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0화
몸의 진동이 거세졌다.
처음에는 바닥과 천장, 이곳 전체가 마구 흔들려 지진이라도 터진 줄 알았지만 다시 보니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었다.
“…….”
이 정도의 흔들림이라면 고통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차단했던 것을 해제하자, 그동안 느껴지지 않았던 온몸의 감각이 제대로 되살아나 막아둔 댐이 터지듯 순식간에 뇌를 강타했다.
“끄으윽―!”
‘일시적인 것이다.’
그 생각 하나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다.
물론 일시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당장은 버티는데 큰 힘이 되었고 어쨌든 버텨냈다.
세차게 떨리던 몸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마찬가지로 고통 역시 조금씩 줄어들었다. 진은 손가락을 까닥여 보고, 이어 발가락도 까닥여 보았다. 이제야 몸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상반신을 일으켜 보았다.
“…….”
몸에서 우수수 떨어진 검은 재를 본 진은 그것이 그가 걸치고 있던 가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나 뜨거웠는지 옷 대신 걸치고 있던 두터운 가죽 한 장이 통째로 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두 손을 본 그는 두 다리, 배, 가슴, 양쪽 어깨를 내려다보고 또 만져보기도 했다.
“아.”
자랐다. 완전히 자란 몸이다.
주먹을 쥐었다 펴본 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보았다.
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 몇 군데에서 뻐근한 느낌이 전해져 오지만 괜찮았다.
“후우.”
허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금 몸에 활기가 돌고 있다.
그제야 새삼 이곳에 있는 재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것이 아니라면 칼의 능력을 의심했을 수도 있었다.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이라며 항상 자신을 드높였었지만 지금까지로 보면 그저 가장 가난한 드래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강했었다.
허나 지금은 이것을 보며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바위 문은 여전히 닫혀 있다.
“…….”
당장 필요한 것은 힘이다.
저 두꺼운 바위 문을 부수거나, 아니면 당겨 열 수 있을 정도의 힘이 필요하다. 확실히 자라난 몸이긴 하지만 맨손으로 가능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쇠지레 같은 것이 있으면 써먹을 테지만 그런 건 이곳에 어울리지 않으니 아마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진은 그나마 길쭉한 것들은 나무 재질로 된 마법사용 지팡이 따위였기에 고개를 저으며 알몸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키를 훌쩍 넘기는 금화의 산 주위를 돌며 이것저것을 돌아보던 진은 문득 바닥에 새겨져 있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이쪽으로?
한글이다.
친절하게 화살표도 그려져 있다.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보니 작은 간이 천막 같은 것이 있었다.
스티커 사진을 찍는 곳 비슷한 느낌이 드는 그곳에는 커튼처럼 드리워진 비단 천이 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옆으로 휙 열어젖히던 진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곧 다시금 평정을 되찾았다.
“…….”
그 안에는 황금의자,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지만 그 눈매가 왠지 익숙했다.
진은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방부 처리라도 한 건가.”
가만히 중얼거리던 진은 새삼 눈앞에 앉아 있는 칼의 온전한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 말고 다른 부분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딱. 딱.
칼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보았지만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어이, 일어나라고. 네가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해줘서 내가 갇혔잖아.”
그렇게 말하던 진은 자신 역시 경솔하게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건드려보다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음?”
칼은 무릎 위에 수정구 하나를 올려두고 있었다.
두 손을 다소곳이 그 위에 포개둔 것을 보니 마지막에 행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근데 겉으로 드러난 수정구 위에 또 뭔가가 쓰여 있었다.
나가고 싶다면 만져라.
또 한글이다.
참 배려 깊은 녀석이다.
그것을 보고 손을 내밀던 진은 문득 그 자리에 멈추며 얼굴을 구겼다.
“…….”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칼의 얼굴을 보니 더더욱 그렇다.
툭툭.
칼의 뺨을 손으로 쳐봐도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방금 잠이 들었다고 생각할 만큼 정상적인 혈색과 달리 무척이나 차가운 것을 보니 확실히 죽긴 한 것 같았다.
“어쩌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칼이 뭔가 허튼수작을 부려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정이 있던 터라 다시금 손을 뻗은 진은 칼의 무릎에 있던 수정구를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알 속에 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칼이 자신의 정신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조금은 자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칼이 부서졌다. 아니, 부스러졌다. 가루처럼 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뺨을 두드렸을 때만 해도 차갑기만 했지 딱딱하게 굳지도 않고 말랑거렸던 온전한 육신이 가루처럼 부스러져 내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그것은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재 한 줌조차도 남기지 않고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사라져 버린 칼의 빈 의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진은 문득 수정구를 들고 있던 두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에 그만 그것을 놓쳐 버렸다.
파삭―!
바닥에 떨어진 수정구는 속이 비어 있던 것처럼 아주 쉽게 박살이 났지만 이미 그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 안에 있던 무형의 기운이 수정구가 깨지자 그대로 튀어나와 그의 온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으윽!”
그것은 칼이 남긴 메시지.
그동안 한 번도 지지 않았던 그의 자의식을 우스울 만치 짓이기고 들어온 그것은 다른 영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애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그의 머리 한쪽에 자리 잡아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칼의 메시지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다. 알 속에 있을 때 무수히 많이 말하고 또 말했던 것들과 같은 내용이었다.
다만 그가 주입하고 있는 메시지엔 공통된 전언 하나가 있었다.
[나는 칼 헤이먼이다.]
옆 사람의 말처럼, 지나가는 사람의 흥얼거림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말 한마디가 그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진의 자의식을 일깨웠다.
그것에 맞서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게 대립의지를 갖자마자 그동안 진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칼의 메시지들이 갑자기 성난 파도처럼 이리저리 헤집기 시작했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진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칼 헤이먼이다.]
“웃기지 마!”
발악하듯 소리쳐 봤지만 조금씩 머릿속이 무언가로 물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푹.
비틀거리던 진은 문득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깨뜨린 수정구의 파편이었다.
그 아픔을 차단하지 않고 그대로 느끼며 자신을 관조하던 진은 비로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며 머릿속을 장악하려는 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칼의 의지였다. 영혼이 없는 의지 덩어리가 그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서둘러 정신을 집중한 진은 머릿속을 가득 채워가던 칼의 의지를 눌러 버리려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정신력 싸움을 벌인 후에야 어렵사리 승기를 잡을 수 있었지만 아직도 어지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크윽.”
주춤주춤 물러서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던 그는 문득 울컥하며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검붉은 피를 내려다보며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었다.
칼의 의지는 너무나 강렬했다. 영혼이 없는 단순한 사념이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지만 아직도 스스로가 칼인지 강진인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강진이다.’
곧바로 튀어나오는 본능 같은 생각.
그것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한 수였나?”
먹힐 뻔했다. 분명 자신을 먹으려 했고, 그럴 수 있었다.
“후우.”
칼이 그에게 심으려 했던 것들 중 적지 않은 것들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칼의 기억 일부분, 끝끝내 거부하며 자신을 지켰기에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 레어와 관련된 것들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한숨을 내쉰 진은 발바닥에서 수정구의 파편을 뽑아내고 절뚝이며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방 한쪽, 그곳에는 그의 몸에 잘 맞는 가죽바지와 상의가 있었다. 칼이 준비해 둔 것이다.
신발은 없다.
신발은 위층의 잡동사니 창고에서 많이 봤으니 그곳에서 찾아 신으면 되겠지 싶었다.
“…….”
진의 얼굴에선 더 이상 긴장감을 찾을 수 없었다.
이곳의 풍경이 너무나 익숙했다. 무엇이 있는지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는 옷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나무상자를 집어 들고 그 덮개를 위로 젖혔다.
“정확하군.”
칼의 기억대로 그 안에는 별 장식 없는 금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른 손가락에 끼우니 스르르 녹아버린 그것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 팔뚝 한가운데에 자리 잡더니 작은 문신이 되었다.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던 진은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가 그가 기어들어 왔던 구멍 앞에 서서 다시금 돌아섰다.
앞으로 휙 뻗은 오른손.
이어 허공에서 무언가를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것 같은 동작을 행한 그는 그대로 구멍을 나왔다.
그가 지나온 밀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벽에 박혀 있던 야명석조차 사라진 밀실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네 무덤에는 어둠이 어울려, 칼.”
그렇게 말하며 돌아선 진은 천천히 서재를 나선 후 지하 공동을 가로질러 여전히 굳게 닫혀 있던 바위 문 앞에 섰다.
“후우.”
두 주먹에 마기를 담았다. 확실히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두 팔이 통째로 터져 나가더라도 부수고 싶었다.
이것은 칼이 마련한 최후의 덫이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온몸에서 끓어오르던 시커먼 마기가 두 팔로 모여들어 단단히 뭉치기 시작했다.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여기서 끝나는 거야, 칼.”
이를 악물며 중얼거린 진은 반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그대로 미끄러지듯 내달려 두 주먹을 바위 문 정중앙에 꽂아 넣었다.
진일권법(眞一拳法)!
그것은 칼에게서 배운 권법 중 하나로, 진일검법(眞一劍法)과 더불어 ‘단 하나의 진짜’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 묘리는 9할 이상의 허수와 1할 이하의 실수로 구성되어 있지만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허수와 실수를 자유자재로 뒤바꿔 실수였던 공격을 허수로 둔갑시키거나 허수와 실수의 비율을 바꾸어 모든 공격에 실수에 준하는 살의를 담을 수도 있는, 변화폭이 아주 넓은 무공이었다.
해치기 위한 공격과 위협을 주기 위한 공격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에 대응하는 자들 역시 경험, 혹은 본능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파악하고 대응하게 되지만 진일검법과 권법은 그런 상대의 판단력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것에 목적을 둔 기술이었다.
지금 진의 주먹에 담겨 있는 것은 그중 진일권법에 내재된 유일한 1할, 살의의 정수를 한 번의 공격에 집중시킨 주먹이었다.
어린 육체였다면 도전하는 것만 해도 자살과 같은 행위겠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몸이 이번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눈앞의 이 바위, 칼이 준비했던 감옥의 입구가 그의 권을 받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문이 그의 힘보다 강하다면 부서지는 것은 진이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문이 부서질 것이다.
쿠와앙―!
묵직하고 둔탁한 소리가 지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난 진은 힘없이 늘어뜨린 두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크윽.”
두 팔의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버린 듯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고통을 차단해 아프진 않았지만 덜렁거리는 팔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