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카미엘 전기 1권
카미엘 전기 1권(1화)
프롤로그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동굴 안.
백발이 무성한 장발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사내가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인생이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구나. 허허!”
천마신교의 부교주 사독천은 인생의 무상함에 눈물을 흘렸다.
동굴 입구에서 죽어 가는 수하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인생을 회고한다.
교주의 자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며 천마신공에 몰두하였다.
피에 미친 살인귀가 되어 10년이란 세월을 살았다.
정신을 차린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토록 바라던 교주의 자리도 사라져 있었다.
그래, 부교주의 자리에서 만족하며 살자.
욕심을 버렸건만 사독천은 뒤통수를 얻어맞고 만다. 마교에서는 당연시되는 관행, 배신이었다.
오랜 벗 진설충을 위하여 교주직을 양보한 것이 화근이었다.
권력 앞에 형수도 베어 버리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더욱이 암투가 난무하는 마교에서 친구를 믿은 것은 일생일대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조금만 더 독했더라면 이런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교주직을 양보한 것은 모두 늦은 깨달음에 있었다.
같은 스승 아래에서 동문수학한 진설충과 사독천은 희대의 천재라고 불릴 만하였다. 역사를 통틀어 대성한 자가 몇 되지 않는 천마신공(天魔神工)을 동시대에 대성하였다. 사독천이 교주직을 양보한 것은 신공의 깨달음이 조금 늦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이르러 사독천은 진설충이 오랜 시간부터 배신을 준비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에 중독되었고 오랜 정인이었던 설란까지 빼앗겼다. 그것도 모자라 무림 공적이 되었으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살아갈 의미가 없었다.
사독천은 천천히 검을 잡았다.
척!
그는 차가운 검 끝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싸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며 입술이 떨려 온다.
이윽고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흐른다.
시커멓게 타 버린 가슴속에는 단 한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
죽음의 순간까지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
“설란!”
그녀와의 추억과 함께 이 세상의 미련을 담아서 검을 밀어 넣었다.
푸욱!
날카로운 검이 그의 후두부를 관통하여 들어왔고 뜨겁고 비릿한 기운이 올라왔다.
“쿨럭! 컥!”
푸하하학!
동맥이 뚫리고 피 분수가 솟구쳤다.
사방에 피를 뿌리며 경련을 일으키던 사독천은 서서히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낀다.
죽어 가는 순간, 눈앞에는 설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사독천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휘젓는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녀를 잡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
카이사르 공작령.
300년 전 칼리어스가 건국될 당시 가장 큰 공을 세운 검공 알테인에게 내려진 영지로써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가장 큰 항구 도시였다.
주변 국가들은 물론이고 대륙과 대륙 사이를 이어 주는 교두보 역할을 하던 카이사르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고, 명실상부 칼리어스의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황금기를 누리던 카이사르도 대를 거치면서 점점 쇠퇴해 갔다.
조직화된 해적들과 산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교역의 루트가 사방으로 막힌 카이사르는 점점 고립되어 예전의 성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300년이 흐른 지금은 일개 자작령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정 상태와 인구수를 유지하며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이제 11대를 맞이하는 카이사르의 영주 랭턴 공작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아, 아니! 내 아들놈이 왜 피떡이 되어 돌아왔단 말인가?”
왕국의 아카데미로 연수를 보냈던 아들이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 약관을 넘긴 그는 카이사르의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충분이 놀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들것에 그를 싣고 온 쿤트는 말끝을 흐렸다.
“말하라! 내 아들놈이 이러고 누워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어제 고급 술집에서 계집을 셋이나 끼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순간 걱정스런 얼굴을 하던 랭턴의 낯빛이 변하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쿤트의 말을 들은 랭턴은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휴…… 이 미친놈이 또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가려다 붙잡혔던 것이군. 아예 앞으로는 일어나지 못하게 다리를 잘라 버리게.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군.”
이제는 지쳤다는 듯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랭턴은 이마를 짚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나뿐인 아들이 하필이면 저런 망나니란 말인가!”
뒤돌아서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던 랭턴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떨려 온다.
“네, 이놈……!”
“각하?”
돌아선 그의 눈에서는 인간의 예기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 뿜어져 나왔다.
더 이상 화를 주체하지 못한 랭턴은 검을 빼어 들었다.
챙!
“네 이놈! 아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가, 각하!”
칼을 빼어 들고 아들을 향해 돌진하는 그의 눈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니었다.
“막아라! 공자님이 죽을 수도 있다!”
“각하!”
이미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달했다고 알려진 그의 신체능력은 인간을 초월하였다.
랭턴의 허리와 다리를 붙잡은 기사들은 그 엄청난 완력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버러지만도 못한 녀석아! 차라리 함께 죽자. 너를 죽이고 나도 조상님들을 따라가련다!”
“고정하십시오, 주군!”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그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간신히 랭턴 공작을 만류한 기사들은 식은땀을 훔쳐 내었다.
“아…….”
랭턴은 마침내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말았다.
기사들은 기겁하며 그를 부축하였다.
“주, 주군! 어서 의원을 부르라! 무엇하느냐!”
“주군!”
카이사르의 기사단장 헥토르는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랭턴 부자를 보며 혀를 찼다.
“어찌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시는 것인지. 주군이 아직까지 거동하신다는 것이 신기하군.”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다리가 후들거리는 기사들을 보며 헥토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미 한두 해가 아니지 않느냐.”
1장 삶의 의미를 발견하다(1)
“독천, 일어나 식사하세요. 어서요.”
눈을 뜬 그의 앞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다.
쌍꺼풀은 없지만 커다란 눈.
오뚝한 콧날, 앵두 같은 입술.
비녀와 함께 말아 올린 머리는 그녀의 조막만한 얼굴과 아주 잘 어울린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름다운 여인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천사 같았다.
“후훗, 뭘 그리 보십니까? 소첩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아름다워서…….”
얼굴을 살짝 붉힌 여인은 그의 입술에 살포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왠지 익숙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다.
그의 입속으로 그녀의 향기가 흘러들어 온다.
향기에 취해서 마치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입술을 땐 그녀는 부끄러운 듯 그의 품에 안겼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독천의 품에 안긴 여인은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후훗,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고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여인은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꼬옥 안으며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설란.”
쪽!
다시 한 번 그에게 입을 맞추며 설란이 말했다.
“다시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설란, 내 사랑 설란!”
이윽고 기나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었으면…….’
***
망나니로 유명한 카미엘의 방.
외상으로 얻어먹고 다니는 술값만 해도 성 한 채를 통째로 살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지독한 한량이었다.
여자라면 앞뒤 분간하지 않는 난봉꾼에다 검공의 장남임에도 전혀 검과 거리가 멀다.
그런 카미엘도 혈육이 있다.
랭턴.
그의 아버지이며 칼리어스의 공작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카미엘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고요하던 방문이 세차게 열렸다.
철컥!
문이 열리며 랭턴이 들어왔다.
어쩐 일인지 자리를 박차고 나온 카미엘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공손한 자세로 서서 그를 맞았다.
“아버님, 소자 불민하여 아침 문안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어제의 일을 무마시키려 하는 행동이리라.
랭턴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머리를 세차게 후려치며 말했다.
퍽!
“미친 척하면 내가 용서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이젠 별짓을 다하는구나!”
털썩!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카미엘은 넙죽 큰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소자, 또 한 번 아버님께 불효를 범했습니다. 이 죽일 놈을 용서하십시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아들을 보며 랭턴은 더욱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놈이 이제 연기를 다 하는구나!”
“흑흑! 어머니 죄송합니다. 하늘은 편안하십니까? 이 못난 아들이 아버님에게 또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미친놈이!”
주먹을 쥐어 안면에 한 대 갈겨 버리려던 랭턴의 팔을 부여잡은 카미엘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버님, 요즘 쉽게 피로해지시고 머리가 무겁고 아프시지 않으십니까?”
주먹을 쥐고 씩씩거리던 랭턴은 아들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쩍 그런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흠, 그러고 보니 요즘 그런 현상이 잦아졌지.”
“가끔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손발이 저리고 발이 붓는다던지 어지럽고 귀가 울린다던지.”
곰곰이 되 집어보던 랭턴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데 그걸 잘 아는 놈이 그따위 개도 안 하는 짓거리를 하고 다닌단 말이냐!”
“얼굴이 빨개지고, 눈이 충혈되며, 코피가 자주 난다거나…….”
“아니, 이놈이!”
눈에 핏대를 세우는 랭턴을 보며 카미엘은 혼이 나간 듯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아이고, 아버님이 못난 불효자 때문에 고혈압이 오셨구나! 제가 책임지고 아버님의 병을 낳게 해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카미엘을 보며 랭턴은 다시 뒷목이 뻐근해 오는 것을 느꼈다.
“아아…… 저놈이 또 무슨 헛소리를!”
“아버님! 잠시만 계십시오!”
툭툭툭!
상승하는 혈압이 좁아진 혈관을 통과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재빠르게 점혈을 통하여 좁아진 혈관을 자극함으로써 쌓여 있던 노폐물을 제거하였다.
“오오! 이젠 뒷목이 한결 좋군. 신기한 일이로고!”
“당분간 약주와 기름진 음식을 삼가시지요. 제가 오늘부터 혈압에 좋은 약을 모아 오겠습니다.”
카미엘은 언제 무릎을 꿇었는지 가지런히 손을 모아 공손하게 접은 자세로 일관하였다.
“아무래도 저놈이 어제 맞은 매가 잘못된 것 같군. 헥토르, 저놈을 좀 어떻게 해 주게나.”
헥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자의 상태를 살폈다.
“아니, 주군. 공자님이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실제로 뒷목도 이제는 괜찮으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랭턴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카미엘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들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뭔가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동자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