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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내가 가는 길 1권 (1화)
1.전이 (1)


“너만 알고 있어. 난 말이야.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른 곳에서 왔어. 지금은 비록 이런 몸을 가지고 있지만 본래 내 몸을 가지게 된다면 네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해지지. 예를 들면 말이지, 한 도시쯤은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해 준다면 내가 많은 보상을 해 주지.”
…….
“어떤 보상이냐고? 초쿠파이 한 상자 어때? 왜 말이 없는 거야? 지금 내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가 본데…… 좋아! 초쿠파이 한 상자에 초코 우유를 얹어 주지. 어때? 이제 슬슬 회가 동하지? 뭐? 말하기 싫다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의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너의 생각을 읽어…….”
미친놈. 벌써 1시간째 내 귀에 소근거리는 녀석의 정체다. 내가 지금 상태만 아니라면 벌써 어구창을 날려 버렸을 텐데…….
눈빛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녀석은 벌써 한 줌의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리라. 난 녀석을 죽일 듯이 쳐다보다 결국 시선을 돌렸다.
미친놈에게 아무리 눈빛 레이저를 쏘아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혹여 내 살기를 사랑의 눈빛으로 오해하면 그날 난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시선을 돌린 방향에도 많은 이들이 있었다. 혼자 뭔가 중얼거리는 사람들, 한자리에 앉아 계속 같은 곳만 쳐다보는 사람들, 연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좁은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렇다. 이곳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신병원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난 전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미친놈의 몸으로.
이 미친놈의 몸을 차지한지도 한 달이 지나가고 있건만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도 탈출할 수도 없다. 자해를 했는지 목이 다쳐 말을 못했고, 자해 방지용 병원 옷을 입고 있어 손발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기분이 나쁜 건 이 몸 주인의 기억이 마치 나의 기억인 양 떠오른다는 것이다.
단편적이고 돌발적으로 그려지는 기억들이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지간히 몸을 막 굴리던 녀석이었는지 성인용 비디오의 장면들도 간혹 보였다.
따지고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뇌세포가 살아 있다면 그 속에 잠재된 기억들 또한 죽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영혼 상태에서도 기억은 존재하는 것일까?
쳇! 이딴 거에 고민할 필요 없다. 난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아직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의 양이 미약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제는 이진하라는 인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기억을 알고 있는 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멍하니 생각을 해서일까? 자고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졸린다. 따뜻한 가을 햇볕의 영향도 있겠지만…….
―딩동 댕동∼ 딩동 댕동∼ 딩∼ 딩∼
일광욕 시간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멜로디에 정신이 들었다. 깜빡 졸았나 보다. 병원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며 몸집 좋은 간호사들이 나와 환자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던 미친놈도 ‘다음에 보세’라는 끔찍한 말을 던지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부터 원장님 진료가 있을 거야.”
건조하고 무뚝뚝한 음성. 내 전담 남자 간호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리곤 뒤에서 미는 힘에 의해 실내로 들어갔다. 익숙한 복도를 지나고 휠체어가 멈췄다. ‘원장실’이라 적힌 문 앞이었다.
“원장님, 이진하 환자 도착했습니다.”
“들어오게.”
연륜이 있는 편안한 목소리.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였음에도 괜스레 불안감이 스멀거린다.
원장실에 들어서자, 제일 눈에 띄는 건 녹화용 카메라와 두 명의 경호원이었다. 그리고 원장의 취미인 듯 창틀에는 여러 가지 난초들이 잘 손질된 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서 오게, 진하 군.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가?”
빌어먹을! 눈으로 보면 모르겠냐? 어디가 불편한지? 내 모습은 손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만든 환자복을 입고 목마저 두툼한 붕대를 감고 있어 불편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불편한 곳이 없냐라니.
“허허,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다 진하 군을 위해 그러한 것이니.”
내 불만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원장은 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웃는다.
“아직 다 낫지 않은 자네를 부른 건 몇 가지를 묻기 위함이네. 특히, 가족 분들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시고 자네의 상태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같아 이 자릴 마련했으니 편하게 말을 하게나. 먼저 상처에 대해 먼저 말을 해 보지. 왜 갑자기 자해를 했나? 폭력성이 심해져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해를 하다니…….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건가?”
인상을 썼다. 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묻는 것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속마음은 감추었다. 그리고 의문을 표했다.
“아참! 미안하네. 목이 다쳐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군.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원장의 말에서 왜 이진하가 죽고 자신이 그의 몸을 차지하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고 날카로운 무언가로 내 목을 찌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하가 겪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고통의 기억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
“그끄윽!”
다친 목 때문에 괴음이 흘러나왔다.
“진하 군, 괜찮나? 갑자기 왜 그러나? 목이 아픈 건가? 김 간호사! 김 간호사!”
원장의 말이 들렸지만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엄청난 기억들이 흘러들어 왔고 그 때문에 정신이 희미해져 갔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이진하. 대한민국 제계 순위 15위의 오성그룹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조부모님, 부모님, 가족들 모두 날 사랑해 주셨기에 행복했었다.
하지만 불행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부모님이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내 인생은 완전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공부를 멀리했고,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점점 더 삐뚤어져 갔다.
물론, 조부모님과 가족들은 그런 날 보면서 안쓰러운 얼굴로 이해해 주셨다. 특히, 작은아버지는 변호사와 경호원까지 붙여 주셨다. 하지만 그뿐. 그분들은 나에게 사랑을 주진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난 더욱 심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심지어 마약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작은아버지가 내게 붙여 준 변호사가 처리해 줬기에 나의 행동은 더욱더 나빠져 갔다.
마침내 한 파파라치에 의해 마약 파티를 하던 내 모습이 사진에 찍히고 말았다. 결국, 할아버지께선 분노하셨다.
강제적으로 이곳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난 한동안 짐승처럼 묶여 있어야 했다. 세상을 원망했고 날 이곳으로 보낸 모든 이들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마약 중독 치료가 끝났을 땐 오히려 지금까지의 삶이 부끄러웠다. 너무 이른 음주와 담배 그리고 마약으로 인해 몸은 망가졌지만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면서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특히, 날 담당하던 김지연 간호사는 잊고 있던 어머니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제정신을 차리는 걸 싫어했던 사람이 있었다.
이철호! 나의 작은 아버지!
으득! 그 인간, 아니 짐승 같은 놈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그놈이 방황하는 날 타락으로 빠뜨렸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것을 날 위하는 것이라 착각하며 지내 왔었다. 가족의 사랑이라고 믿고 지내 왔었다.
놈은 병원까지 마수를 뻗쳤고 원장은 정신 치료의 일종이라며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담당 간호사도 바뀌었다. 약을 복용하면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의 환자들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치료를 목적으로 한다며 핸드컴에 연결된 헤드셋(뇌와 직접 정보를 주고받게 도와주는 장치) 씌워 놓은 채로 말이다. 헤드셋에서 각종 색깔들이 뒤섞여 현란하게 움직이는 영상이 하루 종일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헤드셋에서 나오는 화면을 보면서 차츰 환각과 환청이 되살아났다. 마약을 했을 때와 비슷했지만 마약과 다르게 기분 나쁜 증상이었다. 치료 목적이라는 영상이 오히려 날 망가지게 만들었다.
화가 났다. 분노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이 환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아버지와 원장의 통화를 들었던 것도 나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난 미쳐 갔다.
…….
빠직!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마저 느껴질 정도로 내 정신은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눈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지만 놀란 표정을 짓는 걸 빼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장이 챙겨 주는 정신병 치료 알약을 먹고 취하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날 향해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날 원망 말라구. 다 시켜서 하는 일이니까. 덕분에 돈 좀 만지게 되었으니 고통 없이 보내 주지. 크흐흐흐흐!”
역한 입 냄새가 확 풍겼다. 놈은 천천히 내 오른손에 뭔가를 쥐어 주더니 서서히 내 목에 갖다 댔다. 헤드셋의 반쪽이 날카롭게 빛났다. 구름에 벗어난 달이 창을 비췄다.
병원복을 입고 있는 놈의 얼굴이 확연히 보인다. 하지만 그 밋밋한 얼굴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목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고통! 차츰 힘이 빠진다.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 멀어져 간다.
이 원한을 이 분노를 어떻게 풀지? 개새……끼……들…….
“허억!”
꿈이다. 아니, 기억인가? 이진하의 모든 기억들이 나에게 전해졌다. 심지어 기쁨, 슬픔, 분노, 좌절과 같은 감정까지도. 그래서일까? 원장실에서 정신을 잃은 후부터 눈만 붙이면 이진하의 인생을 꿈꾼다.
그리곤 마지막은 항상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일어났다.
“3주짼가?”
식은땀을 닦으며 이렇게 악몽을 꾸는 날짜를 꼽아 봤다. 목의 상처가 거의 나았는지 며칠 전부터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깨끗한 소리가 아닌 탁하고 컬컬한 목소리였다.
병원용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운동 전에 하는 간단한 스트레칭이었다. 몸이 삐거덕거린다.
하지만 일주일간 조금씩 움직인 보람이 있는지 처음처럼 신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진하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담배, 술, 마약, 섹스에 찌들었고 병원에 입원해서는 약에 취해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몸이었지만 한 가지는 마음에 들었다.
두 다리.
코리의 몸이었을 땐 두 다리가 없었다. 양부모님의 추측에 따르면 사고로 잃었을 것이라 했었는데 기억엔 없다. 물론, 로봇 의족이 있었다. 하지만 비싸기 만하고 성능이 나빴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노동이었다.
“아구구구구∼!”
허리를 풀다 결국 신음 소리가 나왔다. 10분도 채 움직이지 않았는데. 망할 놈의 몸뚱어리 같으니라고.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자 전담 간호사가 들어왔다.
“치료받을 시간이다.”
저 새낀 항상 반말이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다. 난 두말없이 그가 가지고 온 휠체어에 몸을 실었다.
휠체어는 몇 개의 차단 문을 지나 한 달 가까이 치료를 받던 외과로 향했다. 정신병원의 외과라고 해 봐야 의사 한 명에 방 하나가 전부였지만 이거라도 있는 덕분에 내가 이 몸을 차지하게 된 걸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운 곳이었다.
“어서 와라.”
“네. 안녕하셨어요?”
“자식, 목소리가 많이 좋아졌군. 녹차 마실래?”
“네, 한 잔 주세요.”
“한 선생님. 이진하 환자 오늘 11시부터 원장님의 진료가 있습니다.”
“알았어요. 그전에 끝낼 테니 나가 있어요.”
녹차를 끊이던 한 선생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감시자인 전담 간호사가 나가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
…….
“쓰읍! 인사!”
“가, 감사합니다.”
내미는 녹차를 받으며 아무 말을 안 하자 인상을 쓰는 한 선생이었다.
이 인간은 처음부터 이랬다. 인사나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으면 인상을 쓰면서 별 말을 다 했다. 싸가지가 없다는 둥 살려 준 은인을 우습게 안다는 둥. 나도 자존심이 있어 버텨 봤지만 치료를 받으며 눈물을 쑥 뺄 정도로 고통을 받은 후 꼬리를 내렸다.
고통 앞에 장사 없었다.
한대현. 착하지 않은 얼굴에 키는 190이 넘었고, 덩치 또한 상당해 조직 폭력배라고 해도 누구나 인정할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보기완 다르게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다 잘린 후 내가 살해당하기 2주일 전에 우연찮게 이곳에 취직되었다.
실력 있는 외과의가 이런 정신병원에 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고, 마침 한대현이 그날 당직이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잘못됐으면 이 몸을 차지했다가 바로 또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치료 때마다 자신이 내 목숨을 살렸다는 걸 강조하는 덩치답지 않게 쫀쫀한 의사였지만 밉지 않고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