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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날 열한 명의 드래곤 로드가 죽고 말았다. 로드들의 회합 장소는 완전히 파괴되었지.]
다른 로드를 모두 죽이고 살아남은 드래곤 로드.
로드들이 모두 죽은 이상 그를 막을 수 있는 드래곤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드래곤 엠페러라 칭했지만, 다른 모든 드래곤들은 그를 혈룡이라 부르며 로드들을 죽인 죄를 물어 합공을 결행했다.
하지만 그의 힘은 정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모든 드래곤의 합공에도 불구하고 죽이는 데엔 실패. 그저 변방의 오지에 봉인해 두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그 혈룡이라는 자에게 죽은 로드가 너의 선친이라도 되나? 그 복수를 하고 싶은 건가?”
진의 물음에 칼은 그 거대한 눈을 깜박이며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마룡에 대해서 말해주었던가?]
“카락슈탈?”
그동안 칼에게서 수도 없이 들어온 이름이었다.
[그래. 마룡 카락슈탈. 그는 사실 블랙일족이었지.]
칼은 다시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단순히 겉핥기식으로 이야기해 주었던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진은 여전히 계속되는 꼬챙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보법을 행하면서도 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계라는 곳이 있다고 이야기했었지.]
“그래.”
[그곳은 신이 만든 쓰레기통. 만들다 만 실패작과 미친 자들을 모아놓는 세계.]
그때까지만 해도 드래곤 종족은 모두 열둘로 나뉘어 있었다.
골드, 실버, 화이트, 블랙, 레드, 그린, 블루 등등 각 색상과 성질, 사는 곳으로 나뉜 그들은 그 생김새만큼이나 갖고 있는 능력들 역시 제각각이었다.
그런 드래곤들 가운데서도 가장 특이하고, 어찌 보면 가장 이질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던 종족이 바로 블랙이었다.
블랙드래곤 일족은 그들의 비늘 색 만큼이나 사납고 암울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던 데다가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마기, 즉 마계의 기운을 느끼고 사용할 수 있었다.
은연중에 다른 종족이 블랙드래곤 종족을 배척하거나 멀리 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다른 종족과 달리 블랙드래곤은 중간계에 어울리지 않는 능력과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이 잘못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카락슈탈이라는 이름의 흑룡이 마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혈룡에 의해 기존의 로드가 죽고 난 후라 새로 블랙드래곤의 로드 자리에 오르게 된 그는 용들의 회합이 있던 날, 스스로가 가진 마기에 물들어 버렸는지 동족들을 모조리 몰살시키고 그대로 다른 드래곤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카락슈탈의 힘은 너무나 강대했다.
어쩌면 혈룡보다도 강할지 몰랐다.
그의 브레스와 마법에 수많은 종족들이 멸족을 당했다.
살아남은 종족은 화이트, 블루, 레드, 골드일족 뿐. 그 외의 모든 드래곤들이 모조리 죽어버렸다.
간신히 마계로 추방할 수 있었지만 피해가 너무나 컸다. 죽은 이들을 애도할 여유가 없을 만큼 살아남은 이들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드래곤이라는 종 자체의 위기였지. 사실 그전에 벌어진 로드들의 죽음만 아니었어도 그를 상대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가장 강했던 이들이 죽어 없었고, 또 그 이후 혈룡을 봉인하는 데에 막대한 힘을 소모했던 터라 그를 막을 힘이 부족했던 거지.]
“왜 동족들을 죽였지?”
불만이 있어 다른 종족을 공격했다면 그럭저럭 이해는 해볼 수 있겠지만 같은 블랙 일족을 모두 죽였다는 건 진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블랙드래곤의 고유 능력 중 마기를 흡수할 수 있는 ‘앱서브(Absorb)’라는 것이 있다. 마기는 마계의 것이지. 그래서 중간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기도 하고.]
“동족의 힘을 흡수했다는 건가?”
[아마도 그랬을 테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약해진 이들이라 해도 그리 쉽게 죽임을 당하진 않았을 거야.]
여전히 온몸을 움직이던 가운데서도 뭔가를 생각하던 진은 문득 아주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물었다.
“너는 누구에게 복수할 생각이지?”
혈룡의 이야기도, 마룡의 이야기도 결국은 별 관계없는 이야기라 생각하는 진이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칼은 문득 끄덕이며 답했다.
[내 복수의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이라고?”
진은 방금 들은 말을 의심했다.
위대한 드래곤 로드의 수장, 드래곤 엠페러라던 칼이 복수하고 싶은 대상이 마왕이나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니. 황당해서 웃음마저 나오려고 했다.
[혈룡과 마룡의 이야기는 앞으로 하게 될 이야기를 위해서였다.]
또다시 시작된 칼의 이야기는 블랙드래곤 카락슈탈이 마계로 추방되고, 마룡이라 불리게 된 이후 대략 천 년이 지난 상황의 일이었다.
[마룡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을 만든 신의 탓이라 여겼지. 그래서 그 신이 축복을 내리는 중간계를 없애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마계의 준동.
그것은 어느 미친 마법사의 소환술 실패 따위가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마룡의 힘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마계는 그야말로 마룡을 위한 세계.
그 안에서 온갖 마수들을 잡아먹고, 마기를 흡수해 힘을 모으던 마룡은 어느 날 갑자기 중간계에 게이트를 열어 마계의 존재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이들은 역시나 약해 빠진, 하지만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던 인간들이었다. 대륙 북부에서부터 시커먼 기운을 일으키며 내려오는 마계의 존재들에 휩쓸려 죽어가는 인간들의 비명이 밤에도 낮에도 끊이질 않았다.
결국 남의 일이 아니라 판단한 각 종족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연합체를 구성한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기나긴 싸움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중간계의 승리였지. 마계란 아까도 말했듯 그저 실패작들이나 미친 존재들을 버리는 쓰레기장과 같은 곳. 마신이나 마왕 같은 건 그곳에 존재하지 않아.]
그들을 이끌던 건 마룡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마룡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혈룡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했더라?]
“봉인되었다. 까지.”
진의 대답에 칼은 음, 하며 말을 이었다.
[혈룡의 이름이 칼 헤이먼이라는 건 아직 말 안 했던 것 같군.]
“응?”
깜짝 놀라 새로 튀어나온 꼬챙이를 피하지 못할 뻔했던 진은 서둘러 몸을 움직여 간신히 살짝 스친 정도로 그쳤다.
[그래. 내가 바로 혈룡 칼 헤이먼. 모든 로드를 죽이고 로드 오브 로드, 드래곤 엠페러의 자리에 오른 존재였다.]
“…….”
그가 엠페러라고 했을 때는 그저 후손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진이었기에 무척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천 년이 넘도록 오지에 봉인되어 있는 동안 나 역시 힘을 모으며 언젠간 세상으로 돌아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마룡이 그런 일을 벌이게 되었던 거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은 칼에게도 성장의 시간이었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정령들을 통해 전해 들었고 그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조차 살지 않는 동토의 척박한 땅 한곳에 레어를 짓기 시작했다.
[마계의 족속들은 공교롭게도 나의 땅을 거쳐 가고 있었지. 마룡 역시 마찬가지였고, 난 녀석을 붙잡았다.]
동족들을 잡아먹고, 천 년간 마계의 힘을 먹어치웠다고 해도 전대의 로드들을 혼자서 몰살시킨 그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객관적으로 따져보자면 얼추 비슷했을 거야. 다만 나에겐 봉인의 힘이 있었지. 모든 드래곤들의 힘이 집약된 봉인의 힘 말이야. 나를 봉인했던 그 힘을 이용한 나는 나를 매개로 녀석까지 봉인해 버렸다.]
천 년을 준비해 왔던 것치고는 슬플 만큼이나 허탈한 최후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인간들이었어. 인간은 배신의 동물이지.]
마계의 준동 때문에 수백 년이나 피로 얼룩져 있던 중간계의 각 종족 대표는 대륙 곳곳에 대단위 마법진을 구축, 마계의 존재들을 약화시킬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을 결의했다.
차후 또다시 마계의 족속들이 중간계를 밟더라도 그 힘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자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계획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15개의 소마법진과 그것에 마나를 공급하는 대마법진 하나로 구성된 마계 대응 마법진은 대륙의 북부, 중부, 남부를 나눠 각각 세 곳에 설치되었지만 각 종족들이 힘을 모았음에도 3백 년 이상이 걸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다.
어둠의 힘을 누그러뜨리는 힘, 즉 ‘빛의 가호’라는 뜻으로 ‘샤룬드 아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법진.
수백 년 동안 이루어진 공사가 완료된 날부터 그것을 발동시키기 전 일주일 동안 대륙의 모든 종족들이 하나가 되어 축제를 벌였다.
하지만 축제 마지막 날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배신을 했다고?”
[인간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샤룬드 아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교묘히 바꿀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었던 거지.]
한창 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마지막 날,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에 의해 대륙 세 곳의 샤룬드 아인이 모두 발동된 것이다.
[대마법진이 발동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소마법진들이 발동되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성급한 이들이 자신의 손으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해 보고자 치기를 부린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것은 곧바로 드러났다.
대륙에 있는 모든 종족들이 약해진 것이다.
[인간이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들이 약화된 것이다. 샤룬드 아인의 효과를 ‘인간이 아닌 모든 종족의 약화’로 바꾸어 버린 거지.]
“그게 가능해?”
[인간은 머리가 좋다. 유희하는 드래곤들이 대부분 인간들의 삶을 누리는 건 단순한 이유가 아니야. 그들의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짧은 수명 대신 지식과 번식력을 얻었다.]
문득 꼬챙이 공격이 멈춘 것을 알게 된 진이었지만 긴장을 풀진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멈췄다가 예고도 없이 재개한 적이 수없이 많았던 탓이다.
[그 중심에 제국이 있었다.]
“제국이라. 인간의 제국이겠지?”
대답할 것도 없다는 듯 칼은 가만히 말을 이었다.
[데이카르트 제국. 샤룬드 아인의 힘을 변질시킨 후, 타 종족을 사냥하고 핍박하기 시작한 곳이다.]
“얼마나 약해졌는데?”
가만히 묻던 진은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르는 꼬챙이에도 놀라지 않고 다시금 보법을 이어가며 대답을 기다렸다.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본신으로 돌아갈 마나가 없어 그 상태로 싸우다 죽을 만큼 약해졌다.]
“엄청나군.”
잘은 모르겠지만 듣기만 해도 어느 정도는 상상이 되었다.
[드래곤만이 아니다. 엘프도, 드워프도, 자이언트도, 여타 유사 인종들도 인간들에게 사냥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아니, 아무리 약해져도 그렇지. 애초에 인간이 그렇게 강한 종족이 아니잖아?”
[물론 인간은 약하지만 지식과 숫자가 있다. 그들은 무리를 이루어 소수의 이종족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죽는 인간들도 무척 많았지만 그만큼 새로 태어나 채워졌지.]
인간인 진의 기준으로는 그 이야기가 그리 쉽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칼은 드래곤이었다. 그 수명으로 보자면 인간의 수명 정도는 찰나에 불과할 테니 금방 죽고 금방 태어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했던가?]
칼의 물음에 진은 보법을 행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같은 질문을 받아도 마찬가지로 대답할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행복이다. 행복해지고 싶다.
지난 생에서의 그는 너무나 멍청했다.
잃어버린 무언가에 얽매여 잃어버리지 않아도 될 더 큰 것마저 잃게 되었다. 그녀에게 얽매여 정작 자신의 인생과 미래를 잃게 된 것이다.
“근데 행복하고 이 흑영보인지 뭔지 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관계없다.]
“이런, 썅?”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욕이 튀어나왔지만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행복은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너도 지금은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나가게 될 세상은 네가 죽은 세상과는 많이 다르다. 힘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하다. 나는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 줄 것이고, 내가 가르쳐 주는 것들은 네가 새로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더 많은 행복을 얻고 지켜내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
“단순히 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고?”
[그 말 역시 틀리지 않다. 네가 강해야 나의 복수를 해줄 테니까. 하지만 사실 나의 복수가 아니다. 나는 그저 내 과오를 조금이나마 반성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