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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25화)
6. 수선(水仙)(4)


채은 장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표정은 살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는 태월하보다 제약을 민감하게 신경 쓰고 있었으므로 더했다. 잠시 두 사람을 쓸어 보던 채은 장로가 한마디를 남기고 장내를 떠났다.
“전 모르는 일이니, 후일 벌(罰)이 내려지더라도 두 분을 돕지 못해요.”
태월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성구몽 장로는 그저 하품을 할 뿐이었다. 이미 결심을 한 사내들에게 죽음의 두려움은 별다른 장애가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 말을 꺼낸 건 태월하 장로였다.
“태오는 수선(水仙)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놀라진 않네. 원래 그런 놈이니.”
“앞으로 보름 동안 최선을 다해 가르쳐야죠.”
“그럴 생각이네.”
성구몽 장로는 남은 시간 동안 광혈인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지도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보름의 시간 동안에 광혈인 또한 달인급의 경지로 터득할지도 몰랐다. 광혈인에 수선사계의 신법이 합쳐지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큭큭큭.”
“왜 웃나?”
잠시 혼자서 소리 죽여 웃던 태월하가 말했다.
“태오 생각을 하니, 왠지 그 괴물이 생각나서요…….”
아직도 잘 때마다 이따금 악몽 때문에 오금이 저린다면, 그 괴물 때문이다. 성구몽 장로는 태월하의 말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7. 전야(前夜)(1)


콰쾅!
내가 광혈인(光血印)을 온전히 익혔을 때는 사흘이 지나 있었다. 나는 몽롱한 상태로 계속 기계적으로 동작만 반복했다. 이미 요령을 잡은 상태라서 남은 건 몸에 붙여서 습관화시키는 것뿐이었고, 지금도 손을 휘두르며 여념 없이 나무기둥을 폭발시키고만 있었다.
손과 발끝의 경락으로 내공을 뿜어내어서, 물체의 기와 반응시켜서 폭발시킨다. 나는 어쩌면 이걸로 벌목도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만 벌써 나무를 서른 그루나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밑둥이 못생긴 모양이라서 안 될 것 같았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눈이군.”
성구몽 장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광혈인을 순조롭게 익히는 모양인지 그 외에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휴식 시간이 찾아오자 성구몽 장로가 말했다.
“광혈인의 위력은 네 내공(內功)과 기의 격발(擊發)과 관계가 있다. 이것만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오랜 수련이 필요한 일이라, 매일같이 성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네.”
“수법(手法)에는 익숙하게 섞을 수 있는 듯하군. 소영검법을 빠르게 전개하면서 광혈인을 섞어 봐라.”
나는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성구몽 장로의 요구는 나도 평소부터 해 보고 싶었던 일이고, 반복 연습에도 꽤 염증이 났기 때문이다. 문파에서 들고 올라온 철검을 들고 천천히 소영검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머릿속에 아득한 기시감(旣視感)이 닥쳐 왔다. 지금의 이 풍경을,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그림 바깥의 화가가 되어 있는 괴이한 감각이 전신에 닥쳐왔다. 내 모습을 밖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동안에는 몸의 감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게 된다.
위잉!
검끝이 떨린다. 나는 처음으로 우윳빛 검기를 뿜었을 때처럼 무작정 정신이 일체화가 되어서 검을 휘둘렀다. 손이 칼날이 되고, 머리는 손잡이가 된다. 오로지 칼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검귀(劍鬼)처럼 변해 버리고 만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탈혼경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뜻도 모르고 정신없이 읊조리는 동안에 다시 깨달음이 연속으로 찾아왔다. 손에 들린 철검이 마치 신들린 것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이잉!
기하학적인 도형과 함께 검기가 무수한 실선을 뿌렸다. 이윽고 검무(劍舞)가 끝났을 때는 성구몽 장로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반야의 경지는 종잡을 수가 없구나. 마치 진화(進化)하는 것 같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런 얘기다.”
휘익!
성구몽 장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를 향해 덮쳐 왔다. 얼마 전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나를 팼던 태월하 장로를 생각나게 하는 속도였다. 도저히 보고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만, 나는 간신히 움직임을 잡아채서 가슴을 향해 찔러 오는 속검(速劍)을 검날로 막아 내었다.
“으악?!”
이 인간이 미쳤나?
까가강!
그리고 연이어서 횡베기와 내려치기가 연속으로 다섯 번이나 날아들었다. 강철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기세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받아 내고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손가락 끝이 떨리고 아팠다.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였다. 성구몽 장로는 갑자기 검격(劍擊)을 멈추더니 말했다.
“방금 전의 내 육 초(六招)를 받아 낼 수 있다면 유극문의 사범급이라고 해도 좋다. 강호 어디에서나 통하는 일류고수(一流高手)라는 말이다.”
나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성구몽 장로가 마치 농담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눈빛을 보면 그런 일이 아니다. 애초에 농담을 할 성격도 아니었다. 성구몽 장로는 확언하듯 내뱉었다.
“너는 무공을 수련한 지 한 달 만에 일류급 검법고수의 경지에 도달했다. 별다른 내공의 보조 없이, 최대한으로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것만으로 말이다.”
“고, 고수요? 그럴 리가.”
“방금 전에 내 검초를 받아 낼 때의 네 움직임을 기억하느냐?”
성구몽 장로가 검집에 칼날을 수납하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태월하에게 전수받은 수선(水仙)의 움직임으로 힘의 중심을 유지하면서, 소영검법에 광혈인을 섞어서 쓰더구나. 말로는 쉽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 정도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적어도 십 년은 수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는 며칠 만에 응용해 냈구나.”
“아, 그런가요.”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대단한 일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리 기쁘지 않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이 떨리고 아팠던 건 광혈인의 폭기(爆氣)를 상쇄시켰기 때문인가. 나는 성구몽 장로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그만한 수준을 맞춰 줘야 하는 거겠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성구몽 장로는 이해가 안 되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자신은 무공의 깨달음 얘기를 하고 있었을 텐데 딴 얘기를 꺼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현상을 그렇게밖에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동시에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는 정말 태오일까? 아니면 태오라는 이름을 지닌 ‘무언가’인 걸까? 나는 일단 재미없는 생각을 그만두고 성구몽 장로에게 말했다.
“천휘문과 결투를 한다고 하던데, 누가 출전합니까?”
“우리 장로 셋이 나갈 것이다.”
성구몽 장로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하면 사검사 애들을 보내겠지만 천휘문이다 보니 동원하는 고수들이 만만치 않더구나. 내가 나서도 이긴다고 확신은 할 수 없는 상대다.”
“일당백(一當百)이 되는 자들입니까?”
“어중이떠중이 상대라면 이백 명도 혼자 죽일 자들이지.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나는 호기심을 느꼈다. 성구몽 장로 정도면 은거한 마도고수라고 불릴 만한데, 그보다 강한 고수라면 정말 대단하다. 수련보다 더 호기심이 생기는 사항이라서 질문해 보았다.
“누구와 싸우십니까?”
“귀검(鬼劍) 장문영! 정주 최고의 검사(劍士)이자 천룡전의 십육강에 오른 자다.”
“십육강이라…….”
“구파일방의 눈치도 안 보는 괴물이지. 간만에 나도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성구몽 장로의 눈에는 약간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보고 있던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천하에 고수가 많다지만 십육강이라면 준결승이나 준준결승에도 못 간 셈이다. 그런데도 무시무시한 고수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천룡전이니 지룡전이니 하는 건 뭡니까? 검성전이 대단한 대회인 건 알겠는데 자세한 설명을 안 해 주셔서…….”
“수도에서 열리는 검성전은 네 개의 대회로 이루어진다. 가장 기본적인 실력을 측정하는 등용문(登龍門)에서 어중이떠중이를 가려내지. 등용문을 지나면 인룡전(人龍戰), 지룡전(地龍戰), 천룡전(天龍戰) 순으로 대회가 계속 진행된다.”
잠시 말을 멈춘 성구몽 장로가 말을 이었다.
“등용문을 지나서 인룡전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면 이미 일류(一流)급이다. 지룡전에 출전이라도 했다면 손꼽히는 절정고수이며, 천룡전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초고수들만이 나갈 수가 있지. 천룡전의 순위가 바로 천하무림의 서열이라고 보는 자도 있다.”
“……그게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투덜거렸다. 성구몽 장로가 눈에 이채를 띄자 나는 따지듯이 말했다.
“아무리 명예가 좋다지만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들이 그렇게 기를 쓰면서 대회에 출전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천룡전에서 우승하면 바로 천하제일고수라서 그걸 노리기라도 하는 겁니까?”
“…….”
뜻밖에도 성구몽 장로는 말문이 막힌 채 우물쭈물했다. 뭔가 내가 정곡을 찔러 버린 모양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인 듯했다. 고민하던 성구몽 장로가 말했다.
“검성전은 평범한 무술대회가 아니다. 무림의 진실(眞實)이기도 하다.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당금 강호에서 검성천룡전은 황제(皇帝)가 참관하는 어전대회(御前大會)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노릴 만한 이유는 충분하지.”
어쩐지 얼버무리려는 듯한 태도였지만 나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성구몽 같은 고수가 숨기려 하는 진실이라면 결코 초장에는 밝혀지지 않는다. 좀 더 이야기가 진행된 다음에야 약간이나마 떡밥이 던져지면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서 나오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환룡(幻龍)이란 자를 알고 계십니까?”
“모른다. 뭐하는 인간이냐?”
“모르면 됐습니다.”
내게 있어서는 천하무림이 멸망하는 일보다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싱거운 놈. 수련이나 해라.”
성구몽 장로는 대충 넘기려 했지만, 나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배가 고픕니다.”
“어쩌라는 거냐?”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좀 쉬었다가 하죠.”
“꾀가 늘었군. 제길헐.”
푸념을 하던 성구몽 장로는 별수 없다는 듯 나를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웬일로 밥 먹고 쉬었다 하자는 내 간절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유극문의 밥은 제법 맛있는 편이라서 땀 흘리고 먹으면 행복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때가 내가 누릴 수 있던 안식의 시간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알았다면 수련이고 뭐고 느긋하게 놀았을 테지만, 운명은 시간보다 빨라서 인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