었다.
“먹고 자는 건 괜찮나요?”
“그렇소.”
“태오를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그만 소리쳤다.
“엥?!”
잠시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와 방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했다. 뜬금없이 인생이 바뀌는 일이 찾아와 버렸지만 생각보다 나오는 얘기가 없었다.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을 따라가는 건데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계심이 없었다. 되레 어머니는 잘하라면서 몇 번이고 내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곧 사호와 부모님이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사호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가자.”
“…….”
급전개.
이건 소설이라면 최악일지도 몰라. 다짜고짜 개연성도 없이 등장인물이 이동하다니.
나는 할 말이 없어져서 그냥 옆에서 걸었다.
그렇게 반 식경 정도를 땡볕에서 걷고 있는 동안, 나는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히 무더운 땡볕 아래인데도, 사호라는 계집애는 하얀 피부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냉기마저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 위의 사호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네 이름이 태오구나.”
“그렇소.”
“이 책 재밌네?”
사호는 탈혼경을 어느새 반절이나 읽고 있었다. 나는 한 줄 읽을 때마다 끙끙거리며 읽는데 꽤 글을 잘 아는 듯싶었다. 하긴 입은 옷을 보면 배운 집의 여식이란 건 금세 알 수 있다.
“재밌는 무협소설이오.”
“내가 왜 너를 유극문에 끌어들였는지 궁금하겠지.”
……이 녀석 여자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말투는 날카롭고 호전적이다. 듣는 동안 계속 위가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나는 솔직히 궁금했고,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호가 말했다.
“네 생각이 재밌었으니까.”
“……?”
무슨 말인 걸까. 설마 이것도 뭔가의 복선(複線)인가?
“그냥 내 변덕이야. 신경 쓰지 마.”
맑은 목소리로 마무리해 봤자, 당연히 신경 쓰인다.
솔직히 뭔 개소린가 싶지만 물어봤다가는 저 칼로 등을 찌를 것 같아서 무서웠다. 늘 무협을 동경하고 있었지만 진검이란 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거대한 압박감과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사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태오. 이 칼이 무서워?”
“그럼 칼이 안 무서운 사람도 있소?”
“그거 안 됐네. 칼날을 똑바로 보는 훈련도 해야 할 텐데.”
“…….”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사호의 말에 전신에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 것이다. 나는 감이 뛰어나다고 해서 눈치귀신이란 별명도 있다. 그런 내 직감이, 사호가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곧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얼떨결에 부모님과 이별 인사까지 해 버렸으니 지금 되돌아갔다가는 나 스스로 쪽팔린다.
일단 적어도 유극문이라는 곳에서 한 달이라도 해 보고 문파를 탈퇴하기로 마음먹었다. 사호가 왠지 싫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나도 입문하면 내공(內功)이란 걸 배울 수 있소?”
“내공?”
내 질문에 사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흑백이 새겨진 비단옷이 바람에 펄럭였다.
“설마 너는 무병장수(無病長壽)하려고 우리 유극문에 들어온다는 거니?”
무병장수도 좋을 것이다. 편하게 먹고 살면서 좋아하는 소설책을 맘껏 읽을 수 있다면 말이다.
무협소설에서 읽은 바로는 내공을 익히면 건강해진다니 그럭저럭 맞는 소리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말이오? 칼을 들이대고 들어오겠냐고 묻는데 어떤 사람이 거절할 수 있다는 건지.”
그러자 사호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음음, 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뭐라고 한마디 톡 쏘아 주고 싶었지만 애써서 참았다. 역시 칼이 너무 무서웠다.
사호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내공은 가르쳐 줄 거야. 대신 열심히 안 하면 오래 살기 힘들걸.”
“그것 참 감사하군.”
나는 툴툴대며 걸었다. 저딴 계집애 꼴도 보기 싫다.
내가 약간 앞서서 걷자 사호가 뒤에서 얄밉게 웃었다.
“아하하! 더 궁금한 건 없어? 하나 정도면 진지하게 대답해 줄게.”
“그 말 지키쇼.”
나는 홱 뒤를 돌아보면서 참았던 말을 꺼냈다.
“나한테 정말 검재란 거 있소?”
검재.
나도 웬만한 문사 수준으로 글을 읽을 줄 안다. 해석해 보면 검의 재능이란 말이다. 아마도 무협소설에서 읽었던 바에 의하면, 고수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능력인 듯하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사호가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사호는 잘 몰라.”
“모…… 모른다고?”
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사호는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사호는 몰라! 너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니? 한눈에 딱 보고 재능을 눈치챈다니 어떤 미친놈이 그래? 유극문의 문주님도 그렇게 못해.”
“…….”
“직접 칼 들고 수련하는 걸 봐야 감이 잡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