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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3화)
1. 태오(太烏)(3)
나는 우울해졌다. 내가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사실이지만 졸지에 왠 계집애한테 붙잡혀서 집까지 나왔는데, 재능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니. 은근히 품었던 기대감이 살짝 무너지는 걸 느꼈다. 사호가 말을 덧붙였다.
“태오. 너무 실망하지 마. 무림(武林)의 격언을 가르쳐 줄게.”
“뭐요?”
“천인일재(千人一才) 만인일귀(萬人一鬼) 백귀일성(百鬼一聖).”
졸지에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후에 내 인생을 결정지을 중요한 말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일천 명이 있으면 그중에 한 사람은 하늘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다는 소리야. 물론 그 재능이란 건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충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재(才)는 천재(天才)를 뜻하는 것이다. 무협소설에도 종종 등장하는 존재였고, 주인공들은 주로 천재였다. 나는 흥미가 생겨서 질문했다.
“그럼 일만 명 중에 한 명은 귀신(鬼)이란 말이오?”
“응.”
일만 명이라는 숫자는 엄청, 엄청나게 많다. 문사 형과 무협소설을 읽던 중에 이야기를 했는데, 성에는 몇 명이 살까에 대한지였다. 그러자 문사 형이 말하기를 십만 명이 약간 넘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가 태어나서 봤던 사람이라고 해 봐야 이백 명이 안 넘기 때문이다.
“귀신이 뭔데요? 뒷간 귀신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수련하고 또 수련하다 보면 미쳐 버리지. 그다음부터는 생의 모든 즐거움이 무(武)에만 쏠리게 되고, 저절로 기(技)는 초인적으로 변해. 뭐 너는 말해도 모르겠지만…….”
“알게 뭡니까.”
나는 짜증이 났지만 일단 참으면서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그리고 백 명의 귀신 중에서 한 명의 성자(聖)가 있다는 겁니까?”
“글쎄……?”
철컹!
사호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뭔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처음으로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너무 오랫동안 들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지막은 나도 잘 모르겠어. 전설 같은 거라서.”
“뭔 소리야. 그러면 성(聖)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없다는 거요?”
“그걸 모른단 소리야.”
사호는 말고삐를 세게 잡았다.
“귀신조차 성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하니까.”
나와 사호가 유극문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사호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누나라는 느낌이었으므로, 먹을 건 대개 사호가 육포를 나눠 주거나 음식을 사 주었다.
쏴아아!
오후의 해가 비치고 나뭇잎이 흩날렸다. 나는 오 장 밖에 있는 유극문의 현판을 바라보면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게 아닌데?’
너무 전개가 빠르다! 주인공다운 영웅호걸의 기상이 보이지 않는다.
환룡 작가님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역시 아무런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시 현실 따위 무협소설대로만 되지는 않는 듯했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대로라면 분명히 나와 사호 사이에 애틋한 연인의 감정 같은 게 싹터야 한다. 그런데 사흘 동안 정처 없이 관도를 걸어오면서, 나는 그냥 힘들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발이 아팠을 뿐이다.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서로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아서 어영부영 사흘이 지난 것이다.
그제야 나는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굉장한 행동력과 운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냥 운명적으로 떠 먹여 주는 수준! 난 아직 남녀의 관계 같은 건 잘 모르지만 현실과 소설은 꽤 다르다는 걸 절실히 느껴야만 했다.
내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호가 웃겨 죽겠다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막 말을 말뚝에 매고 내리는 중이었다.
“왜 그래 태오? 많이 아쉬운 표정인데?”
“뭔 소린지 원.”
나는 애써 뻘쭘한 표정을 숨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흑심이 없다고는 말 못한다.
“자, 이제부터 네가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지 설명해 줄게. 네가 체력이 약해서 제대로 설명해 줄 여유도 없었으니까.”
사호는 검지로 유극문의 건물을 가리켰다. 삼 층 전각이 두 개 정도 있었고, 일 층짜리 건물이 곳곳에 있었다. 부지는 반경 삼십여 장 정도로 보였다.
솔직히 일개 무림문파가 이 정도 크기일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문사 형이 말하길, 무협소설에서 나오는 문파의 크기는 꽤 과장되어서 실제로는 건물 한 채가 전부인 문파도 적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크네요.”
“응? 우리 문파는 이 환령(還嶺) 일대에서 제일 큰 문파니까.”
“엄청 잘살겠다.”
나는 숨기지 못하고 부러움을 드러냈다. 그냥 평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로서는 이런 건물에서 사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사호는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기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태오. 넌 이제 유극문의 평제자가 되기 위해서 일 년 동안 견습제자로써 기초 심법과 검술을 수련할 거야. 그리고 시험을 쳐서 자질이 있다고 판단되면 평제자가 되고, 아니면 집에 간다. 평제자로 쭉 지내다가 만일 실력이 괜찮으면 더 좋은 무공을 전수받겠지.”
사호는 말의 갈기를 잠시 쓰다듬었다.
“결국 너 하기 나름인 거야. 환상이 큰지 현실이 대단한지.”
왠지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이라서 민망했다. 사호의 눈을 들여다 볼 때면 언제나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러고 보니 사호 당신은 유극문에서 뭘 하고 지내는데요?”
지금까지 제일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호 말대로 사흘 동안 거의 쉬지도 않고 걷기만 했던 여정이 매우 힘들어서 말 꺼낼 기회가 없었다. 난 사흘 동안 사호가 땀방울 하나 흘리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실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느 정돈지 잘 모르겠다.
“내가 문주.”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는 사호는 대충 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 우렁찬 인사 소리가 떠나갈 듯이 울렸다. 얼추 스무 명은 될 법한 장정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문주님, 오셨습니까!!!!”
무협소설에서 봤던 내공이 실린 외침이란 게 이런 걸까.
아니 그것보다 문주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나는 흩날리는 나무 잎사귀 사이에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꿈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건 현관 안쪽에서 사호가 빼꼼 고개를 내밀면서 내게 외쳤기 때문이다.
“안 오냐? 빨리 와 시간 없으니까!”
나는 말을 삼키면서 재빨리 뛰어갔다.
사건이 전개된다. 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무슨 일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정신이 없어지는 걸 보면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나는 호랑이 굴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이다.
허둥지둥 따라 들어간 실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열해 있었다. 대부분이 사내였고 간간이 여자도 보였다. 나이는 청장년층이 대부분이었고 늙은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낯선 환경 때문에 긴장해 있는데다가 나처럼 어린 사람이 없으니 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야, 따라와.”
사람들의 시선을 헤치고 재차 사호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 복도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내 또래가 없는 거지?
그러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앞서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던 사호가 말했다.
“참고로 우리 문파에서 너랑 나이가 비슷한 건 아마 나 뿐일걸. 대부분 수련한지 최소 오 년은 된 사람들이야. 어린 기재(奇才)들은 아무도 유극문에 안 들어오려고 해서 말야.”
“네?”
나도 모르게 사호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 나의 비굴한 본성은 상대방이 문주라는 걸 인식한 순간부터 알아서 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슬픔을 느낄 틈도 없이, 사호는 사람이 없는 복도로 접어들자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다른 문파에 간다는 소리야.”
“여기서 수련하면 머지않아 죽기라도 합니까?”
목숨이라고 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농담하듯이 한 말이었지만, 사호는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네. 다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니까.”
“…….”
이거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만일에 사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로 호랑이굴에 한 발짝 들여놓은 셈이다. 내가 조심스럽게 사호의 뒤를 따라서 걸어가다 보니 사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호화롭게 꾸며진 방 한가운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절제된 방 가운데에 누군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