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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한 번에 가로지를 정도면 충분하겠지.”
보법 수련은 단순히 섭취한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한 일만이 아니었다. 레어를 제대로 돌아볼 생각이었던 그가 생각한 기준이 바로 공동을 한 번에 가로지를 정도의 체력과 보법이었다.
이제 그 수준에 올랐으니 그동안 미뤄왔던 레어 탐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미룰 것도 없이 당장 일어난 진은 어느새 가라앉은 혈색으로 바닥의 목검을 챙겨 등 뒤에 잘 묶었다.
“식량 창고로 돌아가서 배를 채우고, 별도로 자루에 조금 담은 다음 이곳저곳 돌아봐야겠군. 특히 지난번 보았던 계단 아래가 궁금해.”
공동을 기준으로 2시 방향에 커다란 계단이 있었다. 그것은 아래로 꺾여 들어간 모습이었는데, 지하가 있다던 칼의 말 그대로였다.
“흐읍.”
크게 숨을 들이쉰 진은 바닥을 두어 번 굴러본 후 보법을 행하며 생각을 이어갔다.
레어 지하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략적인 것은 칼과 함께 지낼 때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것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빠른 성장을 돕는 약이나 그런 것 말이다.
칼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신에겐 더없이 필요한 그런 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더욱 빠르게 발을 놀렸다.
갈 때처럼 최대한 배를 채운 게 아니었던 터라 돌아가는 길 중간에서 한 번 쉬어야 했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던 길에 생각했던 대로 커다란 자루 배낭에 먹을 것을 최대한 챙겨 넣은 진은 한쪽 진열대 위에 쌓여 있던, 아직은 마시지 않았던 금으로 만든 술 항아리들 중 하나의 주둥이를 잘 틀어막고 자루에 함께 넣었다.
“도시락 완성.”
가벼운 투로 말하긴 했지만 정작 말하고 있는 진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최대한 효율적인 구성으로 준비한다고 하긴 했는데 다 싸고 나니 자루가 터질 만큼 부풀어 있었다. 그의 몸을 잘 구겨 덩어리로 만들어도 이것보단 작을 것이다.
“끄응―! 멜 수는 있겠군.”
어설픈 멜빵을 두 어깨에 걸고 일어난 진은 그럭저럭 걸을 수는 있을 것 같기에 더 빼지 않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먹어서 없어질 것이기에 당장은 무거워도 곧 나아질 거라 여겼다.

생각보다 무척 길게 이어진 계단이었다.
트랩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알 수 없기에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려가느라 준비했던 식량도 금세 바닥나기 일쑤였다.
대략 열 번 정도 식량 창고와 계단을 왕복하다 보니 평지인 공동을 달릴 때보다도 더 큰 수련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 속에서도 밖에서도 평지에서만 수련했을 뿐, 비탈이나 이런 계단 같은 곳에서는 보법을 해본 적이 없었다.
“큰일 날 뻔했군.”
칼의 복수를 해주자면 결국 누군가와는 싸우게 될 것이다.
그가 가진 몇 안 되는 재주 중 큰 몫을 차지하는 게 바로 보법인데, 싸움이 꼭 평지에서 이루어지리라는 법이 없으니 아주 낭패를 볼 뻔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수련 방식을 좀 다각화해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진은 벽 곳곳에 박혀 은은하게 빛나는 야명석들 덕분에 횃불 없이 내려올 수 있었음을 확인한 후, 앞에 있는 커다란 문을 마주했다.
“…….”
칼은 치장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것 같다. 이런저런 물건이나 창고를 보아도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부분 외에는 별다른 꾸밈이 없었고, 이 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박한 바위를 깎아놓기만 한 듯 매끈한 문 겉에는 별다른 장식이나 문양조차 새겨져 있지 않았다.
“꽤 무겁겠는데, 이거.”
다가가 가만히 만져보니 분명 돌인 듯 딱딱하고 차가웠다. 뒷짐을 지고 서서 가만히 바라보던 진은 곧 오른발을 뒤로 뻗으며 상체를 살짝 숙이고 두 팔을 문에 얹었다.
“힘만 갖고는 무리겠지. 역시 마나를 써야 하려나.”
다행스럽게도 지하는 위쪽보다 마나의 밀도가 높은 것 같았다. 가볍게 숨을 들이쉰 진은 온몸의 힘을 끌어올리며 배에 힘을 주었다.
“……!”
이를 악물며 밀어붙이는데도 꿈쩍하지 않던 바위 문은 재차 힘과 마나를 쏟아부으며 끙끙거리는 진에 의해 비로소 조금씩 그그극거리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몸에 쌓인 마나로 힘을 보조하는 기술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 다 자라기 전에는 밀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던 진은 적잖게 지친 몸이지만 움직이기 시작한 지금 제대로 밀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멈추지 않고 밀어붙였다.
좌우 두 쪽으로 갈라져 있는 문 중 오른쪽 문만 밀었던 진은 대략 30센티미터 정도 민 것 같은데도 여전히 왼쪽 문과의 사이에 틈새가 벌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주저앉았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후우.”
무슨 문을 이렇게 무식하게 만들어놓은 걸까?
칼은 레어 지하에 자신의 연구실이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마법 서적이나 연구 자료와 같은 것들이 있다고 했었는데, 어쩌면 그것들이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진은 챙겨온 식량으로 조금이나마 배를 채우고 나서 재차 문을 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밀어두어서 그런지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 밀고 쉬는 것을 서너 번 반복한 후에야 비로소 틈새가 생겨났고, 다섯 번을 밀고 나서야 그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벌어졌다.
“음.”
하지만 진은 곧바로 발을 내딛지는 않았다. 트랩 따위에 대한 걱정보다는 남아 있는 식량이 전무하다는 것에 신경이 쓰인 것이다.
“천천히 하는 게 낫겠지.”
중얼거린 진은 주저 없이 돌아서며 빈 배낭을 짊어졌다. 혹시나 다시 왔을 때 문이 도로 닫혀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혹 그렇다면 식량도 없이 안에 들어갔다가 문이 닫혀 버리는 것보단 나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가 다시금 배낭을 꽉꽉 채워 내려온 이후에도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
*
*

“…….”
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가 지금 들어선 곳은 지하 공동에서 3시 방향에 위치한 연구실. 이곳에는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원기둥 형태의 투명 시험관들이 대략 열 기 정도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바싹 마른 미이라 같은 것들이 안에서 말라 비틀어져 있을 뿐, 제대로 된 것들이 없었다.
아마도 특별한 액체 따위에 들어 있었어야 정상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 된 이유인지 모든 시험관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말라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실험체, 모두 죽어 말라 버리긴 했지만 제각각 다른 형태를 지닌 그것들은 크기 역시 제각각이었는데, 작은 것은 다람쥐 정도 크기인 것도 있었고, 큰 것은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커다랬다.
하지만 아무리 덩치가 커도 시험관을 부수고 나올 힘은 갖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시험관이 그만큼 단단하거나.
“불쌍하네.”
버려진 실험체는 이렇게 죽어갔던 것일까.
진은 시험관들이 말라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관리해 줘야 할 칼이 사라졌기에 이렇게 된 것이리라.
“얼마나 지났기에 이렇지?”
진은 알을 깨고 나온 이후 거의 처음으로 현재 시기에 대한 궁금함이 생겨났다.
시험관 때문에 만져보거나 할 수는 없지만 실험체들의 시체를 보아 한두 해가 지난 게 아닌 것 같았다.
시험관 안쪽에 말라붙은 액체의 흔적과 그 안에 구겨지거나 쭈그려 앉아, 혹은 살려 달라 발버둥 치듯 시험관 내벽을 긁어대던 모습으로 말라죽은 실험체들을 보며 진은 자신 역시 이런 식의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칼은 자신의 입으로 말했었다. 신이 되고자 했다고 말이다.

[샤룬드 아인은 신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이겨내는 존재를 만들어내려면 나 역시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가져야만 했지.]

드래곤은 그 자체로 반신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하지만 진정한 신의 능력에 비견할 수는 없다고 칼 스스로도 인정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아닌, 그저 이것저것을 혼합하여 이종 교배하는 일뿐이었다고. 결국 자신 역시도 그들을 핍박하는 인간과 같은 짓을 했던 것이라 말하던 칼의 눈빛을 떠올려보니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서서 그곳을 나온 진은 아직 가보지 않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
지하 시설은 확실히 지상의 그것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다.
대략 지름 백 미터 정도의 공동을 중심으로 각종 연구실과 실험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반으로 갈라 위와 아래를 나누자면 그 위쪽은 온통 실험실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낡고 말라 있었다.
남은 방은 다섯 군데였다. 단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이 달려 있지 않아 그 안이 어렴풋이 보였다.
공동 천장에 박혀 있는 커다란 야명석을 올려다본 진은 어쩌면 이곳저곳 꾸미는 것보다 저런 것 하나가 훨씬 비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재인가?”
한 방은 입구를 제외한 세 벽과 그 안이 온통 높다란 책장으로 채워져 있고, 그 안에 들어찬 각종 서적으로 가득한 방이었다. 슬쩍 고개만 들이밀고 안을 확인한 진은 일단 다른 곳들을 마저 돌아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옆에 있던 방은 침실이었다.
새삼 침실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조금 의아했지만 낡아빠진 나무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을 보니 칼이 얼마나 연구에 미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자는 침대조차 별다른 장식이 없던 것이다. 단순히 꾸미기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라 연구 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 옆방은 빈방이었고, 다른 방에는 각종 가죽 두루마리와 벽에 걸린 알 수 없는 도식들로 가득했다. 혹시나 부스러질까 조심스레 살펴보니 각 가죽들 겉으로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음.”
기억의 파편들을 통해 얻은 지식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이 방은 칼의 연구실이었던 것 같다. 연구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여러 가설들을 떠올리며 메모하던 곳인 모양이다.
어쩌면 칼은 자신의 연구를 이어갈 존재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연구를 마칠 생각이었다면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글로 써서 연구할 만큼 기억력이 떨어지는 존재도 아니었고, 한쪽에 놓여 있던 몇 권의 책들이 칼이 직접 쓴 연구 서적들인 것으로 보아 더 확실한 것 같았다.
“이런 연구를 이어갈 순 없지. 능력도 없고, 머리도 나쁘고.”
진은 옆에서 칼이 듣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며 칼의 연구 서적들을 배낭에 챙겼다. 그래도 그가 연구한 자료라면 지금의 그에게도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한 군데 남았네.”
진은 다른 방들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한 곳, 공동에서 6시 방향에 혼자 덩그러니 문을 달고 있는 나머지 방 하나를 보며 끄덕였다.
레어는 이곳이 끝인 것 같다. 계단은 더 이상 없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는 없는 문을 혼자만 달고 있는 저곳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는 것이다.
문 가까이 접근해 본 진은 무척이나 낡은 문손잡이를 조심스레 잡아보았다. 혹시나 트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의하려던 것인데, 우습게도 그가 건드리자마자 문짝이 통째로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응?”
그런데 단순히 삭아서 부서진 게 아닌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느껴진 마나의 움직임에 흠칫 놀란 진이 옆으로 데구르르 굴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등 뒤 멀리에서 들려온 묵직한 소리뿐이었다.

쿵―!

처음엔 그저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뭔가가 떨어지거나 부딪힌 소리겠지 생각하던 진은 문득 이 지하에 딱히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뒤를 돌아본 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굳게 닫혀 있는 바위 문이었다. 문이 닫혔다. 갇힌 것이다.
“뭐 이런…….”
멀쩡히 열려 있던 문이 닫힐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안에서 밀어 닫았거나, 아니면 바깥에서 당겨 닫은 것이다.
“……?”
진은 서둘러 지하를 샅샅이 뒤졌다. 분명 살아 있는 건 그 혼자였다. 유령이 문을 닫았다는 건가? 놀란 얼굴이었던 진은 문득 조금 전 바스러진 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느껴졌던 마나의 움직임.
그것이 저 문을 닫는 마법일 것이라 짐작하자 등골이 서늘해진 진은 서둘러 서재로 돌아가 그곳에 두었던 자루에 남아 있는 식량을 확인했다.
넉넉한 양이지만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평소만큼의 힘을 쓴다고 하면 아껴 먹는다고 해도 길어야 사나흘이다. 암담했다.
바위 문은 그 무게도 무게지만 당길 수 있는 부분 자체가 없는 형태였다. 단순히 밀어 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만 그것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열 때 가능한 것이지,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진은 칼의 서재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침실이나 그 옆의 빈방, 부서져 버린 문이 달려 있던 방에는 별다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터라 문을 여는 단서가 있다면 바로 이곳, 서재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을 만들었으니 분명 여는 방법도 마련해 두었겠지.”
마법 장치로 닫았으니 비슷한 장치로 열 수 있도록 열쇠 기능을 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쇠지레 비슷한 거라도 찾아내야 했다.
하지만 서재를 뒤지기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런 단서조차 얻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