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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철저하게 속았다. 라는 기분 알아?”
문득 칼에게 묻자 잠시 생각하는지 말이 없던 칼은 가만히 답했다.
[속아본 적은 없다. 속는 건 멍청해서 그런 것이다.]
“그래. 멍청해서 그런 거야. 난 너무나도 멍청했지.”
멍청해서.
그게 이유였다.
멍청해서 그녀를 믿었다.
멍청해서 그 남자가 그녀의 친오빠라 믿었다.
멍청해서 그날 그녀의 그 모습이 자신의 친오빠에 의해 억지로 저질러진 일이라는 말을 믿었고, 멍청해서 그를 죽였다는 그녀의 말에 함께 도망치자며 저축해 두었던 장학금과 더불어 복학을 준비하기 위해 공사판을 전전하며 모은 모든 돈을 전부 찾았다.
“멍청했지.”
그렇게 그는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가진 모든 것을 잃고.
[그래서 다 포기하고 그런 곳에서 말라죽었나?]
“멍청했다니까! 인정하잖아?”
[그래서 지금은 멍청하지 않다는 건가?]
칼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진은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특히 약한 부분은 아무리 감추려고 노력해도 감출 수 없지. 오히려 그쪽을 가리느라 다른 부분이 약점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더 이상 그는 처음에 보였던 무기력한 모습이 아니었다.
진은 칼과 수없이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며 처음의 귀찮았던 마음이 바뀌어 조금씩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금세 다시 귀찮아졌지만, 또 때로는 칼의 말에 화를 내기도 하는 등 오래전 접어두었던 감정들을 아주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칼은 그의 생각을 모두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진 또한 칼의 목소리를 통해 그의 감정을 약간이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간절함.
절박함.
분노와 절망.
그리고 한 가닥의 희망.
진의 기분이 칼의 기분이 되고 칼의 의지가 진의 의지와 소통하기 시작했을 때, 진은 처음으로 웅크린 상태의 몸을 움직여 보려 했다.
“…….”
하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 그렇게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선지 아주 조금의 꿈틀거림조차도 행할 수가 없었다.
[의지다. 의지로 몸을 움직여라.]
“그게 안 되니까 문제 아냐.”
투덜거리던 진은 다시금 들려온 칼의 목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널 선택한 것이 바로 그 ‘의지’ 때문이다.]
칼은 의지라는 것을 강조하며 말하고 있었다.
“…….”
[네 의지와 자의식은 나조차도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강하고 견고하다.]
“너무 견고해서 몸까지 굳었나 보지.”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진이었다.
[네 의지는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다. 넌 그 힘을 조금 더 많이 물려받은 인간이다.]
“뭐라는 거야.”
여전히 투덜대던 진이었지만 곧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움직여 일어나고 싶었다.
칼은 그에게 행복을 주겠다고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게 새로운 삶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움직여야 했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구겨진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던 진의 두 어깨에서 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천히 두 팔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뒤이어 잔뜩 굽혀 가슴 앞에 모으고 있던 두 다리가 서서히 곧게 펴졌다.
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지금 상당한 고통을 느끼는 중이었다.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던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 수반되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스스로 일어섰다.
자신의 앙상한 두 다리를 내려다보며 서 있던 진은 후우 긴 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제자리걸음을 시작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칼의 눈이 고개를 끄덕이듯 두어 번 깜빡였다.
[이제 시작해도 되겠군.]
“응? 뭘.”
갸웃하며 올려다보던 진은 문득 푸슥, 하고 솟아오르는 무언가에 의해 관통된 자신의 오른발. 그 발등 위로 불쑥 솟은 하얀색의 뾰족한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뒤늦게 비명을 토해냈다.
“끄아아악―!”

*
*
*

“어헉, 허억.”
왼발에서 한 치도 되지 않는 땅에서 솟아오른 날카로운 바늘.
대략 10센티미터가량 되는 그것은 바늘보다 송곳에 가까울 만큼 굵고 긴, 정말 끔찍한 느낌의 것이었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이나 찔려 보았기에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단지 진짜가 아닐 뿐 그 느낌은 진짜와 동일하기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여 열심히 피하고 있는 진이었다.
진은 잠을 자지 않는다.
아마도 이곳으로 불려온 이후부터일 것이다.
때때로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옛 기억이 꿈일까 했지만, 그것은 꿈이 아닌, 여전히 그를 얽어매고 있는 마음속의 굴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죽기 전에도 잠은 별로 못 잤던 터라 별 상관없다 생각했던 진이었지만 하루 24시간을 온전하게 사용하는 일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 될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푸슥!
“으으!”
딛고 있는 바닥도, 주변과 하늘도 온통 새하얀 공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죽일 놈의 두 눈깔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헉!”
그의 옆구리를 노리고 허공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꼬챙이를 피하기 위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던 진은 퍼뜩 놀라 앞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푸슥. 푸슥.
그가 물러서려 했던 곳에서 서너 개의 바늘이 불쑥 튀어나왔다.
“…….”
인식하고 피한 것이 아니었다. 꼬챙이 공격은 철저하게 같은 곳에서 순서대로 반복되고 있었기에 이제는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쳤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 고통 따위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라며 억지로나마 태연을 가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지금 진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발을 움직이고, 허리를 뒤틀고, 데굴데굴 구르거나 펄쩍 뛰고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고통에 적응할 수는 없다.
고통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적응이 아닌 체념이다.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당장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단순한 환상이 아닌 모든 감각이 살아 있는 환상이라 죽을 만큼 아파도 죽지는 않는다면 말이 달라진다. 죽지 않는다면 체념조차 할 수 없다.
길이 1미터, 굵기 10센티미터가량의 꼬챙이에 꿰뚫리는 기분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진의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칼은 언제나처럼 자기 할 말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모두가 고고하고 현명하지만은 않다.]
다시금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쉴 새 없이 발악하며 바닥과 허공을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는 바늘과 꼬챙이를 피하는 동안 또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갔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칼 혼자만 떠들고 진은 그저 아래에서 반복되는 꼬챙이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이젠 곧잘 대답도 하고 때로는 질문도 하는 등 상당한 여유를 갖게 된 것이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던 공격은 어느 때를 기점으로 순간순간 변칙적인 공격을 섞거나, 아예 규칙을 벗어난 위치에서 공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공격 패턴을 읽게 된 것에서 더 나아가 몸놀림 자체가 빨라지고 민첩해진 진은 몇 번의 시행착오 이후엔 그럭저럭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서너 개의 꼬챙이를 쉽게 피해내기 시작했다.
다시금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단순히 회피 동작에 급급하던 진의 몸놀림이 일정한 규칙을 갖기 시작했다.
더불어 꼬챙이 공격 역시 미세해지고 속도가 빨라졌지만, 이미 그 동작의 묘리를 깨우친 진에게 있어 그것은 일정한 법칙 안에서의 변칙 공격일 뿐이었다.
[1,300년쯤 전이었던가. 유희 중에 만났던 이계인에게서 배운 보법이다. 흑영보(黑影步)라는 보법이지. 나 역시 그런 식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배웠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법도 이 방법뿐이다. 용케 묘리를 깨우쳤군.]
칼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꼬챙이 공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젠 도합 백여 개가 넘는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가 바닥을 거의 가득 메우며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지만 발 하나 들어가기 아슬아슬한 부분을 용케 파악하고 발을 내딛는 진이었다.
신기한 것은 조금 전부터, 정확히 칼이 ‘묘리를 깨우쳤군.’ 하고 말하던 시점부터 진의 몸짓에 검은 기운이 서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주변 공간이 순백색이었기에 명확하게 드러난 그 기운은 마치 수백 수천 개의 꼬리처럼, 말미잘의 촉수처럼 진의 등 뒤에서부터 스르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흑영보는 세 가지 경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네가 지금 도달한 경지로, 시전자의 몸 뒤로 촉수와도 같은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이지. 이것은 눈에만 보일 뿐 별다른 힘은 발휘할 수 없다. 단지 그런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지. 하지만 앞으로 이어질 두 단계는 무척 달라. 다음 단계는 지금의 검은 기운이 좀 더 구체화되어 검은 잔상으로 화하는 경지다. 그 단계에 이르면 너는 평소의 두 배 속도로 달릴 수 있고, 한 걸음에 보통 사람의 대여섯 걸음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할 수 있지.]
“마지막 경지는?”
진의 물음에 흠, 하는 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지막 경지는 도달하기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지금 네가 도달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의 노력을 수백 배 더 해야 가능하거나, 혹은 그만큼의 큰 깨달음을 얻어야 가능하지. 그 경지에서는 잔상과 같은 검은 기운도, 촉수와 같은 아지랑이도 사라진다. 아예 사라지는 거지. 게다가 그림자조차 사라진다. 아무도 너의 기척을 느낄 수 없는 그저 어둠이 되는 것. 그것이 흑영보의 궁극 단계다. 그때에는 비로소 빠름과 느림의 구분도 필요하지 않은 어둠 자체가 될 수 있다.]
진은 자신의 걸음걸음에서부터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진에게 있어 이곳에서 겪은 모든 것들은 환상이라 치부해도 괜찮을 만큼 허황된 것. 하지만 꼬챙이에서 느껴지는 고통만큼은 진짜였다. 게다가 아무리 찔려도 피가 나오거나 죽지 않으니 그저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칼은 다시금 교육을 이어갔다.
오늘 그의 강의는 유희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희라는 건 단순한 일탈이나 장난이 아니다. 드래곤 역시 태어난 후 일정 기간은 그 부모에게 대략적인 지식을 전수 받지만, 모든 것을 다 얻지는 못해. 적당한 지식을 전해주고 나면 부모는 떠난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을 혼자서 익혀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희를 하는 건가?”
[그런 목적이 크지. 직접 세상을 겪는 것이다. 때로는 벌레로도 살아보고, 때로는 인간으로도 살아보고,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의 유희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종의 생각이나 철학, 지식을 얻어 나의 것으로 합쳐 나가는 것이다.]
“따분하겠군.”
등을 노리고 뻗어오는 꼬챙이를 가볍게 피하며 말하자 칼의 눈이 살짝 휘어져 웃음 지었지만, 이미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은 지 오래된 진은 그의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럭저럭 재미는 있다. 어차피 가짜라는 자각이 있으니 위험할 땐 그만두면 되니까. 물론 깊이 빠져들어 자신이 드래곤임을 잊고 엉뚱하게 죽는 놈들도 가끔 있지. 그래. 너의 지식을 빌어 말하자면 아마 게임이라는 걸 할 때와 비슷한 것 같군.]
“그건 됐고. 그동안 세상에 대해선 대충 들은 것 같으니 이제 본론을 말해봐. 어째서 나를 데려온 건지.”
진의 말에 칼은 다시금 진지한 눈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먼 옛날. 블러디 드래곤, 너희들의 말로 하자면 피의 용, 혈룡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두 눈은 기억을 더듬어가듯 조금 멍해졌다.
[그는 드래곤 로드 중 하나였지. 그날은 로드들의 회합이었어.]
그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드래곤들은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져 세상에 대해 말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드래곤의 로드들 역시 각 종족의 수장답게 별도로 자리를 가져 각종 현안에 대해 토론하거나 각 드래곤들 사이의 마찰을 중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귀족, 혹은 한 나라의 국왕과도 같은 것.
그런 로드들 가운데서 5백 년에 한 번 로드 중의 로드, 드래곤 엠페러를 선출하게 되는데, 그날이 바로 엠페러의 선출 일이었다.
엠페러의 선출 방법은 간단하다.
인위적으로 만든 환상의 공간 안에서 결투를 벌여 마지막에 남은 자가 수좌를 차지하는 것.
[한데 그날은 이전과 달랐지. 그가 가장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탓일까? 그 잘났다는 드래곤 로드들이 시기심을 갖고 있었을 줄이야.]
각 종족을 대표하는 12명의 드래곤 로드 중 11명이 한 로드를 합공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 위력은 드래곤 로드들이 힘을 합쳐 만든 환상 공간이 뒤흔들릴 정도로 강력했다. 환상 공간이기에 육체적인 타격은 없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다른 모든 로드들의 질시 어린 견제와 공격을 받게 된 한 로드가 격노하여 본신의 능력을 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