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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진은 책을 읽고 있었다.
읽는다기보다는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듯 한눈에 훑어보고 바로 넘기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마법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히 힘을 폭발시킬 수 있는 그런 마법이 있다면 그가 가진 힘과 마나를 모두 소모해서라도 저 바위 문을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그가 가진 광범위한 시야와 더불어 극도의 집중력과 긴장 때문인지 지금처럼 한 페이지를 읽는 데에 채 1초가 소모되지 않았다. 내용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기에 한 권을 읽는 데에도 평균 1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한 권 한 권 읽고 있는 진이지만 아무리 읽어도 적당한 마법이 나오질 않았다. 모두 고차원적인 것들, 그가 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렇게 수천 권이 넘어가는 책들을 모조리 읽은 그는 이미 식량이 바닥난 터라 굶은 지도 며칠이나 되어, 눈 밑이 퀭해져 날카로운 인상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남은 책 한 권이 손에 들려 있었다.
여태까지 읽었던 다른 책들과 달리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조심스레 읽어보던 그는 역시나 마지막 책에도 그가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아 그대로 덮고 가까운 벽에 집어 던졌다.
“으아아, 빌어먹을!”
죽음의 위기는 넘겼다고 생각했다.
몸만 자라면, 레어만 나가면 칼의 복수를 해주고 멋대로 살아볼 생각에 신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런 곳에서 이렇게 또다시 굶주리고 있었다.
화가 났다. 너무나 화가 나서 바닥에 늘어져 있던 책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책장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부서진 책장 모서리를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
들고 있던 책장 모서리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진은 그것을 옆에 있던 벽에 대고 크게 휘둘러 부숴 버렸다.
구우웅―
콰직, 하며 부서지는 나무. 하지만 진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나무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때렸던 벽이 울리고 있었다.
탁. 탁.
진은 서둘러 나무토막 하나를 주워 들고 그 벽 일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손이 닿기 어려운 위쪽부터 허리를 잔뜩 숙여야 할 만큼 낮은 곳까지 일일이 두드려 보던 진은 벽 한가운데, 다른 곳과 달리 안쪽이 비어 있는 것처럼 소리가 다른 부분을 찾아냈다.
“…….”
하지만 마땅히 부술 수 있는 도구가 없었다.
지금 그가 써먹을 수 있는 것은 부서진 책장,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천 권의 책들, 말라죽어 가고 있는 몸뚱이뿐이었다.
나무로 만든 책장은 조금 전 보았듯이 혼자 부서질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것을 제외하고 나니 책과 몸밖에 남지 않았다. 주저 없이 손에 마기를 씌운 진은 맨주먹으로 그 벽을 후려쳤다.
콰득.
“……!”
손아귀가 터져 피가 흘러나왔다.
다급히 고통을 차단한 진은 철철 흐르던 피가 금세 멎고, 터져 버린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하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바라보았다.
그의 신체 회복능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기어 다니던 시절, 무릎과 팔꿈치가 까지다 못해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갈렸을 때도 일주일 만에 완벽하게 회복했었다.
자연 치유력의 강화. 그것이 그가 가진 마기의 또 다른 힘이었다.
“마나를 씌워볼까.”
가만히 생각해 보던 진은 고개를 저었다.
마나는 파괴에 어울리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힘. 종종 다른 무언가를 도와 파괴적인 모습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순수한 마나 자체는 그다지 파괴력이 없다.
파괴에 어울리는 것은 마나가 아니라 마기다. 마기는 불안정한 힘이고, 때로는 사용자를 다치게 할 정도로 과격하다.
“후우.”
진은 옆에 있던 책 한 권을 들어 그곳에 자신의 마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거라면 손이 다치지 않겠지.”
시커멓게 물든 책을 벽에 집어던지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돌 파편이 튀어나왔다.
폭발에 휘말린 책이 재가 되어버렸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그것을 대신할 책들은 아직 많이 있었다. 진은 또 다른 두꺼운 책 하나를 집어 마기를 우겨넣기 시작했다.



제4화 칼을 이기다


커다란 행운을 입에 넣으려면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위를 가져라.

―그라시안―



수천 권의 책이 모두 사라졌다.
마치 마법을 찾기 위해 애를 쓰던 때처럼 단 한 권의 책만이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칫.”
벽은 움푹 들어갔지만 아직도 구멍은 생겨나지 않았다.
이것마저 사라지면 그 후엔 주먹과 발에 마기를 씌워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하던 진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로 말라 버린 몸에 남아 있던 마기를 모조리 쥐어짜 책에 담았다.
“뚫어라!”
힘껏 집어 던진 진은 그대로 힘이 다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
쿠쾅― 하는 소리가 귓가에 아련하게 들려왔다.
바닥에 쓰러진 진은 왠지 편안한 기분이 들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끝났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라나 점점 채워갈 즈음, 진은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잠이 들면 그대로 끝이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렇게 버티며 턱을 쳐든 진의 눈에 벽 한가운데, 그가 기어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뚫린 구멍 안에서 새어 나오는 찬란한 빛이 보였다. 진은 서둘러 그 구멍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가 있던 서재의 두 배가량 되는 공간이었다.
벽과 천장에 촘촘히 박혀 있는 야명석 덕에 그 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
금은보화라는 말은 이런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리라.
진은 그저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시야 가득 들어오는 것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칼은 이런 게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빌어먹을 자식.”
발견하지 못한다면 갖지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던가.
진은 다시금 칼의 오만한 두 눈을 떠올리며 욕을 내뱉었다.
“후욱, 후우.”
진은 바닥난 마기 대신, 몸에 조금 남아 있는 마나를 쥐어짜내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마나라도 없었다면 움직이지 못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다시금 아기였을 때가 기억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돌 파편을 치울 여력도 없기에 날카로운 돌이 살을 찢고 지나가는 것도 무시한 채 그저 고통만 차단하며 구멍 안으로 완전히 몸을 들이밀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식량은 없었다.
그저 방 한가운데에 풍족하게 쌓여 있는 금화와 은화,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나무 상자들이 보인다.
꽉꽉 채우고도 모자라 뚜껑조차 제대로 닫지 못하는 상자들 안에는 각종 보석과 장신구들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었다.
“아.”
진의 시선을 멈춘 것은 그런 호사품들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방 한쪽 구석, 그곳에는 제각각의 크기를 가진 돌멩이들이 놓여 있었다. 그 돌멩이 겉으로 피어오르는 순수한 기운을 목격한 진은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마나스톤인가?”
칼의 일기에서 본 적이 있다.
마법진이나 여러 마법 연구, 시전에 마법사의 마나를 보조하여 들어가는 소모품.
자연의 마나는 바람이나 물처럼 흐르고 있는데, 그것이 고여 뭉치는 곳에 형성되는 귀한 것이 바로 마나스톤이라 했다.
“으으.”
몸에 힘이 없다. 없는 힘을 쥐어짜며 버티고는 있었지만 이미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못한 채 열흘 이상이 지나 있었다. 이 정도로 움직이는 것도 다행인지 몰랐다.
부스럭 부스럭.
어떻게든 마나스톤 앞까지 기어가는데 성공한 진은 앞에 쌓여 있던 마나스톤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어떤 것은 사람 머리통만큼 컸지만 또 어떤 것은 주먹 크기 정도로 작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지나쳐 작은 것들을 찾던 그의 눈이 비로소 멈춘 곳은 가장 작은, 거의 메추리알 정도 크기를 가진 마나스톤들 앞이었다.
“…….”
진은 여기저기 긁혀 상처로 가득한 팔을 부들부들 떨며 그곳으로 뻗었다.
손아귀 힘이 없어 수차례 놓치면서도 가까스로 하나를 움켜쥔 그는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나무토막 같은 팔을 억지로 끌어당겨 생각할 것도 없이 손에 쥔 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론이고 실험이고 없었다.
그는 음식 속에 있는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
마나스톤이라면, 이 안에 들어 있는 마나라면 그 역시 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이곳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것뿐이다.
그것을 입에 넣었다. 더럽게 크다.
입에 넣기 전까진 만만해 보였는데 막상 넣고 보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다.
“…….”
그렇다고 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애를 먹던 진은 문득 눈에 들어온, 옆에 있던 보석 박힌 지팡이 하나를 들어 그 한쪽 끝을 입에 넣고 마나스톤을 푹 찔러 목 뒤로 쑤셔 넣었다.
“큭!”
숨이 막힌다.
아무래도 걸린 것 같다.
“……!”
두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지만 애써 정신 줄을 붙들고 버티던 진은 여전히 입에 박혀 있던 지팡이를 더욱더 찔러 넣었다.
“크허―!”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왠지 역한 느낌이 들어 지팡이를 뽑고 헛구역질을 했지만 나오는 것이 없었다.
“…….”
완전히 지쳐 버렸다. 그렇게 옆으로 웅크리고 있던 진은 잠시 후, 뱃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움찔 놀랐다.
그 기운은 뱃속에서 시작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몸을 휘돌았는데, 그 뜨거움이 너무나 강해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크읏!”
조금 힘이 생긴 진은 간신히 몸을 돌려 온전히 누웠다.
내장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졌다.
뜨거워진 몸의 열기를 받은 석실 바닥도 조금씩 미지근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후우.”
열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몸에 돌아온 약간의 힘으로 그것이 온전히 소화되었음을 짐작한 진은 지금의 열기가 가시기 전, 비슷한 크기의 마나스톤을 몇 개 더 집어 하나하나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이미 한번 제대로 열어뒀던 덕분인지 삼키는 것이 수월해졌다.
재질이 날카로웠다면 식도가 찢어지는 것을 걱정했겠지만 마나스톤은 온전한 구체를 이루고 있어 다행이었다.
세 개의 마나스톤을 삼키고 별 느낌이 없자, 또다시 네 개의 마나스톤을 더 집어먹은 진은 문득 아까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하게 달아오르는 열기에 온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아무 느낌이 없던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시간차 공격과도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버틴 진은 온몸을 불태울 것 같은 열기만이 아닌, 그야말로 세포 하나하나를 바늘로 푹푹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끙끙 신음을 삼켰다.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흡수한 수많은 영혼들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처럼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
순간, 격한 통증이 후두부를 때렸다. 바깥에서 밀려든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터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에 진은 이를 악물며 부들부들 떨었다.
피인지 침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이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 힘이 생긴 것 같은데 땅바닥에 대못으로 박힌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우드드득.
무언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며 몸이 들썩거렸다.
이미 고통을 차단하고 있던 진은 그 능력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속으로 적잖게 안도했다.
자신의 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이렇게 끔찍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우둑거리며 뭔가가 어긋나는 소리, 기기긱거리는 알 수 없는 소리, 지잉― 하는 의미 모를 이명 등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소리들이 시시각각 그의 귀를 두드려댔다.
“…….”
천장에 박힌 야명석들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밝고 은은한 빛은 왠지 모를 따스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동안 온몸에서 우둑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뭔가 잡아당기는 것 같기도 하고, 뒤트는 것 같기도 했다.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찌릿한 것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것도 같았다. 다시금 고통을 차단한 것이 잘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