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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5화)
1. 태오(太烏)(5)
목의 주인을 확인하는 순간 장현익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죽립사내는 부복한 채 사호에게 보고했다.
“문주님. 천휘십검 전원 참살했습니다.”
“잘했어, 제갈휴(諸葛烋). 부상자나 사망자는?”
“모욕적이군요.”
“뭐가?”
사호의 반문에, 제갈휴라 불린 사십대 중년 사내는 진심으로 기분 나쁜지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쭉정이들 따위에게 사망자가 나올 리 없잖습니까. 무시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냐. 문주는 늘 아랫사람을 관용과 배려로 살펴야 하지.”
“예의상이라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가볍게 넘겨 버린 사호가 장현익을 쳐다보았다. 장현익은 싸우다가 죽을 결심을 굳혔는지 자신의 도를 뽑아서 확실히 전투 자세를 잡고 있었다. 부상은 심했지만 확실히 무공을 익혔다면 단숨에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르릉!
사호가 처음으로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녀의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주제도 모르는 병신님. 곧 당신 아버님도 황천으로 보내 드리죠. 감격의 부자 상봉 어떤가요?”
“큭!! 웃기지 마라! 내가 그리 쉽게 당…….”
슈칵, 하고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호의 신형이 섬섬옥수와 함께 흔들리더니 장현익의 목을 베어 버렸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라서 나는 눈 깜박해 보니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이게 유극검(有極劍) 오절(五絶). 과분한 줄 아시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유극검의 오절을 익히게 되면 구파일방 중 점창파의 쾌검(快劍)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떨어지는 장현익의 목을 손으로 잡아챈 사호가 갑자기 내팽개쳤다. 진심으로 혐오감이 느껴졌다.
퍽!
“더럽군. 이 목을 소금에 절여서 천휘문주에게 보내. 천휘십검의 시체는 개밥으로 주고.”
“네. 문주님.”
제갈휴를 비롯한 네 사람은 곧 장현익의 시체를 수습해서 사라졌다. 나는 일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치 경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구도가 잘 짜여 있어서, 보면서 재미밖에 못 느낀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현익이 좀 더 버텨 주기를 바랐는데 아쉬웠다.
난 언제나 관전자로 남아 있고 싶다.
갑자기 시선을 느껴서 옆을 돌아 보았다. 사호는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제대로 골라온 거 같은데? 재밌네.”
“뭐가 재밌어요?”
“아하하! 그냥 다 재밌네∼”
갑자기 깔깔 웃던 사호가 말했다.
“이 자리에서 입문식(入門式)을 하자. 곧 천휘문하고 한판 붙겠지만 입문식 정도는 해야 무공을 가르쳐 줄 명분이 서잖아?”
“한판 붙는다뇨?”
나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반문했다. 나쁜 예감이 든다.
“저도 나가서 싸우나요?”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다. 그러자 사호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싸우는데 너만 빠지게? 무슨 얌체 같은 발상이니?”
“아니 그게 아니라…….”
“싸우다가 죽어도 좋으니까 열심히 해 봐.”
“…….”
이런 뜻이었나? 이래서 죽을까 봐 어린애들이 안 온다는 뜻이었던 건가!
내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에 사호는 밖에서 장로(長老)라는 사람들을 불러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내게 엄포를 놓았다.
“맞다. 입문식한 다음에는 나한테 절대 반말하면 안 돼.”
“한 적 없습니다만…….”
칼을 들이미는 인간한테 어떻게 나같이 소심한 사람이 반말을 할 수 있을까. 사호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넌 간이 배 밖에 나왔으니까 충고해 둔 거야.”
“나원 참.”
“새겨들어.”
이어지는 말에 나는 그냥 쓴웃음을 지었다.
“붕 뜬 것처럼 기분 좋은 것도 한때야. 지켜보고만 있다가는 호된 꼴을 당하겠지.”
어쩐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2. 유극문(有極門)(1)
유극문도가 입문식을 할 때는 유극문의 장로 두 명 이상이 참관하고, 문주가 마무리를 한다. 입문식이라고 해도 별다른 건 없었다. 평제자가 아니라 견습일 때는 특정한 스승이 정해지지 않으므로 구배지례는 조사의 위패에 행하고, 장로에게 세 번 절한다. 그리고 문주가 힘 내라는 말 한마디를 하면 끝인 것이다.
전통 있는 명문답지 않게 매우 간단한 과정이다.
장로로 온 사람은 세 명이었다. 한 사람은 아예 방립으로 얼굴을 통째로 가린 채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키가 멀대처럼 큰 사람, 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리따운 여인이 있었다. 이남일녀(二男一女)로 이뤄진 장로들은 딱히 나를 주목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방립으로 얼굴, 아니, 상반신의 반을 가린 자가 말했다.
“장로(長老) 태월하(泰月河)다.”
키가 멀대처럼 크고 얼굴이 대추처럼 붉은 사람이 말했다.
“장로(長老) 성구몽(成求夢)이다.”
초중년의 아리따운 미부(美婦)가 살포시 웃었다.
“장로(長老) 채은(蔡恩)이에요.”
다들 개성 있는 외모라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장로라고 하는데 다들 오십 대를 넘는 노인은 없어 보였다.
‘무공을 익히면 정말로 잘 안 늙나 보네.’
나는 위패에 구배지례를 한 후, 그들에게 각자 세 번씩 절을 한 후, 문파원의 증표로 동패(銅牌)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문주인 사호가 나와서 나를 쳐다보았다.
“유극문에 입문한 걸 축하해.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
“태오. 장로 세 분 중 하나를 직계 스승으로 정해라.”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나보다 장로들의 반응이 더욱 격했다. 태월하는 방립을 조금 들어서 유극문주 사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구몽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채은이라는 미부는 “어머!”하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었다.
곧 거대한 방립을 눌러쓴 태월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주. 그런 특혜(特惠)를 베풀 이유가 있소? 그리 똘똘한 놈으로 보이진 않는데.”
“뭐가 특혜죠? 근 팔 년 내 입문한 유극문도 중에서 견습 과정을 통과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걸로 아는데요.”
“이런이런…….”
사호의 말인즉, 어차피 일 년의 견습 기간은 유명무실하니 바로 장로의 가르침을 받게 하자는 뜻이다. 사호의 반박에 태월하가 입을 닫자, 성구몽이 그를 대신해서 말했다.
“아랫놈들의 시선 따위가 두려운 게 아니오, 문주. 우리는 우리의 절학(絶學)을 별 볼일 없는 놈에게 전수하고 싶지 않소. 전대 문주께 반해서 유극문에 뼈를 묻기로 했으나,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이오.”
“……그랬죠.”
사호가 조용히 말했다.
“세 분께서는 원래 강호를 주름잡던 분들. 그래서 지니신 무공은 유극문의 것과 원래 다르시죠. 아버님께서도 의리로 거두셨으니, 딸인 제가 그 점을 왈가왈부할 순 없습니다.”
사호가 약간 고개를 떨구자 태월하가 미안한 듯 말했다.
“그대의 역량을 폄훼하는 게 아니오, 문주. 단지 우리에겐 이 태오라는 꼬맹이가 그만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지 확신할 근거가 필요하오.”
“그렇군요. 흐음 어쩐다…….”
사호는 고민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를 장로 밑의 제자로 붙여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기 맘대로 내 인생을 바꾼 데 대한 죄책감인 건가? 별로 고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