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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다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며칠 동안을 식량 창고에서 먹고 자고 뒹굴기만 하던 진은 평소처럼 자신의 몸통만 한 빵을 두 팔로 안고 조금씩 뜯어먹으며 생각했다.
“…….”
물론 식량은 충분하고 넘친다. 지금의 식사량으로 따져도 몇 년은 거뜬할 것 같다. 아니, 아직 체구가 작은 탓에 위쪽은 제대로 볼 수가 없어 어림짐작한 것이니 저 거대한 선반들 위에 있을 무언가까지 생각해 보면 훨씬 오래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걱정할 문제는 굶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상황은 벗어났다. 이제부턴 앞날을 구상해야 한다.
이곳은 드래곤의 레어다.
칼에게서 물려받았으니 이젠 그의 레어였다. 레어의 구조에 대해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수없이 들어온 터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입구 겸 출구는 서남쪽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쪽에서 빛이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로 막아둔 것일까? 어쩌면 마법으로 감춰둔 것인지도 모른다. 레어를 은은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은 천장 곳곳에 박혀 약한 빛을 내뿜고 있는 야명석(夜明石:Light stone)이었다.
캑캑.
조금 큰 덩어리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하던 진은 서둘러 샘에 얼굴을 처박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샘은 그가 뛰어들면 몸이 잠길 정도로 깊고 넓다. 머리가 무거워 쉽게 일어나지 못해 어푸어푸 두 팔을 휘저어 겨우겨우 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릇이나 컵이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어딘가에 놓여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빵을 조금 물어뜯던 진은 주위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앱퍼으흐.”
여전히 발음은 제멋대로다. 단순히 이가 없어서 새는 문제만이 아닌 것 같다. 아직 세밀한 발음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앱서브 주문은 마룡의 능력 중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 바로 마기 흡수와 관련된 주문이다. 이것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다면 알껍질을 흡수할 수가 없다.
알껍질에는 상당한 마기와 마나가 깃들어 있다고 들었다.
칼이 마룡의 육체를 알로 만들 때, 마룡이 지녔던 대부분의 마기와 마나로 껍질을 만들어 그 안에 육체를 봉하는 형식으로 사용했다고 했으니 지금 이 몸뚱이보다는 훨씬 많은 마나와 마기를 지니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그것을 흡수함으로써 아기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까지 들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바퀴벌레 마수를 흡수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흡수한 것인지, 녀석이 그에게 들어온 것인지가 확실치 않았다. 아마 후자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마룡의 지식 일부를 넘겨받은 덕분일까? 그가 흡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좀 더 확신이 갔다.
당장 용언이라는, 의지로 마법을 발현한다는 그것을 행할 만한 능력도 없는 이상 입으로 시동어를 말하고 그 힘으로 마법을 행할 수밖에 없다. 당장 필요한 것은 역시 발음 문제인 것 같다.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날 동안 먹고 자는 시간 외엔 발음 교정에 힘을 쓰던 진은 적어도 ‘앱서브’만큼은 그럭저럭 새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막상 그 수준에 이르고 나니 그제야 이곳까지 온 길이 상당히 길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는 갓 태어났을 때와 달라졌다.
그리고 어제 발견한 로프 한 줄이 그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진은 바닥에 가로로 길게 로프를 놓고 그 위로 길쭉한 빵 서너 개를 올려놓은 후, 조심조심 그 빵 위에 누워 양쪽의 로프 끝을 허리 앞으로 들어 잘 당겨 묶었다.
그릇이나 통이 없으니 물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빵이라도 가져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던 진은 그가 먹을 수 없는 납작한 말린 고기 몇 조각을 마찬가지로 무릎과 팔꿈치에 덧대어 묶고 다시금 머나먼 여정을 시작했다.
바퀴벌레 마수의 능력 중 하나인 ‘최소한의 힘으로 최적의 움직임’이 있으니 오던 길처럼 지쳐 늘어질 일은 없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을 거라는 짐작 역시 그만큼 강했다.

잡동사니 창고에 도착한 때는 식량 창고를 출발한 지 대략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저 느낌으로 짐작해 볼 뿐 실제로 얼마나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갈 때만큼 죽을 고생은 아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무릎과 팔꿈치에 묶은 말린 고기들이 제 몫을 다해주었다.
갈 때처럼 팔꿈치나 무릎이 까지지 않아 좀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고, 더 오래 지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안타까운 일은 허리에 묶고 왔던 빵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어차피 편도 식량이라 생각했지만 정말 그렇게 되니 막막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길 어쯔케 빠쥬나아찌?”
아직은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며 앞을 보던 진은 다시금 창고 앞을 막고 있는 잡동사니 한쪽, 그가 빠져나왔던 틈새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배불리 먹긴 했지만 몸집이 단시간에 그렇게 커질 리가 없었다. 처음 빠져나왔던 틈새는 지금도 충분히 몸을 들이밀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다.
다만 그 틈새가 병장기들 사이에 있는 것이라서 시퍼런 창날이나 묵직한 도끼들 따위가 그 위에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
빈 로프를 허리에 묶고 있던 진은 팔다리의 고기 조각을 그대로 차고 지나기엔 틈새가 빡빡한 감이 없지 않아 그것들은 창고 밖에 풀어놓은 후 최대한 몸을 웅크린 자세로 천천히 기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레어라고 해서 지진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위태위태하게 자리 잡은 병장기들이 무너진다면 정말 끔찍한 모습으로 죽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젓던 진은 극도로 조심하면서도 느리지 않게 전진하여 창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깨고 나온 알은 그 자리에 여전히 있었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바로 옆까지 기어간 진은 조심조심 허리를 일으켜 앉아 두 쪽으로 갈라진, 마치 속을 비운 박과도 같은 알껍질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앱서―브. 앱서브.”
이만하면 발음도 괜찮은 것 같다. 연습한 보람이 있다.
“흠흠.”
아기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한 손을 말아 쥐고 헛기침을 하던 진은 자신의 손을 알껍질 조각에 살며시 대었다.
“앱서브.”
이것은 마나를 운용하는 고차원적인 마법이 아니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발차기를 하는 것처럼, 숨을 쉬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마룡의 능력이다.
그저 의지만으로 발현하기엔 능력이 부족해 시동어가 필요했을 뿐이지만 이제 해결되었다.
뿌드득.
그의 손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알껍질 전체에 이르는 곳까지 미세한 금이 생겨났다. 조금은 기분 나쁜 느낌의 소리가 이어지며 쫙쫙 금이 가던 알껍질은 이어 시커먼 기운과 시퍼런 기운을 동시에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그 상황에 있게 되니 적잖게 놀란 진은 서둘러 비어 있던 다른 손도 알껍질에 가져갔다. 두 손바닥 아래에서 묵직한 뜨거움과 소름끼치는 차가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창고를 가득 메운 것으로 모자라 창고 바깥까지 일렁이며 빠져나갈 듯 보이던 마기와 마나는 그것을 담고 있던 알껍질이 가루처럼 부스러져 버리자 그 앞에 뻗고 있던 진의 두 손바닥, 그리고 호흡하고 있는 진의 코와 입을 통해 천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단지 반쪽의 알껍질을 흡수하는 과정이었지만 그것을 행하고 있는 진은 쉴 새 없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수히 많은 존재들과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눈들이 그를 노려보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들은 마룡, 그리고 그가 죽여 흡수한 수많은 드래곤들과 마수들이었다. 그저 의지의 파편에 불과했기에 아무런 물리력이 없었지만 너무나 강력한 힘으로 그의 정신을 빼앗으려 했다.
‘웃기지 마라.’
마룡을 봉인했던 칼조차도 장악할 수 없던 것이 바로 진의 정신이었다. 처음엔 갑작스런 일이라 대응하기 어려웠던 진은 차츰차츰 주도권을 쥐며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망령이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념의 잔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질 이유가 없었다.
고오오오…….
창고를 뒤흔드는 마나와 마기의 소용돌이에 의해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던 두 기운이 고스란히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뿌드득거리며 몸 곳곳이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일부는 고통스러웠지만 비명을 지를 만큼 큰 고통은 아니었다.
번쩍.
감고 있던 두 눈을 뜬 그는 그의 시야가 전보다 더 명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초점이 잘 맞는 안경을 쓴 느낌이다.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던 진은 문득 자신의 두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다.
“…….”
조금 자란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비로소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되었다.
“키가 컸나?”
거울이 없으니 정확한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입안에 있는 혀를 굴려보니 이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지만 발음은 상당히 양호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진은 옆에 있던 나머지 알껍질들을 모으려 움직이다 벌러덩 자빠졌다.
“걸음마도 연습해야겠군.”
무르팍이 깨져 피가 흘렀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발라주셨던 빨간약이 그리워졌지만 그저 통증을 차단하며 재차 움직인 진은 나머지 알껍질과 파편도 한데 모아 다시금 앱서브를 통해 그의 것으로 만들었다.



제3화 진정한 안배


성장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다.

―뉴먼―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알껍질은 모두 흡수했다.
몸 안에 흐르고 있는 강한 힘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그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룡이 죽이고 흡수했던 무수히 많은 의지, 그 사념들. 그 안에 깃들어 있는 한과 슬픔은 그것의 주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알껍질이 모두 흡수된 이후, 그것들은 자신이 품고 있던 아주 작은 기억의 조각들과 함께 하나둘 진의 머릿속으로 흡수되어 녹아들었다.
다른 이들의 기억, 그 아주 일부분이라고 해도 타인의 기억을 전해 받는 일은 단순히 타인의 경험을 옆에서 엿보는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의 정신을 장악하려던 적대적인 의지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것들이 품고 있던 기억들은 고스란히 그의 몸에 새겨졌다.
이미 기억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사라져 희미해진 느낌만 남아 있는 것도 있었고, 그보다는 좀 더 명확하게 남아 있는 느낌도 있었다.
기쁨, 슬픔, 분노와 미련 등 수많은 기억들은 저마다 품고 있는 그만큼의 감정들이 있었다. 그것을 받아들인 진의 두 눈에서 또르르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크으.”
수천 번의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희미하고 추상적인 감정들이었지만 이렇게 한 몸에 받아들이다 보니 가슴을 뒤흔들 만큼 강해져 결국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받아들였다.”
그 모든 의지가 진의 것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정신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한 줌의 기억을 남기고 소멸한 것이다.
비로소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존재들을 생각하며 잠시 고개 숙여 묵념한 진은 두 손을 들어 얼굴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훔쳐내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한층 더 깊은 암흑이 깃들어 있었다.
검은 눈으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본 진은 주변에 널려 있던 병장기 일부가 가루처럼 부스러져 있음을 알고 다시금 앉아 있던 자리에서 두 다리를 천천히 뻗어보았다.
“짧군.”
아기는 아니다. 하지만 다 자란 것도 아니었다.
우두둑거리며 몸을 움직여 보던 그는 얼마나 앉아 있던 건지 굳은 몸을 푸는 것조차 무척 힘이 들어 한참이나 땀을 뻘뻘 흘린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어차피 가야겠지.”
들고 왔던 빵은 오던 도중 바닥났다. 꼬르륵거리진 않지만 허기진 상태는 맞는 것 같기에 서둘러 창고를 나가려던 진은 여전히 벌거벗은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구석에 널려 있는 이름 모를 가죽 무더기에서 몇 장의 가죽들을 들어 어깨 위에 얹었다.
“노끈 같은 건 더 없나?”
가볍고 날이 잘 드는 단검 하나를 찾아 챙긴 그는 주위를 뒤져보다 질긴 로프 한 묶음을 찾아 반대쪽 어깨에 교차하여 걸고 창고를 나섰다.
아기였을 때 태산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잡동사니들은 조금이나마 자란 그에겐 그리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창과 같은 위험한 것들을 조심스레 옮긴 후엔 대충대충 몸으로 밀어가며 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