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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공동은 여전히 넓었다. 두 다리로 온전히 서게 된 지금도 그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청각과 시각 때문인지 이곳에 처음 온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가죽으로 대충 몸을 가리고, 남는 가죽으로 간단한 주머니를 만들어야겠어.”
창고엔 배낭이 없었다. 식량 창고에서 배를 채운 후, 준비한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면 그 안에 먹을 것을 채워 레어를 돌아다녀 볼 생각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는 왠지 레어 안에서 느껴지는 공기가 탁했다. 분명 출입구가 있을 텐데, 공기 순환이 잘 되지 않는 것일까? 진은 출구를 찾으면 바깥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
칼은 진이 살던 곳과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거라 말했다.
단지 문물의 차이, 문명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인간이 사는 곳은 비슷할 만큼 닮아간다고도 했었다.
그래도 말로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어느 정도 몸을 키운 후에 나가야 덜 위험하겠지만 단순히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는 정도라면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으음.”
천천히 걸어가면서 몸 여기저기를 보니 대략 140센티 정도의 키인 것 같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팔과 다리, 아래를 보는 시선의 높이 정도로 유추해 본 것이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난 피부가 왠지 마음에 안 들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비로소 흑영보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물론 그가 쌓은 경지만큼을 펼치려면 또 적지 않은 시간을 적응하고 수련해야 하겠지만 지금의 몸으로도 약간의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진은 보법을 중지하고 다시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흑영보를 행하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몸, 정확히는 바퀴벌레 마수의 능력이 그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것을 오래 유지할 체력과 마나 수준이 아님을 몸이 아는 것이다. 진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식량 창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전히 긴 거리였기에 중간에 서너 번 쉬긴 했지만 그래도 아기였을 때에 비하면 몇 배나 빨라진 속도였다.
“휘유.”
산처럼 쌓여 있던 빵과 과일들은 여전히 거대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시야가 넓어지자 더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무슨 놈의 먹을 것을 이렇게 많이 쌓아두었을까?
보통 드래곤의 레어라고 하면 금은보화나 온갖 값비싼 것들이 그득하게 쌓여 있는 것을 상상하는데, 이곳에는 그런 반짝이는 것들 대신 누런 빵과 각종 과일들이 천장에 닿을 듯 산처럼 쌓여 있었다.
벽 쪽에 놓인 장식장에는 연도를 알 수 없는 술이나 각종 물약 같은 것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것들임에도 왠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가 흡수한 기억의 파편들 덕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억의 파편들은 그런 단편적인 지식만을 전해준 것이 아니었다.
개개의 지식들은 작고 추상적이었지만 다른 것들과 모이고 모여 하나를 이루자 이 세계에 대한 지식 중 일부나마 알 수가 있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이곳의 언어가 그가 예전에 살던 세상에서 통용되던 언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문자 체계는 많이 다르지만 발음과 어휘 부분에서 지역에 따라 영어와 닮은 부분, 심지어 한국말과 비슷한 부분도 있었다.
적게는 10퍼센트, 많아도 30퍼센트를 넘지 않을 정도로 약간의 유사성이었지만 비교적 많은 부분이 닮은 지방의 경우 아버지는 ‘아버이’, 어머니는 ‘어마이’ 등 기본적인 단어는 한국에서와 발음이 비슷해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 사람이 건너오더라도 어느 정도 연습만 하면 간단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그가 알게 된 또 한 가지는 바로 그의 정체성이었다.
수많은 드래곤들의 기억들 중 일부나마 얻게 된 진은 그가 지닌 육체가 완전한 드래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드래곤이 아니었다.
블랙드래곤의 알을 빌어 태어났지만 완벽한 드래곤의 육체를 지니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간인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알을 깨고 나오려던 최후의 순간 그가 가진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인간이었던 영향인 것 같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저 드래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칼 역시 완벽한 예측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에 그쳤다.
적어도 블랙드래곤의 능력인 마기 흡수와 사용은 잃지 않은 정도로 만족한 진은 새삼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찬찬히 뜯어보았다.
“…….”
어림잡아 일곱 살 안팎으로 보이는 외모.
조금은 어렸을 적 모습을 닮은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무척 달라져 있었다. 특히 듬성듬성 솟아난 검은 머리 아래로 보이는 두 눈이 달랐다.
“오래 본 탓인가?”
알 속에 있던 동안 인식했던 스스로의 모습대로 구성된 모양인데, 두 눈은 확실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 때문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칼이었다.
알 속에서 지낼 때의 진은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볼 수는 있었지만 얼굴의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두 눈의 경우 하늘을 가득 메웠던 칼의 두 눈만 보았던 탓인지 눈동자가 검은 것만 빼면 칼의 것을 그대로 빼닮았다.
“그래도 나는 인간을 택했다.”
사실 택했다기보다 부정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했다.
아무리 칼의 이야기대로 스스로를 생각해 보려고 해도 결국 그가 인간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그가 인간임을 버리고 스스로를 드래곤이라 완벽하게 인식했다면 드래곤의 육체를 온전하게 지니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틀린 짐작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칼은 그것을 예상하고 이런 무지막지한 식량을 준비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질겅질겅.
진은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훈제로 구워져 적당히 단단한 고기 한 덩어리를 가져와 창고에서 들고 온 단검으로 조금씩 잘라 먹었다.
조금이나마 성장한 덕에 그동안 보고도 먹을 수 없던 것들을 비로소 먹게 되자 왠지 몸의 힘과 더불어 마나의 자연 회복능력이 한결 좋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은 빵과 과일, 그것도 과일은 제대로 씹을 수가 없어 잇몸으로 으적거리며 즙을 내 먹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젠 두 팔이 자유롭고 치아도 제법 그럴싸하게 솟아 있다. 제법 단단한 말린 고기도 침으로 불려가며 씹어 먹을 수 있는 수준이다.
적당히 배를 채운 진은 창고에서 가져온 가죽 일부로 대충이나마 몸을 감싸고 허리를 로프로 감아 고정했다. 바늘도 없고, 바느질 솜씨도 없으니 옷을 지어 입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알몸이 아니라는 것에 만족하며 자투리 가죽으로 두발을 각각 감싸, 역시 잘라낸 로프로 발목을 묶어 자루처럼 고정시켰다.
창고에는 가죽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부츠들 역시 있었지만 모두 성인용이어서 지금의 그가 신는 것은 무리였다. 간혹 뾰족한 돌멩이에 상처를 입던 여린 발을 질긴 가죽으로 감싸자, 조금 무거웠지만 내딛는 느낌은 훨씬 좋아졌다.
진은 큼직한 빵과 고기를 들고 거대한 빵의 산 한쪽에 자리 잡아 털썩 주저앉았다.
“…….”
무표정한 얼굴로 빵을 한입 큼직하게 베어 문 그는 천천히 우물거리며 푹신한 빵의 산에 등을 기댔다.
배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한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만큼 집어넣어야 그만큼 일찍 자랄 것이다. 물론 보통의 인간이라면 피둥피둥 살이 오르겠지만 그는 분명 보통의 인간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 이후 용변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식량 창고에 도착하여 실컷 배를 채우기 시작한 이후에도 말이다. 변비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캑, 캑.”
조금 급하게 먹었던 탓일까.
조금 큰 덩어리가 목에 걸린 그는 옆에 놓여 있던 은그릇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야 개운해진 듯 후우 숨을 내쉬었다.
“…….”
그의 몸은 찌꺼기를 만들지 않는다.
식량을 섭취하고, 그것의 화학작용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 차후 찌꺼기를 용변으로 배출하는 보통의 인간과 달리 그는 섭취하는 음식을 100퍼센트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음식 자체의 마나를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알게 된 이후엔 적당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꾸역꾸역 우겨 넣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더 많이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들고 갔던 길쭉한 빵 두어 개를 모두 먹은 진은 옆에 있던 훈제 고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쭉쭉 찢어 먹기 시작했다. 미리 칼집을 만들어둬서 찢어 먹기가 수월했다.
“한도 끝도 없겠네.”
물론 먹은 음식을 완전하게 소비한다 하더라도 먹는 그 양의 한계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아직 작은 체구의 소년이 먹을 수 있는 양, 소화시킬 수 있는 양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 자리에서 고기 한 덩어리를 다 먹은 진은 불룩 솟은 자신의 배를 살짝 눌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소화를 시킬 시간이다.
*
*
*
“후욱, 후우.”
억눌린 듯 듣기 거북한 숨소리.
곧 그것마저 사라지고 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역시 진이었다.
“해냈다.”
현재 행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흑영보를 펼친 그의 앞엔 여전히 잡동사니로 엉망인 창고 입구가 있었다. 훅, 하며 다시금 보법을 행한 진은 순식간에 창고 입구를 지나 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재차 억눌린 것 같은 숨소리가 이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흑영보는 잠입, 은신에 최적화된 보법이다. 소리를 최대한 감춰 궁극적으로 아무런 기척도 흘리지 않는 것이 목표인데 꼴사납게 헉헉댈 수는 없었다.
“호흡량의 문제일까?”
아마도 폐활량의 문제인 것 같다.
더 자라고, 더 수련할수록 개선될 거라 생각한 진은 등에 대각선으로 묶어 메고 있던 가느다란 목검을 뽑아 들고 이신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의 일과가 먹기와 수련으로 이어진지도 한 달 이상 지난 것 같다. 기분 상으로 그렇게 느낄 뿐 실제로는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먹고, 달리고, 창고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수련한 후 다시금 보법을 밟아 식량 창고로 돌아가는 일의 무한반복이었다.
처음에는 공동의 중간도 못 와서 지쳐 버렸지만 그 정도 체력 소모를 기준으로 왕복을 시작한 이후엔 중간 중간 수련을 곁들일 정도로 체력이 붙었다. 결국 쉬지 않고 한 번에 식량 창고에서 이곳까지 올 수 있는 체력을 지니게 되었다.
먹는 양 역시 많이 늘었지만 근래엔 오히려 먹는 양이 소비되는 양을 따라잡지 못하는 기분이 들어 약간의 식량을 이쪽 창고에 옮겨두기도 한 상태였다. 흑영보로 공동을 가로지르는 일이 쉬울 리 없는 것이다.
그의 키는 그리 많이 자라진 않았다.
일반적인 인간의 아이보다야 조금 나은 수준이라 볼 수는 있지만 확실히 빠른 성장은 아니었다. 알껍질을 흡수하고 난 직후에 비하자면 대략 5센티미터 정도 더 자란 것 같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아마도 먹는 것을 대부분 보법과 검법, 권법 등을 수련하는 데 소진하다 보니 몸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양이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수련을 줄일 수는 없었다. 수련을 줄이게 되면 소화되는 양이 줄어버리기에 결국 먹는 양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챙그랑―!
놓쳐 버린 목검이 바닥을 울리며 차가운 소음이 들려왔다.
가진 힘을 있는 대로 쥐어짠 탓에 손아귀 힘마저 사라져 버린 진은 부르르 떨리는 두 손을 여러 번 쥐었다 편 후 뒤쪽으로 가 그의 머리통만 한 나무통에서 포도주 한 잔을 퍼 올렸다.
물을 가져올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탓에 대안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이 둥그런 나무 술통이었다. 낑낑거리며 굴려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 이상 줄어 있었다.
“크으.”
누가 뭐래도 몸 자체는 어린아이다. 통에서 술을 퍼마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동작으로 몇 잔이나 연거푸 퍼마신 그는 안 그래도 수련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더욱 벌겋게 물들이며 비틀비틀 걸어 창고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술기운은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술 역시 그에게는 음식일 뿐. 순식간에 소모되어 사라져 버린다.
“슬슬 움직여 볼 때가 된 것 같아.”
혼잣말을 중얼거린 진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눈을 들어 창고 바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