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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2화)
1.전이 (2)
“이제 상처를 볼까.”
어느새 녹차를 다 마셨는지 솥뚜껑 같은 손이 내 목을 향했다. 순간, 움찔했다.
“쫄기는…….”
살해되던 날의 기억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겁을 내던 난 한대현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거의 아물었네. 오늘은 소독만 하면 되겠다. 게임하고 있을래?”
항상 그랬듯이 핸드컴에 연결된 안경을 건네는 한대현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안경을 받아 썼다. 시력을 따라 움직이는 아이즈 포인트(Eyes point)로 간단한 카드 게임을 켰다.
물론 게임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을 속이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후, 난 오늘 실행할 일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한대현의 배려로 치료 때마다 컴퓨터를 할 수 있게 된 건 행운이었다. 치료 시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장점뿐 아니라 진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병원의 시스템을 해킹하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해킹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구멍이 쑹쑹 뚫려 있었다. 이후, 난 치료 때마다 이 몸의 주인인 진하에 대해 알아갔다.
치료 때마다 기록하던 동영상들, 이 병원 사람들의 정보, 항상 기록되고 있는 감시 카메라의 기록 등.
하지만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몸이 진짜 미친 건지 아님, 이들이 증거를 인멸했는지 헷갈린다. 사건 당일 날 감시하던 기록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 됐든 난 이곳에 더 머무를 생각 따윈 없다.
탈출할 것이다!
“그동안 감사드려요.”
“자식, 안 볼 사람처럼……. 다음 주에 보자.”
“네.”
한대현 선생께 작별 인사를 하고 원장실로 향했다. 보기 싫은 얼굴이 가짜 웃음으로 인사를 한다.
“하하하! 어서 와, 진하 군. 한 선생에게 들으니 많이 나았다고 하던데. 그래, 상처는 괜찮나?”
“네.”
머리 한 곳에서 분노가 일었다. 아마 지금 내 머릿속에 진하의 감정만 가지고 있다면 당장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성과 섞여져 분노를 희석할 수 있었다.
“자네 작은아버님이 걱정이 많다네. 물론, 나 또한 걱정이 많았어. 이제 두 번 다시 가족들에게 걱정 끼칠 짓은 하지 말게.”
지랄! X새끼들!
이철호에 대한 얘기를 듣자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화가 났다. 입을 열면 욕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참아야 한다. 탈출을 위해선.
“자, 그럼. 이제부터 얘기해 보세. 그날 왜 그랬는지 천천히 말해 보게. 자네가 꺼려진다면 말하는 중간에 멈춰도 좋네.”
“그날 저녁을 생각해 보면 정확하게 기억을 할 순 없어요. 하지만 자기 전에 무엇인가에 대해 무척이나 화가 났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치료 시간은 30분 정도. 하지만 탈출을 위해선 11시 50분경이 시뮬레이션 결과 가장 좋았다. 물론, 몇 가지 돌발 상황을 예측해 방비를 마련해 놓긴 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촬영된 영상도 30분을 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가급적 느린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
‘11시 20분!’
한마음정신병원의 경비원으로 재직 중인 윤성준은 침착한다고 했지만 자꾸 고개가 시계 쪽으로 향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뭘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요? 급하면 갔다 와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내, 내가 뭘! 그냥 어제 잠을 잘못 잤는지 몸이 좀 찌뿌듯해서 그래.”
“크크크! 마나님과 좋은 시간 보내셨나 봐요?”
“예끼, 이 사람이 별소릴…….”
연신 키득거리는 신항석의 눈치를 보곤 괜스레 앞에 놓인 출입 일지로 눈을 돌렸다.
윤성준의 시선은 출입 일지를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며칠 전 자신의 핸드컴으로 온 문자 메시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11월 20일, 11시 40분에 정문을 열어 두시고 30분 정도 자리를 비우시면 2,000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허락하시면 문자 보내 주세요. 그럼, 계약금 10%를 한국은행 통장으로 보내겠습니다.
이 문자를 봤을 때 피싱 문자라 확신했다. 제세공과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챙기는 경우라면 이미 낡을 대로 낡은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명문대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한 달 월급 300만원. 사실, 이 돈으로는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다. 아니, 부족했다.
과외는 커녕 학원 한 번 다녀 본 적이 없는 아들이 남들이 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당장 입학금과 등록금이 2,000여만 원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상한 메시지에 ‘예’라는 메시지 한 번 보냈다고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보낸 후 5분도 되지 않아 입금이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그 후, 고민은 사라졌다. 문 한 번 열어 주고 2,000만 원이라니…….
하지만 문을 열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별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나 이 일 때문에 해고당하지는 않을지 그것도 아님, 엄청난 범죄에 발을 들인 건 아닌지. 특히나 눈앞에서 어느새 졸고 있는 신항석이 있다는 것이 더욱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원장의 처조카였다.
따르르릉!
경비실에 있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상념에서 벗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네, 경비실입니다.”
―윤씨, 항석이 거기 있지? 지금 원장실에 난방이 전혀 안 되고 있으니까 당장 손보라고 해!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끊고 항석을 깨우려 돌아보니 전화벨 소리에 깼는지 눈을 비비고 있었다.
“무슨 전화예요?”
“지금 원장실에 난방이 고장났나 봐. 자네더러 손 좀 보래.”
“아이씨! 잘 돌아가던 것이 왜 지랄이래. 점심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언능 가 봐. 병원 전체에 이상이 있을지 모르잖아.”
“에이∼ 근데, 같이 갈 거죠?”
윤성준은 옳다구나 싶었다. 신항석이 맡고 있는 일이 건물 유지 보수였고 자신은 경비원이었지만 사실 구분이 없었다. 특히나 신항석이 들어오기 전까진 비록 자격증은 없었지만 간단한 고장은 잘 고치는 편이었다.
“진짜 우리 사이에 이러기에요? 제 실력 뻔히 알면서도…….”
생각을 한다고 잠시 대답이 없었더니 신경질을 부리는 신항석이었다. 뒤 배경으로 들어온 그라 직책만 있을 뿐 실력은 거의 없었다.
“나야, 가고 싶지. 근데 누가 올지 모르는데 문은 어쩌냐?”
“누가 문짝 떼 갈까 봐요? 그냥, 열어 두고 가면 되지. 에잇!”
지잉!
“됐죠. 빨랑 가요.”
신항석이 아예 개폐 장치에 버튼을 누른 후 손을 잡아끈다.
‘이보다 더 좋은 순 없다인가?’
신항석의 손에 이끌려 경비실을 나서며 시계와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결과야 어찌 되었던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마친 윤성준은 본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머지 금액이 들어오길 간절히 바랐다.
***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자네 몸도 좋지 않은데 방 안이 차가워지는 것 같으니까 이번 질문으로 끝을 내도록 하지. 그래 뭔가?”
난 잠시 원장을 응시했다.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을 차례다. 시계를 보니 11시 42분. 마지막 질문을 하고 나면 이 지겨운 감옥과도 안녕이다.
“제가 자해를 했다는 그날, 사실 전 누군가에 의해 살해를 당할 뻔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제 기억으론 분명 누군가가 절 죽이려 했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음,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 찌른 사람이 자네의 작은 아버지였던가? 아님, 나였던가?”
‘뻔뻔한 놈! 얼굴 하나 변하지 않다니.’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피해망상의 다른 결과물이라고 봐도 되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작은아버지와 나에 대한 공격성이 잠재의식 속에서 그런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 일단 오늘은 이만하기로 하고 내가 처방하는 약을 복용한다면 그날의 기억도 자세히 떠오르는 날이 올 테지. 그럼, 그때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지.”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질문이었다. 약간의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려 했건만.
“참, 원장님. 다음엔 할아버지를 뵙고 싶군요. 안 되면 전화 통화라도 하고 싶은데요.”
“그래, 그건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약은 김 간호사가 가져갈 테니 식사 후에 복용하도록 하게.”
순간, 진하가 정말 살해당했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해킹한 정보에 따르면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지는데 저 인간의 얘기를 듣다 보면 정말 피해망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해망상이라고 한들 이미 정신병을 가진 진하는 죽었고 정상인인 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탈출 후, 감시하며 더 자세히 알아본 후 복수를 하면 그뿐이다.
김 간호사가 들어와 내 휠체어를 밀고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휠체어의 바퀴를 잡고 원장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오늘의 얘기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신 말씀 모두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Shut down!”
“엇!”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상황이라 김 간호사는 문 안쪽에 난 문밖에 있었다. 그 상태로 문이 닫히자 김 간호사는 비명을 지르며 휠체어에서 손을 뗐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서인지 문에 달린 창으로 당황한 놈들의 얼굴이 보인다.
“하하하! 나중에 다시 보자고요.”
지은 죄가 많아서일까? 원장실 자체가 워낙 견고하게 만들어 놓았기에 이번 일을 계획하기 쉬웠다. 내 웃음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놈들에게 한 번 웃어 주고 난 휠체어를 굴리기 시작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거나 키(Key)를 사용해야 하는 엘리베이터는 식은 죽 먹기. 문제는 로비에 있는 안내 데스크에 과연 사람이 들어가 있느냐 없느냐였다.
들어가 있다면 이미 문이 폐쇄되어서 문제가 없지만 혹 한 명이라도 로비에 서성인다면 조금은 곤란한 상황이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침착하게 본관 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났는지 눈치를 못 챈 직원이 여전히 뭔가에 집중하며 앉아 있다. 로비의 직원 중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밥 먹으로 갔나? 괜스레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 거기 누구……? 이런, 환자가 내려오다니. 거기 서! 거기 서라니까!”
너 같으면 서겠니? 못 들은 척 휠체어를 계속 굴렸다. 5, 4, 3m.
“잡았다!”
휠체어의 뒤를 잡혔다. 휠체어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휠체어를 잡고 있던 직원이 당기던 힘에 밀려 뒤로 넘어진다.
“All shut down!”
본관을 나서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철컹철컹!
환자들을 도망 못 가게 만들어 놓은 장치들은 최고의 탈출 도구였다. 1시까지 누구도 이 건물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길지 않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했다.
탈출을 계획하면서 가장 심열을 기울인 곳은 다름 아닌 정문을 여는 것이었다. 다른 곳은 다 온라인화가 되어 있었지만 정문만은 경비실에서 문을 열어야만 했다.
경비실을 흘낏 보니 역시 아무도 없었다. 정문 또한 열려 있었다.
“하하하하!”
탈출이다. 고전 영화 쇼생크 탈출과 같은 느낌을 재연해 보았다. 왠지 무척이나 쪽팔린다. 그냥 철문을 밀고 나가자 불러 놓은 택시가 보였다. 번호판을 확인하고 문을 두드렸다.
“서대호 씬가요?”
내가 택시를 예약할 때 사용했던 이름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뒷문이 열린다. 택시를 타면서 목적지를 말했다.
“서울 광화문으로 가 주세요.”
“네. 근데, 그곳까지만 가면 나머지 잔금 80만원 주시는 거죠?”
“네. 컴퓨터 사용할 수 있으면 도착과 동시에 드리죠. 제가 부탁한 옷은 어디에 있죠?”
“여기 있어요. 이걸 사용하시면 되요.”
핸드컴에 연결된 안경을 준다. 여성 운전사는 부탁한 옷을 건네곤 차를 출발시켰다. 옷을 갈아입곤 창밖으로 환자복을 던져 버렸다. 논밭 사이로 병원이 멀어진다.
2.아라 (1)
한국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봄. 4계절이 뚜렷하다는 말은 거짓임에 틀림없다. 1시간 남짓한 한강에서의 걷기 운동으로 약간 나던 땀도 바람 한 방에 식어 버린다.
“으, 추워진다. 빨랑 들어가자.”
코리였을 때부터 익숙한 혼잣말. 여유롭지 못하게 마시던 커피 컵을 휴지통에 던지곤 걸음을 옮겼다.
꽤 많은 양의 빵과 우유를 구입한 후,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구입한 10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운동 다녀오시나 보군요.”
“네.”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연세 지긋한 분의 깍듯한 인사에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띵! 10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몇 개의 보안장치가 된 문으로 다가서자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진하, 어서 와요.”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지만 정말이지 아름다운 목소리다.
“다녀왔어, 아라.”
텅 빈 공간을 향한 인사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 늘 혼자였던 나였기에 아라를 만들 때 인사하는 법을 가장 먼저 입력한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