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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며칠째 똑같은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기어가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과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
공동의 절반도 오지 못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좋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뭐라도 먹고 싶다.
“…….”
욕을 할 기운도 없었다. 이놈의 레어에는 가디언 하나 없는 모양이다.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진의 눈에 순간 포착된 것이 있었다.
그의 눈앞을 기어가고 있는 까맣고 조그만 생물.
주르륵. 군침이 흘러내렸다.
알을 깨고 나왔을 때도 확신은 별로 없었지만, 이 경우를 보니 왠지 스스로가 인간임을 포기한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퀴벌레를 보고 군침을 흘리다니.
하지만 지금으로선 잡을 수도 없다. 갓난아기가, 게다가 지친 아기가 저 재빠른 바퀴벌레를 무슨 수로 잡는다는 말인가.
힘없이 바라보고 있던 진은 문득 그의 주위를 맴돌던 바퀴벌레가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축 늘어진 그의 손바닥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으지직.
그럴 만한 힘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강하게 쥔 손에 의해 자그마한 바퀴벌레는 그저 잡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으스러져 죽어버렸다.
“…….”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전혀 갖지 않았다.
허겁지겁 그 체액을 핥고 바스락거리는 몸체와 다리를 입에 넣었다.
그나마 다행이게도 역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딱딱한 몸체와 다리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가 없다는 건 이렇게 불편한 일이었다. 애써 잇몸으로나마 꾹꾹 다져보았지만 오히려 잇몸에 상처가 나는지 아프기만 했다.
“……?”
그때였다.
뿌직, 하는 느낌인지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감촉이 전해져 오더니 그곳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입안을 휘도는 동안 갑자기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우극, 끄우…….”
이런 아기의 몸으로 버텨낼 수 있을 수준의 고통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칼의 꼬챙이와 더불어 각종 수련에 시달리며 어지간한 고통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이번 것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압축기로 쥐어짜는 느낌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엄청났다.
그래도 처음 입에 넣은 음식물을 뱉어낼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신음이 새어 나오는 입술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고통은 길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면 찰나라고 할 만큼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진 고통 이후,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스르르 파고드는 것은 유형의 힘도, 정신을 장악하기 위한 무언가도 아닌 누군가의 기억, 그 조각들이었다.
처음의 기억은 어느 작고 부드러운 손에 쥐어져 으깨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으로 그가 느낀 고통이 바로 자신이 쥐어 죽인 바퀴벌레의 것을 넘겨받은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 고통이 자신에게 전이되는지 알 수 없어 의아해하던 진은 뒤이어 전해져 오는 기억들, 정확히는 그가 죽이고 흡수한 바퀴벌레의 기억을 받아들이며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
그가 잡아먹은 바퀴벌레는 단순한 벌레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진에게 육신을 넘겨준 마룡 카락슈탈. 그가 칼에 의해 영혼이 소멸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아주 작은 파편이 근처에 있던 바퀴벌레의 몸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죽는 순간부터 역방향으로 진행되는 삶의 기억들은 대부분 레어 곳곳을 돌아다니며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거나 칼이 남겨둔 식량 창고의 빵을 갉아먹는 등의 생존 활동이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아주 조금씩 강해지고 있던 그것은 바퀴벌레가 아닌 마수(魔獸)였다.
카락슈탈의 영혼 파편이 보통의 바퀴벌레를 마기를 가진 마수로 변이시킨 것이다.
“하아, 하아.”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던 진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폭풍처럼 파고든 기억의 파노라마, 그 여운을 즐기듯 가만히 숨을 골랐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무수한 세월의 기억이 고스란히 그의 것으로 흡수되었다. 그것은 마룡의 능력. 바퀴벌레 마수가 가만히 그의 손에 죽어준 것은 그가 다름 아닌 마룡의 몸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칼은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삼아 마룡의 영혼을 소멸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파편 하나가 떨어져 나와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주변을 지나던 바퀴벌레에 스며들어 마수로 변이시켰다.
마룡의 영혼 일부가 스며든 바퀴벌레는 그 모양새가 일반적인 바퀴벌레와 같지만 마기를 사용할 수 있고, 마기를 쌓을 수 있으며 마수에 걸맞은 능력을 지닌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 마수가 한낱 갓난아기의 손에 부서진 것은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에 깃들어 있던 영혼은 마룡 카락슈탈의 것이었지만 이미 대부분이 소멸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찌꺼기였기에 제대로 된 의지나 지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레어에 나타난 새로운 생명체에게서 마기가 느껴진 것이다. 단순한 마기가 아닌, 자신과 하나라고 느껴지는 그 무언가를 말이다.
본능처럼 그 주변을 맴돌던 마수는 그 손바닥 위에 올랐다가 붙잡히게 되었지만 달아나지 않고 그대로 으깨졌다.
그것은 갈라져 있던 본신에 다시금 합일하고자 하는 본능의 발현이었다.
“…….”
그렇게 진에게 흡수된 마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룡의 찌꺼기 영혼은 마룡의 의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저 진에게 먹히는 것으로 긴 생을 마감할 뿐이었다. 그것은 진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기도 했다.
“으음.”
평범한 바퀴벌레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레어에 살며 식량을 훔쳐 먹은 마수였다. 게다가 적지 않은 마기와 더불어 약간의 마나까지 쌓아두었던 터라 고갈되었던 체력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자리에 누워 호흡을 가다듬던 진은 그가 방금 흡수한 마수의 능력을 고스란히 넘겨받았음을 자각했다. 당장 느껴지는 것은 두 눈을 감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시시각각 느껴지는, 미세하게 다듬어진 기감이었다.
그동안 느껴지지 않던 곳까지 아주 먼 거리에 이르는 사방의 느낌이 그의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공동 한복판이었지만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짐과 더불어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아주 작은 벌레들의 존재감도 어렴풋이 전해져 왔다.
“…….”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떠본 진은 순간 놀란 얼굴로 다시금 눈을 두어 번 더 깜박여 보았다.
시야가 이상해졌다.
초점이 맞는 곳에서부터 주위로 퍼져 나갈수록 멍해지던 평범한 시야가 눈동자를 중심으로 160도에 이르는 범위 안이라면 그 어디를 보든 나머지 부분까지 선명하게 파악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드득.
게다가 두 팔을 펴고 상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제 바닥에 붙어 꿈틀거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기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낮은 포복에서 높은 포복으로의 진화였다.
“으하하!”
크게 웃은 진은 무르팍과 팔꿈치가 까지는 것에도 상관하지 않고 발발거리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능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새빨갛게 까져 피가 흐르고 있는 무릎이 눈에 확실히 보이는데도 아프지 않은 것. 즉 고통을 차단하는 능력이었다.
의식적으로 차단과 해제를 반복하며 익숙해지던 그는 주위에 또 다른 바퀴벌레가 있을까 기감을 끌어올려 보았지만 그의 기운을 느끼고 달아났는지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었다.
“으으.”
그래도 기어가는 속도는 처음에 비해 세 배가량 빨라졌다. 지금의 속도라면 며칠 안에 식량 창고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날개가 생겨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던 진은 그래도 바퀴벌레의 모양새까지 넘겨받은 건 아니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다시금 두 팔과 무릎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함성? 탄식? 신음? 비명? 고함?
뭐라도 해보고 싶은 기분이긴 한데 그럴 힘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힘겹게 앞을 바라보고 있던 진은 몸을 틀어 벌러덩 드러누우며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잠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체력이 아니라 마나와 마기가 전부다. 마기는 몰라도 마나라면 현재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잠을 자는 것이 가장 많이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마나라는 것은 칼의 말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들에 흐르는 에너지라고 했다. 공기에도 있고, 바위나 물에도 있으며 나뭇잎 속에도 있다고 했다.
인간과 같은 동물의 경우에는 그것이 체력을 보완하는 힘을 주기도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역시 그 어떤 강연도 실제로 겪는 것만큼의 배움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실감한 진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마나의 소중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기의 몸으로 낼 수 있는 힘은 이미 전부 쥐어짠 지 오래였다. 죽지 않은 게 신기할 만큼 필사적으로 기고 또 기었다.
다른 벌레의 존재를 느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잡지는 못했다.
어설픈 아기의 팔놀림에 가만히 잡혀줄 벌레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어도 못 먹는 것이다.
그렇게 바퀴벌레 마수를 잡아먹고 난 후 사나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기어가며 중간 중간 약간씩 눈을 붙였다.
그에겐 잠을 자는 것이 가장 마나를 회복하기 쉬운 방법이며, 가장 많이 회복할 수 있는 방법. 마법사들은 명상으로 마나를 회복하고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다던데 그것 역시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끄응.”
다시금 힘을 짜내어 몸을 뒤집은 진은 엎드린 자세로 턱을 들어 앞을 보았다. 어디를 보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눈이었지만 그것은 그가 얻은 바퀴벌레 마수의 능력 때문이었다. 눈동자를 어디로 향하든 그 주변 일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행애따.”
그렇다. 해냈다.
이곳에 오기까지 탈진한 것이 수십 차례였지만 기어코 그는 해냈다. 죽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참고 있던 침이 턱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
이곳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한쪽에는 빵이 그득하게 쌓여 있고, 다른 쪽에는 각종 과일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기척과 더불어 그에게서 느껴지는 미세한 마기 때문에 여타의 벌레들처럼 다들 숨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다행히 아래쪽의 창고와 마찬가지로 문이 없는 식량 창고에는 별다른 차단 마법도 걸려 있지 않았다. 내심 높은 탁자나 선반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식량들을 상상하던 진은 그저 바닥 곳곳에 잡동사니처럼 잔뜩 쌓이거나 떨어져 있는 빵, 과일, 몇몇 말린 고기 따위의 먹거리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우.”
엉금엉금 기어간 그는 한 무더기의 빵 앞에 잠시 멈추더니 그대로 더 기어가 그 빵의 산 한가운데를 비집고 들어가 헤엄을 쳤다. 보존 마법 덕에 여전히 말랑말랑한 빵들의 감촉이 무척이나 좋았다.
“우헤헤!”
버둥거리는 그 때문에 바닥의 먼지나 검댕이가 묻어 지저분해지는 빵들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뭐가 묻든 맛있게 먹어줄 수 있었다.
물론 맛도 있었다.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몇 십 년 묵은 빵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상하진 않았고, 딱딱하지 않아 이가 없어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갓 태어난 아기가 곧바로 건더기 음식을 먹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당장 먹을 수 있는 게 이 정도니 별수 없는 일이었다. 최대한 묽어질 정도로 우물거려 침과 버무린 후에 조금씩 삼켜 목 뒤로 넘기는 것으로 속을 달랬다.
다행히 식량 창고 한쪽에서 마르지 않는 샘을 발견한 이후엔 목이 막힐 일도 없어 굶어 죽을 위험은 완전히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