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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4화)
1. 태오(太烏)(4)


귀빈을 대접하는 곳인지 비취로 된 장식이 놓여 있었고 명공(名工)의 솜씨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가재들이 있었다. 의자에는 왠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전신이 울긋불긋한 근육으로 터질 것처럼 보였다. 왼쪽 뺨에 길게 째진 상처가 있는 사나운 인상의 청년이 사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아, 유극문주 사호! 오랜만이오.”
“반갑네요. 천휘문(天輝門)의 소문주님.”
사호는 짐짓 밝게 말했지만 어쩐지 말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소문주라고 불린 청년은 껄껄 웃더니 찻잔을 들었다.
“편하게 장 가가라고 부르시오. 곧 같은 방을 쓸 사이가 아닌가?”
스윽.
사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사호의 가녀린 손이 앞으로 향했다. 잠깐 동안 사호의 손에서 시퍼런 기운이 새어 나오는 듯하더니, 벼락처럼 튕겨 나갔다.
청년은 눈썹을 꿈틀대더니 차고 있던 만곡형의 도(刀)를 빗겨 세웠다.
청년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짓더니, 지금까지와 달리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무공이 좀 늘어난 모양이군. 하지만 그런 태도가 우리 대화에 좋을 건 없을 텐데.”
“장현익(長顯溺). 무례한 언사도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해요.”
장현익은 어깨를 으쓱했다. 명백히 꿀릴 게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사과한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나빠지게 하는 태도였다.
“이런!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소. 그보다 와서 얘기 좀 하지?”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거죠?”
사호는 어느새 한쪽 손을 허리춤의 검으로 가져간 상태였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는데, 장현익은 사호의 기세 때문인지 자신도 도병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나는 신기한 구경거리 때문에 약간 들떠 있었다.
‘저게 무협소설에서 보던 무형지기(無形之氣)라는 걸까?’
그래 바로 이거야! 이래야 무협이지!
지금 전개되는 두 사람의 기싸움이, 책에서만 묘사되었던 고수들의 대결인 걸 알자 흥미가 생겼다. 내가 직접 저런 싸움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재밌게 읽었던 게 실제로 현실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작업이 재밌는 것이다.
장현익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의 실력이 사호에 비해 밀리는 듯했다.
“사호 그대도 알다시피 명분은 우리 쪽에 있지. 전력(戰力)도 명백히 우리가 우세해. 쓸데없이 서로 피를 흘리느니, 기분 좋게 싸움을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겠소?”
사호는 조용히 장현익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얌전히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혀 아니었다. 사호 옆에 있던 나는 그녀의 눈에서 사나운 맹수 같은 거친 기운이 끓어오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명분이라…… 정말 괜찮은 명분이 뭔지 가르쳐 드릴까요?”
피잉!
“크악!”
다음 순간, 얇은 파공음과 함께 장현익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땅바닥을 두 바퀴 구르다가 재빨리 일어섰는데, 잘 보니 그의 양쪽 어깨에 하나씩 두 개의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공격받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딱히 놀라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협소설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런 상황이면 사호가 장현익보다 한 수나 두 수쯤 위인 거겠지. 이 정도에 놀라면 무협소설 애호가의 이름이 운다.
“이 자리에서 당신 목을 쳐서 천휘문주에게 돌려보낸다. 피로 피를 씻는 전쟁 개시 신호로는 제격이죠.”
“미, 미쳤군! 진짜 싸울 셈인가!”
장현익은 수치과 굴욕 때문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외쳤다. 어째 전형적인 삼류 악당처럼 보였다. 이것도 딱 무협소설처럼 보였다.
“우리 뒤에는 호북 최강의 귀검(鬼劍)이 있다! 현실 파악이 안 되나? 약하면 주제를 알라고!”
“어머, 그런가요?”
사호는 생글생글 웃더니 뒷짐을 졌다. 그녀는 시라도 읊을 양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귀검은 확실히 강해요. 호북 일대에서 검 하나로 따지면 무당 장로도 목숨을 걸어야겠죠. 아버님께서 아직 살아 계셨어도 두려운 상대인 건 틀림없어요.”
“그, 그래. 이제야 말귀를…….”
“하지만 그건…….”
피잉!
다시 한 번 파공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장현익의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허벅지에 기다란 상처가 났다. 너무 검이 빨라서 그는 방어할 엄두도 못내는 듯했다.
“끄아아악!”
“귀검이 강한 거지, 니새끼들이 강한 건 아니잖아요? 병신 같은 자식!”
사호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띈 채 말을 이었다.
“게다가 알아서 지옥에 기어들어 오다니 확실히 머리도 없는 놈이군요.”
그제야 장현익은 사호가 진심으로 그를 쳐 죽이거나 인질로 쓸 생각이란 걸 깨달은 듯, 자신의 호위를 불렀다.
“제길! 천휘십검(天輝十劍)!”
내공이 돋우어진 목소리라서 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마 건물 밖까지 울렸을 것이다.
‘시작하는 건가?’
나는 이제야 제대로 된 무림인들의 집단 전투가 개시되는가라고 생각하니 약간 흥분되었다. 나 자신의 생사는 둘째치고, 책에서만 보던 게 실제로 이뤄진다는 게 기대된다.
“……천휘십검!”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천휘십검이란 자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장현익은 다시 한 번 외쳤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사호의 공격 속도라면 지금까지 그를 서너 번은 죽이고 남았을 것이다.
장현익이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자 사호의 웃음이 짙어졌다.
“생각은 있었겠죠. 천휘십검으로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고 적당히 협박하면 내가 굴복해서, 강간이나 다름없는 혼례를 할 거라 생각한 거죠?”
섬뜩해졌는지 장현익이 죽어라고 비명을 질렀다.
“왜, 왜 안 오는 거냐…… 천휘십검! 천휘십거엄!!!”
“소용없죠.”
사호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아버님이 살아계셨을 때가 그립네요. 이런 병신들까지 도전해 오다니…….”
“무, 무슨 소리냐 계집!!”
“천휘십검 따위로 유극문의 심장부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중원 최강을 가리는 검성전(劍聖戰)에 출전해서 살아남은 실력자들을 너무 얕본 거 아닌가요?”
휘익!
그때 네 명의 인영(人影)이 소리 소문 없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말 그대로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만은 무협소설이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내가 살짝 감동하고 있을 때, 제일 왼쪽에 있던 죽립의 사내가 다소곳이 사람의 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