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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6화)
2. 유극문(有極門)(2)
그러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채은이라는 여자 장로가 살포시 웃으면서 부채를 꺼냈다. 그리고 나를 부채로 가리켰다.
“문주. 이건 어떤가요? 우리들 중 한 명이, 딱 일 년만 저 아이를 가르쳐 보는 거예요. 그래서 재능이 마음에 든다면 계속 가르치고 아니면 그냥 평제자 신분으로 살아가게 하는 거죠.”
“난 이견 없소.”
“나도 그 정도라면 양보 가능하오.”
태월하와 성구몽이 채은의 말에 찬성하고 나섰다. 그들은 왠지 사호의 말을 들어주고 싶어하지만, 당장은 장로로서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듯했다. 사호는 기쁘다는 듯이 볼에 보조개가 파이게 웃었다.
“네 감사해요! 그럼 태오.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흠, 저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왠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면서 미친 소리를 했다.
“셋 다 싫습니다!”
“…….”
장로 세 사람은 물론 사호까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당황스러운 분위기가 좌중을 휩쓸었다. 그들에게 번지는 감정은 분노보다는 황당함과 의문인 듯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태월하 장로였다.
“아이야.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이건 기회란다. 우리도 문주님이 아니면 천하의 그 누가 부탁해도 제자로 들이지 않아. 사실 나보다는 성구몽 장로님과 채은 장로님이 더 그렇지.”
“그치만 말이죠.”
태월하 장로가 자상하게 어르는 듯한 말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전 사호 문주님한테 아무것도 빚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건 진심이다.
무협소설이고 뭐고 때려치고, 진짜로 저 사호한테는 빚지기 싫다.
“뭐?”
“유극문에 따라온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빚이라고 하지만, 이후의 행동까지 빚지긴 싫습니다. 전 그냥 평제자로 살고 싶습니다만.”
미친 소리를 하는 까닭은 이미 반쯤 미쳤기 때문이다. 책에서만 보던 무협의 세계가 눈앞에 닥쳐오자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아무 말이나 주워 내뱉고 있는 상태였다. 훗날 이게 도움이 되는 선택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냥 감정에 겨워서 자기 말에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오, 빚이라…….”
내 말에 성구몽 장로가 흥미롭다는 듯 수염을 쓸었다. 채은 장로는 불안한 눈으로 성구몽 장로를 돌아보더니 부채를 쫙 펼쳐서 자신의 입을 가렸다.
“확실히 빚이긴 하겠구나. 하지만 아이야. 사호 문주의 성격상 지금 같은 부탁은 태어나서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란다. 아무리 천휘문과 항쟁을 앞두고 있어도 겨우 입문제자 하나 때문에 장로에 부탁을 한다는 건 굉장한 호의야. 원래는 경력 십 년 이상의 유극문 사범이 무공을 지도하거든.”
“무슨 차이가 있죠?”
내 반문에 채은 장로가 당황해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공격적인 어조였다.
“흠?”
“머지 않아 천휘문과 붙을 건데 수련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저 같은 꼬마가 짧은 기간에 무공을 배워 봤자 큰 차이 안 날 겁니다. 장로한테 배운다고 해도요. 그래서 기왕 하는 김에 빚을 안 지는 방향으로 선택한 겁니다.”
“크하…… 하하하하!!!”
갑자기 성구몽 장로가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붉은 얼굴을 내 앞으로 쭉 들이밀면서 마치 협박하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앞으로 한 달…… 아니, 두 달 동안 우리에게 아무리 배워도 안 배운 것만 못하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는 게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겁이 없으면 뭔 말을 해도 무섭지 않다.
“네.”
“크하…… 크하…… 그하하하하하핫!!!”
성구몽은 아직도 웃고 있었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성구몽과 달리 태월하와 채은은 그저 싸늘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그들 또한 내 말에 불쾌감을 느낀 기색이 역력했다. 성구몽도 지금 웃는 게 절반쯤은 분노와 어이없음이 섞여 있었다.
성구몽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분노가 깃들어 있다.
“태월하. 채은. 내가 이 꼬맹이한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데 어떤가?”
옆에 앉아 있던 태월하가 안광(眼光)을 푸르게 빛냈다.
“그렇겐 안 되죠 형님. 이놈에게 육의육신류(六意六神流)의 위대함을 보고 통곡하게 하고 싶은데요.”
“두 분 어른스럽지 못하네요. 다만 저도 약간 화는 나네요.”
왠지 모르게 태월하와 채은까지 열의를 불태우는 상황에, 사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답지 않게 질렸다는 기색이었다.
“태오 대단하네. 강호 누구도 세 치 혀로 장로분들을 경동시킬 순 없을 거야.”
“잠깐잠깐, 이야기가 이상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급히 손을 저었다. 세 사람의 은근한 살기가 내게 와닿자, 정신이 확 들었다. 조금 전까지 내 말에 취해서 멋진 척하고 있었는데 생사(生死)의 문제란 걸 깨달아 버린 거다.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겨우 두 달 동안에는 아무것도 안 변합니다.”
“허허. 참 부정적인 놈이군. 그건 네 생각이고.”
내 항변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강호에서 누구도 제정신이면 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절정고수들의 자존심을 도발해 버린 것이다. 성구몽 장로가 웃으면서 사호에게 말했다.
“문주. 내 부탁하겠네. 이 녀석, 나 좀 줘 봐.”
“불안한데요. 가르치는 척하면서 죽여 버리시는 거 아니에요?”
“아냐. 안 죽여.”
간절한 성구몽 장로의 말에 사호가 못 믿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럼 불구를 만드시겠죠.”
“음…… 고민은 되지만 불구도 안 만들 거야.”
“정말이죠? 폐인도 안 만드시는 거죠?”
“허허. 의심이 많군. 난 언제나 제자를 사랑으로 대한다네.”
“그럼 믿을게요.”
사호의 말이 떨어지자, 좌중의 네 사람은 이미 성구몽 장로가 내 스승이 되는 사실을 확정해 둔 듯한 분위기였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바뀌자 나는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나는 그냥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살짝 도발한 것뿐이었는데, 어쩐지 급작스레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저기…….”
내가 조심스럽게 성구몽 장로를 바라보자, 그는 손을 원형으로 세 번 저었다. 그리고 차주전자에 들어 있는 곡차를 손에 부어서 씻어 냈다.
“네게 받은 세 번의 절은 없던 걸로 했다. 새로 구배지례를 해라.”
“…….”
전혀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다. 내가 잔머리가 잘 돌아가긴 해도 어린 농부의 아들일 뿐이라서, 고수들이 뿜어내는 살기에 압도당해 버렸다. 나는 주섬거리며 조용히 아홉 번 절을 했다.
곧 입문식이 끝나면서 사호가 내 숙소와 기본 규율을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자리가 파(破)하는 데는 반 식경도 걸리지 않았다. 태월하 장로와 채은 장로는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죽이고 불구가 아니라도 사람은 쉽게 병신이 될 수 있단다.”
차라리 저주를 해라.
나는 티는 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태월하에 이어서 채은이 요염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쉽네. 내 제자가 되었으면 재밌게 놀았을 텐데.”
어떻게 논다는 걸까.
나중에 알게 된 거였지만 극음지공(極陰之功)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 얼음장 물에 몇 시간이고 잠수시킬 생각이었다고 한다. 물론 성구몽 장로 밑에서 겪은 고난도 그에 못지않았지만,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는 말이었다.
곧 장내에 사람들이 다 떠나자, 나와 성구몽 장로만이 남았다. 성구몽 장로는 의외로 바로 엄한 얼굴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창 밖의 조그마한 일 층짜리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오. 저기가 바로 내 숙소이며 네 수련장이 될 곳이다. 넌 오늘부터 내 제자로서 쉴 틈 없이 성실극악하게 심신을 단련하게 될 것이란다.”
“네? 극악(極惡)?”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반문했다. 그러자 성구몽 장로가 아차하면서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성실잔멸(誠實殘滅)하게.”
“…….”
대체 왜 바꾼 걸까. 바꾸든 말든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성구몽은 인자하게 다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너무 겁먹진 마라. 문주님의 명령도 있으니 설마 천휘문과 싸울 때까지 ‘내 제자’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겠느냐. 긴장 풀거라.”
“넵, 사부님!”
잘 보이기 위해서 일단 씩씩하게 대답해 뒀다. 곧 성구몽 장로가 문을 나가면서 희미하게 흘린 말에 나는 몸이 굳어졌다.
“물론 그 이후는 책임 못진다만…… 망할 꼬마야.”
나는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이상으로 고수들의 자존심은 무식하게 자존광대하기 때문에, 강호를 살아가면서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고, 피해야 하는, 똥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이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가만히 죽어 지내면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거라는 후회를 나중에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곧 지옥이 찾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