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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검성전 1권(23화)
6. 수선(水仙)(2)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수선화의 모양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는데 봄 한 철에만 가득 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봄이라. 결국 수선화는 봄에 피니까…… 봄의 호흡일 수도 있겠구나.’
봄에는 햇빛이 따스해서 그저 잠을 자고 싶다. 농사일을 돕다가도 햇빛이 따사로우면 풀밭에서 드러누워서 배를 내놓고 잘 때가 엊그제 같다. 하품을 하면서 받아들이는 공기 하나에도 봄의 냄새가 물씬 흘러들어 오곤 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의식은 점차 잠에 빠져드는 걸 느꼈다. 그렇게 피곤하진 않았지만 지루한 일을 반복하다 보니 생각도 하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나태와 빈곤한 상상력이 머릿속을 옭아매면서 내 의식을 점차 가라앉혔다.
머릿속엔 다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글자가 스쳐 지나가고, 무수히 연속되는 쌍곡의 나선이 반복되었다. 무수한 점의 궤적을 통과해서 의식이 사라지는 지평선까지 향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이 세상이 한갓 꿈이라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소설이라면 더 좋겠다.
그런데 나는 깨어 있다. 호접몽(胡蝶夢)이라고 하기엔, 아직도 생각을 하고 있다. 동시에 동작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뭐야 이 녀석?”
태월하는 은신하고 있다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낚시하러 가는 척했지만, 사실은 숨어서 태오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중에 막히게 되면 무공의 단서나 줄 생각이었고, 만일에 나태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대로 패 버릴 속셈이었다.
성구몽 장로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수하곤 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드는 놈이 아니다. 성구몽 장로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태월하의 성격상 몇 번이나 죽이고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태오의 행동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하염없이 느긋하게 수선사계의 동작을 반복하는 듯싶더니만, 어느새 눈이 풀리고 의식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위험한 상태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잘 살펴보면 눈동자는 명확히 고정되어 있어서 깨 있는 듯하기도 했다.
확실한 건 이게 바로 성구몽에게서 전해 듣던 태오의 ‘기묘한 상태’라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반야(般若) 상태로 접어드는 능력! 재능이라고 보기엔 애매했지만 확실히 태월하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의식은 없는 것 같은데 눈동자가 또렷하다. 이런 일도 있나?’
보는 사람에게 어쩐지 오싹함을 불러일으켰다. 귀신에게 빙의당하는 상태도 저것보다는 이해하기 쉬울 듯했다. 살아 있지만 동시에 살아 있지 않은 ‘무언가’를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헉!”
그때였다. 몰래 태오의 동작을 지켜보던 태월하는 벼락같은 충격에 놀라서 낚싯대를 떨어뜨렸다. 놀랍게도 어느 순간, 태오의 움직임 중에서 봄(春)의 호흡을 따라가면서 점차 수선사계의 오의(奧義)에 접근하고 있었다. 경락을 통해 느껴지는 호흡의 율격이 완벽하게 그의 최고 회피기와 닮아가고 있다.
‘이, 이럴 수가! 무중생화(無中生花)의 변화를 이해하고 체득하는 일이 저토록 자연스럽다니!’
수선사계.
과거 장강사신(長江死神)이라고 불리며 장강수로채주마저 일대일로 쓰러뜨린 태월하 장로의 독문무공이다. 사실상 무공이나 움직임이라기 보다는, ‘진정한 호흡(眞呼)’이라는 흐름이었다.
태월하는 수선사계를 체득한 후부터, 동작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의 힘과 속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회피할 영역을 지니게 되었다.
태월하와 겨뤄 본 자는 마치 장강의 대류(大流)에 섞여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태월하의 모든 움직임은 사십여 개의 기본 동작에서 비롯되지만, 단 하나도 겹치거나 낭비가 없었다. 그것은 태월하가 자연의 흐름을 읽고 마치 한 떨기 수선화꽃처럼 순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선사계의 요지는 대자연의 ‘호흡’을 이해하고 무중생화(無中生花)의 이치에 자신의 움직임을 일치시키는 것. 동작은 곁가지에 불과했기에 무수한 장강 일대의 무림인들은 수선사계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패배했다.
다시 말하자면 운이 좋으면 하루만에도 얻을 수가 있고, 아니면 평생 가도 불가능한 기이한 절학이었다. 물론 하루만에 얻는 건 이론상의 이야기였고 태월하의 사문에서는 약 일 년 동안 대자연에 섞여서 뒹굴면서 호흡을 이해하려 했다. 태월하도 수선사계를 달통하기 위해서는 무려 육 년이나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성구몽 장로도 태월하의 수선사계의 원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막연히 어렵다고만 이해하고 태오를 맡겼을 뿐 실제 난이도는 몰랐다. 태월하 본인이 육 년이나 걸려서 연성한 흉악한 난이도의 절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허허.”
이어서 태월하는 허탈하게 웃었다. 태오의 움직임이 자신의 수선사계와 완전히 달라지면서 독립적으로 변하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수선사계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달라져서 다른 형태를 보인 순간 완성(完成)으로 보았다.
화룡선도(花龍仙桃) 철수개화(鐵樹開花) 단계표향(丹桂飄香) 백화쟁염(百花爭艶) 화룡토주(花龍吐珠) 몽필생화(夢筆生花)로 이어지는 변화는 태월하가 즐겨 쓰는 흐름이다. 그러나 지금 태오가 보여 주는 움직임은 두세 가지가 뒤틀린 채 전혀 다른 동작이 되어 가고 있다.
‘내 것은 여름(夏)…… 놈의 움직임은 차라리 겨울(冬)이구나.’
이제 태월하가 더 가르쳐 줄 것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십 년이 지나도 깨닫지 못할 절학을 한순간에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사문의 최대절기 하나를 꼬맹이에게 털려 먹은 상황.
화가 날 법도 하건만 태월하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고 있었다. 성구몽 장로가 태오에게 기대를 걸었던 까닭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신룡전(神龍戰)의 괴물은 인간의 재능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다. 그렇다면 괴물의 힘이라도.’
태월하는 그 순간 결심했다. 성구몽 장로의 뜻에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처음 무심검기를 익혔다고 했을 때도 반신반의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일어나라!”
잠시 후 태월하는 태오를 깨우고, 멍하니 있는 태오에게 말했다.
“내일만 한 번 더 와라. 움직임만 정리하고 수련은 끝이니, 천휘문과의 대결 전까지 광혈인만 열심히 익혀라.”
“사흘 동안 수련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더 필요없을 것 같군. 안 와도 된다.”
태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 생각해서 쫓아내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태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월하가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오늘 문주가 표국을 통해서 천휘문주의 서신을 받았다고 한다. 일이 어찌 될지는 그 서신에 달려 있겠지.”

* * *

바람이 맑은 날이다.
유극문주(有極門主), 사호(沙湖)는 자기 앞에 놓여진 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정한 필체로 쓰여 있지만 일말의 살기(殺氣)가 읽는 자를 불안하게 했다. 원독(怨毒)에 가득 찬 증오의 맛이었다.
“청야평(晴倻坪)에서 결투를 진행한다. 총 삼전이선승(三戰二先勝). 무승부일 경우에는 최고의 실력자를 서로 앞세워서 결론을 낸다. 대결의 공증을 위해 마환곡(魔煥谷)과 환사문(幻絲門)이 참여하며, 결투자의 부재시 대리인이 출장 가능하다…….”
“흠.”
“거부하면 귀문과의 혈채(血債)를 풀기 위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리라…….”
사호가 무감정하게 서신의 내용을 읽고 있자, 유극문 사검사(四劍士)의 수장인 제갈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놈들이 무슨 개 짖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당장 찢어 버리심이…….”
“나도 찢고 싶긴 했는데.”
사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현재의 유극문을 이끌어 가는 실세인 삼대장로와 사검사가 모두 모여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천휘문이 유극문에 복수를 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의외였기 때문이다.
결투(決鬪)!
강호무림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승부 방식. 거기에 세 번의 결투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정당당하고 전형적인 방식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자들 중에 천휘문이 정말로 승부만 가리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들과 천휘십검의 목숨을 잃었는데, 고작 세 명의 목숨으로 성이 찰 리가 없기 때문이다.
채은 장로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문주. 혹시 천휘문주 장문산이 뛰어난 인품과 도량을 가졌다 생각하시나요?”
“설마요, 장로님.”
사호는 살포시 웃었다.
“귀검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 주제에 욕심만 거대한 인물이죠. 전에 직접 만나 봐서 알고 있어요.”
“역시 문주님이시군요.”
채은 장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만에 하나 문주가 잘못된 착각을 하고 있으면 바로 잡아 줄 생각으로 질문한 것이다.
역시 결투 제안에는 흉계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사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사실이든 아니든 관계없어요.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 상대가 성인군자라도 적이면 밟아 버릴 뿐입니다.”
“훌륭하신 자세입니다.”
“자, 그럼 천휘문은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을까요? 의견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