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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24화)
6. 수선(水仙)(3)
그녀의 말에 좌중이 잠시 침묵에 싸였다. 사실 다들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자칫 잘못 말했다가 무안을 당할까 봐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문주를 제외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 성구몽 장로가 입을 열었다.
“문주. 우선 나는 이 제안을 생각해 낸 게 귀검(鬼劍), 장문영 그자라고 생각하네.”
“귀검이라고요?”
“그렇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이 어수룩한 것도 아닌데 속셈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의 은밀함이, 이번 결투 제안에 숨겨져 있지. 이런 고도의 계략은 천휘문주의 역량으론 불가능해.”
“흐음. 상대를 얕보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군요.”
“그건 물론이고…… 나머지는 다른 친구들이 얘기해 주겠지.”
슬며시 대화의 물꼬를 다른 자들에게 넘기는 성구몽의 모습에서는 연륜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회의의 진행을 터 놓고 분위기를 풀어 주는 건 문주 다음가는 이인자가 해야 할 일이 맞았다.
태월하 장로가 말했다.
“귀검이 생각했다면…… 아마 결투장에 나온 우리 유극문을 습격할 생각도 하고 있을 것이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천라지망을 사전에 펼 수도 있을 테지.”
“결투 중의 습격이라. 정말 비겁한 짓이군요.”
“문주. 강호문파는 종종 쓰는 수법이라오. 생존자 한두 명이 남아 봤자 신경을 쓰지 않으니, 명예를 생각지 않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소.”
사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어요.”
“어찌 그렇소?”
“공증인으로 마환곡과 환사문을 끌어들였다는 건, 그들 또한 한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만일 그자들까지 합세해서 총력전이 되어 버린다면 정말로 승산이 없을 테니까요.”
“흐으음.”
태월하 장로가 침음성을 흘렸다. 지금까지 유극문에서는 천휘문만을 상대로 준비를 해 왔고, 승산은 반반이었다. 하지만 만일에 천휘문에 못지않은 마환곡과 환사문이 끼어들면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버린다. 좋든 싫든 결투를 받아들이는 쪽이 나은 것이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검사의 일인, 알타리(斡他理)가 말을 꺼냈다. 그는 유극문 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절정고수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결투장에서 습격할 작정을 하고 있다면 어차피 같은 게 아닙니까?”
알타리의 질문에, 전략전술에 해박한 편인 성구몽 장로가 답했다.
“약간 다르네. 습격이라고 해도 이쪽에서 가능성을 먼저 염두에 두고 있는 이상, 놈들은 절대 우리를 전멸시키지 못해. 근거지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여기에 있는 여덟 명이 살아남는다면 천휘문 쪽이 곤란해질 걸세.”
“그렇다면 놈들은…….”
“일단 결투는 그대로 진행시키되, 결투에서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습격해 오겠지. 그건 어쩔 도리가 없어.”
“…….”
침묵이 맴돌았다. 결투를 받아들이기도, 받아들이지 않기도 힘든 상황. 전대 유극문주가 살아 있었다면 그냥 삼대문파와 싸워도 해 볼 만했을 테지만 천무검왕(天武劍王)은 죽고 없다.
잠시 한숨을 쉬던 사호가 말했다.
“사호는 이렇게 생각해요. 분명히 결투 세 번 중에서 대장전(大將戰)은 귀검(鬼劍)이 나옵니다. 현재 우리 문파에서 귀검을 상대할 자는 성구몽 장로님뿐이지요.”
“잘 모르겠소.”
성구몽 장로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가 몰리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강호에서 활동한 지가 오래되어, 귀검의 실력을 정확히 잴 수가 없소. 허나 귀검을 꺾은 천빙마녀(天氷魔女)의 경지를 고려하면 아마 승산이 반반일 것이오.”
“걱정 마세요. 장로님이라면 귀검을 충분히 이기실 수 있습니다.”
산들바람 같은 미소를 짓는 사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화용월태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미인(美人)인지라, 알타리는 한순간 넋을 놓았다.
사호의 말이 이어졌다.
“결투에는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다만 그전에 대비를 해 둬야겠죠.”
“어떻게 말입니까?”
“현재 우리가 곤란한 건 천휘문 쪽에서 먼저 외세(外勢)를 개입시켰기 때문……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이 해 주면 됩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주의 말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현재 유극문의 아군이 되어 줄 만한 문파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천휘문에 이어 마환곡과 환사문의 연합 세력까지 적으로 돌려줄 만한 문파는 구파일방(九派一邦)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극문은 불행하게도 구파일방과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전대 문주인 천무검왕이 검성천룡전(劍聖天龍戰)의 팔강(八强)에서 무당제일검(武當第一劍)을 꺾어 버려서 구파일방의 체면을 구겼기 때문이다. 무당파는 유극문을 아예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갈휴가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종남파와 화산파라면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만…… 그들과는 전혀 면식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도움을 구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아뇨. 저 사호는 구파일방에 도움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사호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아직도 원한을 되새기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 구파일방은 방조했죠…… 그들에게 조력을 구하는 건 달갑지 않습니다.”
“…….”
사호는 손깍지를 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의 검(劍)을 집어 들었다.
“명시된 결투일은 지금부터 보름 후. 저는 잠시 원군을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문주!!”
태월하 장로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말이 너무 급작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심정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보름 후라고 하지만 언제 약속을 어기고 쳐들어올지 모르오. 이렇게 중요한 때에 자리를 비우겠단 말씀이오?”
“어쩔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런 일이라면 문주가 아니라 사검사(四劍士)에게 시키면 되잖소이까.”
사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빛에 결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것만은 사호 혼자 가야 합니다. 다들 이해해 주시기 바라요.”
“으으음…….”
“그리고 만일에 제가 없을 때 적이 쳐들어오면, 성구몽 장로님을 중심으로 움직여 주세요. 다들 부탁드립니다.”
다들 입을 다물었다. 유극문에서 문주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런 문주가 부탁까지 한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태월하 장로는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셨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그녀의 부재를 인정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푸르륵.
회의가 끝나고 사호 문주는 방립을 하나 걸쳐 메고 말을 탔다. 그녀는 정말로 아무도 호위로 데리고 가지 않을 셈인 듯했다. 바람에 하얀 피부가 스치면서 마치 한 마리 새가 된 듯했다.
알타리가 그녀의 말안장을 고쳐 매어 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다지 걱정은 안 되네요.”
사호는 말고삐를 당기며 암로(暗路) 사이로 사라졌다.
“전, 지금도 강해지고 있으니까요.”
다그닥 다그닥.
그녀의 뒷모습을 일별하며 알타리는 속으로 동감했다.
같은 천인일재(千人一才)라고 불리지만 사호의 재능은 가끔 인간이 아닌 듯했다. 중원에서 같은 또래에는 상대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자신도 그간 많이 진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호에 비하면 약간 뒤쳐졌다.
‘뭐, 시간은 많으니까.’
한편 장로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름 후로 날짜가 정해진 건 좋지만, 결투가 되다 보니 당초 생각했던 기습 작전을 써먹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결투에 어떻게 임할 것인지가 중요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성구몽 장로가 말했다.
“귀검은 내가 상대하겠지만, 나머지 두 놈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제 예상이지만…….”
태월하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회의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마 마환곡주(魔煥谷主)와 환사문주(幻絲門主)가 나올 듯싶습니다.”
“서신의 뒷조항 말이군. 결투자의 부재시 대리인이 출장 가능하다는 대목.”
“네. 아마 천휘문주 장문산은 그 자리에 안 나오고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놈들이 대신해서 내놓을 수 있는 최강의 패는 그 두 사람이죠…….”
“큰일이군.”
성구몽 장로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환곡주와 환사문주는 자신의 실력 하나로 현재의 입지를 구축한 인물들로, 결코 만만한 실력자들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강호를 다니던 시절에도 상당한 명성을 떨치던 인물들이다.
“마환곡주 풍일해는 여섯 쌍의 마환(魔環)을 마치 수족처럼 부리는 달인이고, 환사문주 여진평은 사법(絲法)의 고수입니다. 사검사 애들에게 맡기기에는 짐이 무겁습니다만.”
“정해진 거 아닌가? 별일 없으면 우리가 다 나가면 되네.”
“간만에 재밌겠군요.”
태월하의 눈이 번득였다. 유극문에 들어온 후 성질을 죽이고 지내 왔지만 사실 그는 장강사신으로 군림하던 살인귀(殺人鬼)에 전투광(戰鬪狂). 간만에 대놓고 싸울 수 있는 전장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채은 장로가 말했다.
“환사문주는 제가 상대할게요, 오라버니. 제가 유리할 것 같네요.”
“뭐 그렇겠지. 맡긴다.”
두 사람은 채은 장로의 말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사실 채은 장로가 압도적으로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의 무공은 엄청난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야기가 정리되는 시점에서 태오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들. 태오라는 꼬마는 어찌 되어 가고 있나요?”
“흐음…… 그게.”
“아 그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형님.”
태월하가 갑자기 외치자 성구몽 장로가 뒤돌아보았다. 태월하는 전에 없이 들떠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놈을 공동전인으로 삼고 싶습니다.”
“공동전인?”
“네. 제 육의육신류(六意六神流)도 전해 줄 생각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채은 장로가 놀란 눈으로 태월하를 보았다. 성구몽 장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안 될 것 없겠지.”
“감사합니다.”
“뭐, 뭐예요?”
채은 장로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인생이 오십줄이 훨씬 넘었지만 지금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제약’에 걸려 있는 두 사람이, 감히 멋대로 후계자를 만들다니? 말 그대로 명줄을 재촉하는 짓이었다.
“다들 미쳤군요. ‘그들’의 후환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너무 오랫동안 갇혀 살았어.”
성구몽 장로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네. 동생도 뜻 가는 대로 하시게.”
“후……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