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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칼은 그 모든 것들, 이종족들이 인간의 핍박을 받게 된 일의 시초는 결국 그가 다른 로드들을 죽였던 그 일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다.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참았다면 마룡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테고 마계의 준동도, 인간들의 배신도 없었겠지.]
칼의 말에 진은 문득 그와 자신의 무언가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되새기며 후회하고 있다는 것. 바로잡고 싶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칼과 진의 닮은 점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보법 하나로 제국을 무너뜨릴 순 없잖아.”
모든 일에는 필요한 것들이 있다.
제국이라면 무척 거대할 것이다. 거대한 집단을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의 무력이 아니라 그것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역량, 즉 재력과 군사력이다.
“여기서 나가면 레어인가?”
진은 처음으로 이곳에서 나간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에 조금은 호기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 하지만 너는 알을 깨기 전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한다.]
“무엇을?”
[너의 정체성. 인간이 될 것인지, 드래곤이 될 것인지.]
칼의 말에 진은 앞으로 훌쩍 뛰어 십여 개의 바늘을 피해내고 난 후 물었다.
“선택해야 알을 깨고 나갈 수 있다는 건가?”
[이미 마룡의 영혼은 내 육신을 제물로 소멸시켰다. 남은 것은 너의 의지다. 스스로 인간임을 택한다면 너는 알을 깨지 못한다. 네가 인간이 아님을 제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온전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면 약해진다며?”
진의 물음에 칼은 이미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쉼 없이 말했다.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이계의 의지를 불러온 것이다. 바로 너 말이다. 너는 그 마법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이계의 존재는 샤룬드 아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일까? 진은 문득 지금 그가 행하고 있는 보법을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계인들이 많이 있는 건가? 이 보법도 그렇고. 굳이 새로 불러올 필요도 없는 것 아냐?”
[평균적으로 천 년에 한 명 정도 건너온다고 알고 있다. 신의 장난이거나, 신에 준하는 능력을 가진 나와 같은 존재가 불러오는 것이다. 내가 만난 이계인은 세 명이었다. 셋 다 나에게 죽었다.]
“…….”
[드래곤의 의무 중 하나는 균형이다.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 흐름을 깨는 존재를 없애야 했다.]
“나 역시 흐름을 깨는 존재일 텐데?”
[지금은 이미 균형이 지나치게 기울어진 상태다. 올바르게 바로잡기 위해선 반대쪽을 누를 수밖에 없다.]
“인간을 벌하기 위해 인간을 부르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아무리 이쪽으로 건너온 그가 얻게 될 육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는 그에게 인간을 공격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은 다시 생각했다. 그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행복이라는 게 무엇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으로 나가야 얻을 수 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마룡의 알이라고 했다.
마룡의 영혼을 소멸시키고 그 육신을 알로 만들어 이계의 영혼, 즉 진을 불러와 그 안에 심은 것이다. 알을 깨고 나가게 되면 마룡의 몸을 얻을 수밖에 없을 터. 영혼이 아무리 인간이어도 육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강진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 칼은 역시 그가 죽인 이계인에게서 배운 거라며 이상한 검법이나 권법, 각법 따위를 보법과 별 차이가 없는 끔찍한 방법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신검법(二身劍法)이라는 것이다. 궁극의 속도를 갖추어 마치 두 사람이 된 것 같은 검속을 자랑하는 검법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남들 한 번 휘두를 때 두 번 휘두를 수 있는 쾌검이다.]
“젠장, 필요 없다니까!”
허공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 수많은 꼬챙이들에 기겁한 진은 흑영보를 밟으며 피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새파랗게 죽어 있었다.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찔렸던 터라 죽어도 골백번은 더 죽었을 고통을 겪었음에도 미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몸이 빨라지면 검은 자연히 빨라지겠지.]
“그러니까 이게 행복이랑 무슨 관계냐고!”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이런, 썅!”



제2화 알을 깨고 나와 보니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그리고 살아 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롱펠로―



드드드드…….
거대한 공동 한구석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 외엔 어떤 기척도 없었다. 그저 아주 커다란 북 위에 좁쌀이 우수수 떨어지듯 미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공동의 구석, 입구조차 없는 큼직한 창고 안에서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돌멩이일까? 돌멩이치고는 너무 크다.
대략 성인 남성의 허리 근처까지 올라올 만큼 커다란 그것은 얼핏 보아선 계란을 연상시키는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누가 그것을 계란이라 하겠는가? 타조 알 할아버지라고 해도 안 믿을 만큼 거대하다.
마치 그 안에 있는 무언가가 바깥으로 나오려 애를 쓰는 듯 바로 그 커다란 돌이 낮게 흔들리며 땅을 울리고 있었다.
덜컹. 쿠덩텅―!
세로로 잘 서 있던 그것은 계속된 흔들림에 결국 균형을 잃고 넘어지더니 곧장 옆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창고 안에 있던 각종 잡동사니들, 용도를 알 수 없는 쇠붙이나 칼, 갑옷 따위에 이리저리 부닥치고 다니던 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채기 하나 생겨남이 없이 그저 창고 한구석에 처박혀 흔들거림을 이어갈 뿐이었다.
우지직―!
그때였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돌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곧이어 더욱 크고 명확한 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돌 한쪽에 쩍쩍 금이 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그것이 지금 깨어나는 모양이었다.
퍼석.
거미줄처럼 쩍쩍 금이 가던 돌은 어느 순간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 안에서 일렁이며 퍼져 나온 것은 시커먼 암흑의 기운이었다.
갈라진 틈새로 빠져나와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리던 검은 기운은 조금씩 공기 중으로 녹아들 듯 사라져 버리고, 뒤이어 그 안에서 빛을 발한 것은 누군가의 두 눈이었다.
이윽고 빛나던 두 눈은 적응이 잘 안 되는지 좌우로 살짝 흔들리더니 이내 천천히 또박또박 주문을 외우듯 무언가를 말했다.
“앱퍼으흐.”
나지막한, 조금은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잠시 동안 고요함이 이어졌다.
“앱퍼으흐.”
목소리의 주인은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조금씩 가라앉던 검은 기운이 온전히 사라지고 난 후 드러난 얼굴. 그것은 다름 아닌 갓 태어난 아기의 그것이었다.
그 아기는 깨고 나왔던 돌 껍질에 두 손바닥을 대고 연거푸 ‘앱퍼으흐’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이내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 아기는 갓 태어나 천사 같다는 소리를 들어도 모자랄 얼굴에 지옥의 화신이 와도 울고 갈 법한 분노를 담으며 창고가 떠나갈 듯 소리쳤다.
“히, 히바암―!”

*
*
*

칼은 없다.
그는 마룡 알껍질을 매개로 존재하고 있었기에 그걸 깨고 나온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소멸된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칼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일까. 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알을 깨기 직전까지도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했다. 칼은 인간성을 버리지 못하면 알을 깰 수 없을 거라 했었다.
“히밤.”
어쩐지 앱서브 발음이 샐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이가 없는데 발음이 제대로 될 턱이 있나. 욕설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없는 신세다.
원래대로라면, 수없이 생각하고 생각했던 계획대로라면 알을 깨고 나와서 곧바로 깨진 마룡의 알껍질을 칼이 알려준 마기 흡수 주문 ‘앱서브’로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 이후에 칼의 안배에 따라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
복수를 부탁받았다.
그는 이미 지난 세상에서는 죽고 없는 사람이다.
새 출발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어느 정도의 대리 복수는 해주어야 도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요구였다.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족의 씨를 말려 버리라니. 그게 쉽나?
인간 모두를 죽여 없애라는 게 아니니 다행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서도 ‘능력껏 복수해 주겠다.’라고 대답하기까지 상당히 큰 결심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기라니, 이런 빌어먹을.
알을 깨고 태어났으니 당연히 아기가 되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이럴 거면 무엇 하러 검술이고 뭐고 죽일 기세로 가르쳤는가?
어차피 아기가 될 텐데 말이다.
꼬르륵.
분노에 이어 느낀 감정은 갈등과 고민이었지만 이 역시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허기진 배였다.
꼬르르륵.
“…….”
주위를 돌아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이렇게 눈을 제대로 뜨고 주위를 돌아보는 것도 신기한 일이겠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당장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면 수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 엠페러도, 그에게 당해 영혼을 잃고 육신을 제공해 준 마룡도, 이계에서 부름을 받고 넘어온 영혼도 아무 소용없다. 그냥 죽는 거다. 굶어죽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여관방에서 굶어 죽었다.
경우야 조금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아무래도 굶어 죽을 운명인가보다.
“아히야.”
그래. 아니다.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시작부터 포기할 수는 없다.
알베르 까뮈가 그랬다던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반항하며 죽어야겠다.’라고 말이다. 그 말이 옳다. 반항이라도 해봐야 한다.
진은 익숙하지 않은 몸을 애써 움직여 깨진 알껍질 사이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으으.”
당장은 팔을 펴거나 허리를 세울 수도 없어 그저 낮은 포복으로 바닥을 쓸고 다니며 찔끔찔끔 전진하는 게 고작이었다.
맨 피부로 느껴지는 돌바닥의 차가움과 문득 문득 살을 쓸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돌 때문에 아프고 힘겨웠지만 애써 참고 전진을 이어갔다.
어쩌면 칼 역시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면 진짜 나쁜 놈이다. 몰라야 했다.
“흐, 흐기엉보…….”
그놈의 흑영보도 두 다리로 온전히 설 수 있어야 펼칠 수 있다. 칼이 가르쳐 준 것들 중 지금 써먹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쿠당탕탕―!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그저 잔뜩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는 것뿐이다.
“……!”
잠시 후 눈을 떠보니 사방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주위에 늘어져 있던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알껍질 때문에 쓰러져 창고 입구를 막아버린 것이다.
“으아.”
죽는다. 이건 진짜 죽을 수밖에 없다.
진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 엉엉 울고 말았지만 곧 울음을 그치고 다시금 엎드린 자세로 돌아왔다.
눈물도 체력이다. 낭비하면 그만큼 일찍 죽는다.
창대나 검 따위가 창고의 넓은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완전히 막힌 줄 알았었지만 자세히 보니 틈이 조금 보이는 것도 같았다.
창고에 문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문이 있고 손잡이가 있다면? 생각만 해도 암울했다.
“후우. 후우.”
레어의 구조에 대해선 세뇌에 가까울 만큼 자세히 설명 받았다.
그의 자의식이 강했던 탓인지 지식 전수 마법을 행할 수 없던 칼이었기에 반복 설명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배워두었다.
아마도 이 앞은 중앙 공동일 것이다.
칼이 본신이었을 때, 잠버릇이 심했던 탓에 편하게 누워 데굴데굴 구르며 잘 수 있도록 넓게 만들었다고 했으니 대략……. 거기까지 생각하던 진은 생각을 멈추고 묵묵히 기기 시작했다.
이곳을 나가야 한다.
분명 공동 북쪽이 식량 창고라고 했었다. 보존 마법이 걸린 음식들이니 그가 알 속에서 수십 년 썩다 나왔다 쳐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은 이곳을 틀어막고 있는 이 잡동사니들을 어떻게 치우느냐가 관건이다.
“끄응.”
다시금 애벌레처럼 기어가기 시작한 진은 이내 창고 앞을 막은 잡동사니들을 하나하나 치우는 것이 아니라 아까 전 보았던, 그 아래에 있는 작은 틈새로 몸을 들이밀고 꿈틀꿈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창고를 벗어나는 데 소모된 시간은 짐작 상으로 대략 대여섯 시간. 겨우 그 정도를 움직이는 데에도 모든 힘이 소진된 듯 창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축 늘어져 잠들어 버린 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