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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내가 이겼어.”
하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한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멀쩡해 보이는 바위 문 앞에서 오른발을 들어 퍽 하고 밀어 찼다.
콰르르르―
그러자 조금 전 그가 주먹을 내질렀던 곳을 중심으로 짜자작 금이 가더니 곧 그 커다란 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진은 덜렁거리는 두 팔을 매단 채로 그 바깥으로 나가 계단 위로 향했다. 지하에서 일어난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계단 위는 너무나도 고요했다.
진은 식량 창고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한 진은 지하의 밀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른손을 뻗으려 했지만 여전히 신경이 살아나지 않은 팔은 어깨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을 뿐,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다만 그의 의지에 반응한 듯, 그 안에 있던 산더미 같은 식량과 진열된 술 따위가 모조리 일그러지듯 공간 저편으로 빨려 들어갔다.
텅 빈 식량 창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마르지 않는 샘뿐이었다.
조금 목이 말라 샘으로 다가간 진은 그제야 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쳇.”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얼굴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항상 어렴풋이 생각해 왔던 ‘이 정도 얼굴은 되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의 부풀림이 반영된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예전 세상에서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두 눈은 여전히 칼의 것을 닮은 모습이었다. 자라고 나니 더욱 비슷해진 것 같았다. 물속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닌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자 픽 웃음이 나왔다.
“그곳이 네가 있을 곳이야.”
넌 실패했어, 칼! 내가 이겼어!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한 진은 그 뒷말은 속으로 외쳤다.
마찬가지로 그를 향해 말하던 샘물 속 낯선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진은 문득 그곳에 얼굴을 처박으며 마주 보던 얼굴을 흐트러트리고는 몇 모금의 물을 꿀꺽꿀꺽 삼킨 후 일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온갖 무구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발에 맞는 가죽 신발 하나를 고른 그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 때문에 제대로 조이거나 묶어볼 수가 없어 그저 털레털레 신고 돌아다니며 창고 안의 물건들을 돌아본 후, 마찬가지로 의지를 통해 창고를 싹 비워 아공간에 털어 넣었다.
“…….”
뒤이어 식량 창고와 마찬가지로 텅텅 빈 그곳에서 돌아서려던 진은 문득 그 한쪽 바닥에 박혀 있는 커다란 검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다른 것들이 전부 사라졌는데도 혼자 덩그러니 땅에 박혀 있었다.
“…….”
바닥 깊이 박혀 있는 그것은 제법 두껍고 커다란 날을 가진 외날 대검이었다. 누군가 한참 사용하던 물건인 듯 긴 자루와 검신 곳곳에 상처가 잔뜩 있었다.
왠지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엑스칼리버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 검이 지금 보이는 이것처럼 무식하게 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음.”
검 옆으로 다가서던 진은 문득 그 검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마기에 눈을 좁혔다. 조금 움직임이 가능해진 두 손으로 자루를 쥐고 슬쩍 뽑아보려 했지만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두긴 좀 그런데.”
하나라도 더 챙기고 싶었다. 칼이 갖고 있던 것은 모조리 빼앗고 싶은 마음이었다.
석실 바닥에 박힌 대검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은 그 옆에 편하게 앉아 양쪽 부츠를 조이고 가죽 끈을 단단히 동여맨 후, 아공간에서 빵 하나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마나스톤을 먹는다면 더 빨리, 더 많은 마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껴야 했다. 딱 보기에도 비싼 것 같다는 건 둘째치고라도 식량이 아직 엄청나게 많이 남았는데 당장 편하자고 그것부터 먹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 배를 채우는 동안 천천히 회복되던 팔이 어느 정도 제 힘을 찾았다. 안쪽이 흐물흐물했었지만 터져 버리거나 하지 않고 모양은 지키고 있었기에 회복이 빨랐던 모양이었다.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난 진은 앞에 있던 검 손잡이를 굳게 쥐었다.
땅 위로 보이는 검신은 대략 50센티미터. 대충이나마 형태를 짐작해보면 땅속으로 1미터 정도 박혀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곳의 바닥이 보통의 흙바닥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흐읍.”
마나를 이끌어 두 팔과 다리, 허리에 휘감은 진은 잔뜩 힘을 준 손으로 다시금 대검을 잡아 올렸다.
“적당히 뽑고 나서 흔들면 다 빠져.”
원래 다 그런 것이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식이었다.
“…….”
하지만 안 그런 경우도 가끔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경우였다.
온 힘을 다했는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마기를 불어넣어야 하나?”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은 조심스레 마나 대신 마기를 불어넣어 보았다.
우우우웅―
그러자 검이 반응했다. 그가 불어넣은 마기를 그대로 빨아들이기 시작한 검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호오.”
더욱더 많은 마기를 주입해 본 진은 검의 겉에 있던 자잘한 상처들이 조금씩 메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계속 해서 마기를 불어넣으며 위로 당겨보니 그제야 조금씩 뽑혀 나오는 검이었다.
온전히 뽑아낸 대검은 더욱 상태가 엉망이었다.
마기를 집어넣던 진은 왠지 끝도 없을 것 같아 일단 아공간에 넣어두었다. 나중에 마기가 흘러넘칠 때마다 조금씩 회복시키면 될 것 같았다.
“때가 왔구나.”
레어를 나설 때가 왔다.
기연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하에서 굶어죽었을 것이다.
“…….”
기연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기연. 진은 이를 뿌드득 갈며 주먹을 쥐었다.
레어에는 입구가 없다. 애초부터 없다.
칼은 텔레포트를 통해 드나들 수 있었기에 필요시에만 공간을 열 뿐, 처음부터 입구를 만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진은 다시금 칼의 마지막 안배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벽을 부수고 밀실을 찾아낼 것을 어떻게 알고 준비해 두었을까?
수정구를 만질 거라고 어떻게 확신했을까?
칼은 자신의 놀이판 위에 그를 올려놓았다.
유일하게 실수한 점이 있다면 그가 마나스톤을 먹고 힘을 되찾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힘을 되찾지 못했다면 칼의 정신 장악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
칼은 분명 그를 장악하려 했다.
자신의 모든 기억을 주입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면 지금의 그는 강진도 아니고, 칼도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칼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그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그의 복수를 대신 해준다는 것 자체에 의심이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가 자신의 실수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
그는 샤룬드 아인의 힘에 해당되지 않는 몸을 갖고 다시금 세상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 같다. 돌아가서 무얼 할 작정이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칼만이 할 수 있으리라.
철저하게 이용당할 뻔했다는 생각이 다시금 진을 열 받게 했다.
아공간에 집어넣었던 대검을 다시 꺼내든 진은 그대로 흑영보를 통해 반쯤 뛰다시피 걸어 레어 남서쪽, 평범한 벽 한곳으로 가서 들고 있던 대검에 마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곳이 칼의 기억대로라면 가장 두께가 얇은 벽이다. 이곳에 출입구가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는데, 정확히는 출입구가 아니라 필요시마다 그가 열고 닫았던 부분이었다.
마기를 한껏 머금은 검이 시커멓게 물들어 울음을 토해냈다.
“흐얍!”
힘껏 벽을 내리치자, 단단했던 벽이 바깥으로 터져 나가며 강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윽!”
오랜 시간 제대로 된 빛을 보지 못했던 탓에 갑작스런 빛이 너무나 눈부셨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던 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밖을 노려보았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새파란 물이었다.
그 너머로 보인 것은 새파란 물이다.
역시 그 뒤로 보이는 새파란 물에 그는 눈을 더 크게 떠보았다.
“…….”
진은 뚜벅뚜벅 바깥으로 걸어 나가다 흠칫 발을 멈추었다.
깎아지른 절벽 정중앙에 뚫린 구멍. 그것이 그가 서 있는 곳이었다.
소금기가 느껴지는 해풍이 머리칼을 간질였다.
“뭐?”
바다다.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구멍을 나온 진은 옆에 나 있는 작은 길, 길이라 볼 수 없는 그저 발 하나 정도 걸칠 수 있는 바위 틈새를 따라 절벽 위로 올라갔다.
“…….”
절벽 위로 올라서니 주변 일대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 넓은 곳은 아니었다. 딱 레어 정도 너비의 땅 주변으로 아름다운 모습들이 펼쳐져 있었다.
북쪽의 바다. 동쪽의 바다. 서쪽의 바다와 남쪽의 바다.
“대륙이라며.”
진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씹어뱉듯 말했다.
“대륙이라며, 썅!”
제5화 바다를 건너
역경은 청년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가치이다.
―에머슨―
콰직―!
파삭!
섬이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있다. 섬이다.
“…….”
딱 레어만큼. 그 정도 면적이다.
레어 위로 봉분처럼 볼록 솟은 육지. 그 위로 약간의 나무들이 자라 작은 숲을 이루고 있지만, 한 바퀴 둘러보니 이렇다 할 동물도 살고 있지 않다.
식량이 없었다면 당장 그것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고 생각한 진은 섬 주위가 한눈에 보이는 높다란 절벽 위에 앉아 빵을 우물거리다 문득 먼 바다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육지가 있었다. 그리 먼 것 같지 않다.
정확한 거리를 알 수는 없지만 길어도 10킬로미터는 안 될 것 같다.
헤엄쳐서 가는 건 무리다. 진은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물결이 거센 것은 아니었고, 투명한 바다 아래로 깊은 곳까지 눈에 들어오지만 그렇다고 숨어 있는 마수가 없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콰직! ……콰지직―!
진은 나무를 베고 있었다.
도끼질이 아닌, 그의 커다란 검에 마기를 씌워 섬 위로 솟아 있는 나무들의 밑둥치를 그대로 날려 버리며 달리고 있는 것이다.
백여 그루의 크고 작은 나무를 모조리 벨 기세였다. 실제로도 모두 베고 있었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섬의 모든 나무를 쓰러뜨린 후 헥헥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그는 눈여겨보았던 가장 커다란 나무의 가지를 쳐 통나무를 만든 후, 지대가 낮은 북서쪽 해안가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단검을 뽑아 들고 그것에 마나를 주입한 진은 통나무의 한쪽 껍질을 벗겨낸 후, 단검으로 그 속을 파내기 시작했다.
마기를 사용했다면 나무가 터져 버릴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선 마나가 좋다. 이런 단단한 통나무도 두부 잘리듯 서걱거리며 잘라진다.
푹. 푹.
처음 해보는 일이라 무척 서툴긴 했지만 그럭저럭 속을 파낸 통나무를 만들 수 있었다. 어설픈 카누 형태의 통나무배다.
그것보다는 작고 서로 비슷한 크기의 통나무를 두 개 더 찾아 가져온 그는 마찬가지로 속을 파낸 후 그 옆에 홈을 파 팔뚝 굵기의 나무로 관통, 커다란 카누 양쪽에 연결시키고 로프로 단단히 고정했다.
“이 정도로 뜨려나?”
그냥 보아도 무척이나 어설펐다.
조심스레 물로 밀어보니 그럭저럭 잘 뜨기에 새삼 만족하고 다시 끌고 온 진은 길이 10미터가량의 배를 그대로 훌쩍 뒤집고 아래에 통나무들을 받쳐 햇빛에 말리기 시작했다.
배를 만드는 법은 모른다. 그저 어딘가에서 보거나 한 것들의 모양만을 흉내 냈을 뿐이기에 언제 어떻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저 육지까지라도 잘 가주기를 기대하며 배를 탁탁 두드린 진은 돛대를 만들까 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바람도 잔잔하고, 어설프게 만드느니 안 만드는 게 낫지 싶었다.
“일회용 배에 그런 사치는 필요하지 않아.”
그저 자투리 나무들을 깎아 튼튼한 노를 크기별로 많이 만들어 배의 옆에 말리기 시작한 진은 혹시 모르기에 같은 모양의 배를 한 척 더 만든 후, 레어로 돌아가 물을 채운 나무 술통 몇 개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