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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룡왕 1권
1화
프롤로그


여기저기 얼룩진 작은 여관방 한구석.
힘없이 벽에 기대어 앉은 남자의 입에서 한 줄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래된 텔레비전. 먼지 낀 화면 위로 보이는 세상.
“흐. 흐흐.”
웃기면 웃고 화나면 찡그린다. 아주 평면적이다.
“…….”
사람도 세상도 그저 먼 곳을 비추는 평면으로 보인다.
가슴으로 다가오는 게 아무것도 없다.
저들끼리 웃고 있는 개그 프로를 바라보던 남자의 한쪽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으.”
어제보다 또 조금 움츠러들었다.
방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더니, 결국 방 안에서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한 손을 뻗어보지만 리모컨도 그 옆의 소주병도 너무나 멀다.
애써 손을 뻗어 봐도 닿지를 않으니 잡을 수가 없다.
“으으.”
그 무엇도 쥐지 못한 손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와 스스로의 얼굴을 쓸어 만졌다. 까칠한 수염이 손끝에 느껴졌다.
“…….”
수염이 잘 자라지 않는 체질인데도 꽤 자랐다.
1년 정도 면도를 안 한 것 같다. 세수도. 목욕도.
새삼 몸에서 악취가 느껴지지만 금세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다.
우드드득―
형태 없는 무언가가 사방에서 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
이젠 눈을 감고 뜨는 일조차 힘이 든다.
“죽는 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어느 정도 기대마저 든다.
사방을 둘러싼 어둠.
이젠 스스로의 몸조차,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이 그를 둘러쌌다.
결국 이렇게 죽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문득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가―]

내가 널 불렀다고.
내가 널 찾았다고.
하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달싹이는 입을 열어 뭔가 답해 보려 해도 말할 힘이 없던 그는 굳어버린 혀를 애써 움직여 보았지만 마비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누구?’
궁금했지만 곧 그런 마음조차 사라졌다.
아무래도 좋다. 이젠 두려움도 없다.
그때.
마치 그의 생각을 읽는 것인지 목소리가 대답했다.

[강해지고 싶은가?]

‘그런 거 필요 없다.’
생각으로 답하자 한참이나 침묵하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정말로 필요 없는 거냐?]

‘귀찮아. 가버려.’
날 내버려 둬.
이제 아무도 내 곁에 두지 않겠어.
이게 끝이라면. 차라리 지금 이곳이 끝이라면 적어도 더 이상의 아픔은 없겠지. 그러니까 꺼져 버려.
초점마저 흐릿해진 눈동자로 어둠을 노려보며, 사내는 울부짖었다.

[그건 곤란하다.]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한 투로 답했다.

[이미 널 선택했다. 이젠 바꿀 수도 없어.]

“…….”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여전히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를 외면한 채, 사내는 그저 지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아버렸다.
‘정 그렇다면 너의 의지를 내가 갖겠다.’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나 자신을 죽이고 이뤄낸 것. 너만 받아들인다면 그 오만한 신이라 해도 조금쯤은 속일 수 있으리라.]

‘마음을 열고 나를 받아들여라.’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어찌 되든 괜찮지 않은가?’
‘너를 넘겨라. 그 대가로 빛을 주마.’
‘그 무엇보다 찬란한 영광을 주마.’
‘너를 지금 그곳으로 빠뜨린 그 작은 절망이 우스울 만큼의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너를 넘겨라.’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끝없이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도 사내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너를 넘겨라! 너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다급함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에 비로소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빛이 없는 공허한 눈으로 그는 다시금 어둠 한구석을 향했다.

“싫다.”



제1화 드래곤 엠페러 칼 헤이먼


운명에는 우연이 없다.
인간은 어떤 운명을 만나기 전에
벌써 제 스스로 그것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T.W 윌슨―


[또다시 같은 꿈을 꾼 것인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언제쯤 현실을 자각할 것인가.]
“…….”
그와는 무척 오랫동안 대화가 없었다.
무수히 많은 질문과 무수히 많은 침묵.
그것이 그와 자신의 전부였다.
[너를 데려온 지도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칼 헤이먼.
마지막 남은 드래곤 로드의 수좌. 그가 말했다.
[나는 너를 모르겠다.]
“…….”
[영생에 가까운 삶도 싫다. 금은보화도 싫다. 세상을 뒤엎을 힘을 준다고 해도 싫다. 뭘 어쩌라는 거냐?]
“…….”
그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깊은 어둠이 더욱더 깊어진 기분이 든다. 그런 어둠 속에서부터 칼의 목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넌 말할 자격이 있다.]
그 말에, 그 무궁한 시간 동안 열리지 않던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서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행복.”
그가 꺼낸 첫 마디는 행복이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침묵하던 자의 첫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칼이 줄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아니라 행복. 더없이 추상적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모른다.”
짧은 대답이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칼은 나지막이 답하는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이미지를 엿볼 수 있었다. 희미한 사진 속의 가족. 소중한 친구들. 뒤이어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 얼굴은 곧 어둠에 휩싸여 구겨져 버렸다.
[행복에는 힘이 필요하지.]
“…….”
칼의 말에 사내는 다시금 침묵으로 돌아갔다.
[행복을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행복은 얻는 것보다 그것을 잃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니까. 다만 힘을 얻기 위해선 지금 네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칼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칼의 말이 마치 지금 처음 듣고 있는 것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
“진. ……강진.”
[너의 현재를 자각할 수 있겠나?]
“…….”
대답하지 못하는 진을 향해 칼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는 지금의 너 자신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칼의 말에 진은 그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던 고개를 애써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시커먼 암흑뿐이었다.
스스로의 몸조차 보지 못할 만큼 시커먼 공간 안에 웅크려 앉아 있는 자신이 느껴졌다.
자각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자신을 아는 것?
진은 스스로의 짧은 생을 이미 수백 수천 번 돌아보았다.
세뇌와도 같이 반복되는 칼의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도 끝까지 잃지 않았던 자의식은 이미 그의 몸 구석구석, 손가락 마디마디를 세세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집중도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알고 있다.”
심하게 갈라졌던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제 눈을 떠라.]
칼의 말에 진은 그동안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인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분명 두 눈을 온전히 뜨고 있었다.
“어둠뿐이다.”
[그것은 너의 마음속이다. 너를 벗어나 세상을 봐라.]
그러자 갑자기 주변 풍경이 변화했다.
“…….”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순백색이 천지사방을 뒤덮고 있었지만 눈이 부시지 않았다. 웅크린 그의 몸이 온전히 내려다보였다.
앙상한 팔과 다리.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듯한 야윈 몸.
“이게 나인가?”
질문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진은 문득 하늘 한가운데에 나타나 그곳을 가득 채우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아주 거대한 두 눈이었다. 그 눈은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칼 헤이먼이다. 수천 가지 이름이 있지만 내 스스로 정한 이름은 그것이다.]
“알고 있다.”
이미 무수히 반복해서 들어왔던 이름이었다. 굳이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나는 드래곤 로드의 수좌, 드래곤 엠페러 칼 헤이먼이다.]
“알고 있다니까.”
반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칼은 전혀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제야 너와 나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
*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어느 날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긴 대화, 진의 말을 빌리자면 ‘상당히 악의적인 세뇌’를 이어가던 칼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별일이군. 그런 걸 다 묻고.”
진의 얼굴은 처음에 비해 많이 살아나 있었다.
조금은 의아함이 묻어나는 말로 답한 진은 새삼 그동안 마음속에서 수없이 반복해 오던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럭저럭 살았다고는 생각했었는데 막상 떠올리고 보니 연습장 한 쪽도 제대로 채우지 못할 만큼이나 단조롭고 특징 없는 삶이었다.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인생이야.”
[나에 대해선 사소한 것까지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 나도 너에 대해서 알고 싶다.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그렇게 죽게 되었는지.]
칼의 말에 진은 문득 확인 받고자 하는 말투로 물었다.
“나는 죽은 건가?”
[넌 굶어 죽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쯤이면 땅에 묻혀 거름이 되어 있겠지.]
“거름이라. 나쁘지 않군.”
허탈하게 웃던 진은 후우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강진.
강씨 성에 진이라는 외자 이름이다.
진실하게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라는데, 세상을 살다 보니 진실함만으로는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강진.
한글 그대로 인생 전반에 걸쳐 큰 흔들림만이 가득했다.
어렸을 적 새 부인을 얻어 떠난 부친이야 지금은 그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으니 별 감흥 없다고 해도, 그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뒷바라지를 하느라 병든 몸으로 이 일 저 일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고생만 하던 모친의 죽음을 말하려니 다시금 그때의 기분이 떠올라 목 안쪽이 시큰했다.
“뭐. 그 후로는 철저하게 혼자였지.”
어머니의 보험금으로 받았던 돈은 장례절차를 도와주겠다며 찾아왔던 외가 쪽 친척이 그 모르게 대리 수령하고 달아나 버렸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고, 얼마 안 되는 단칸방의 전세금마저 모친이 여기저기에서 빌려 썼던 돈을 갚고 나니 몇 푼 남지 않았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은 제법 괜찮았기에 지방의 평범한 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할 수 있었던 그는 좀 더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해 자원입대, 전역한 후 복학을 준비하던 도중 그녀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