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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벌써 해가지려 하고 있었다.
손도끼 하나를 꺼내 든 진은 한곳에 지저분하게 쌓여 있던 통나무들을 훌쩍훌쩍 뒤집어가며 굵고 가는 가지들을 툭툭 쳐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하나를 다듬는 데도 무척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역시 마나라는 힘이 있으니 전기톱을 가진 목수 부럽지 않게 빠른 속도로 일할 수 있었다.
칼이 마기에 집착한 것은 샤룬드 아인 때문이었다.
샤룬드 아인의 원리는 애초 마기를 가진 이들의 마기 자체를 무력화 내지 약화시키는 데에 목적을 가진 것이었지만, 인간들이 그것을 조작하여 마기가 아닌, 마나를 일정 수준 이하로 약화시켜 버린 것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원래의 목적인 마계에 대한 대비는 사라지고 오히려 마계의 존재들이 나타나면 더욱 약해진 힘으로 대항해야 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인간들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장기적인 불행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반대인 사람도 있고, 전혀 다른 사람도 있지만 결국 몇몇 부류의 행위가 전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그 영향 안에서 다시금 새로운 상황이 생겨나게 된다.
그는 공병 출신이었다.
익숙지 않은 도끼질이 쉬울 리가 없었다.
차라리 삽질이 낫겠다고 투덜대던 진은 그래도 쉬지 않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모든 나무를 어느 정도 다듬을 수 있었다.
가지를 친 통나무는 모조리 아공간에 우겨 넣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자신의 아공간을 들여다본 진은 아직 10분의 1도 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공간 아티팩트.
이것은 칼이 직접 만든 것으로, 혹시나 만약의 변수로 인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대리 복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루하루 지나며 아직 남아 있는 그의 기억을 정리해 보니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다.
다만 복수 자체는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마룡의 이야기와 인간들의 배신도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그가 가졌던 계획은 진이라는 이계의 존재를 불러와 인간들, 그 가장 앞에 서서 이종족을 핍박했던 제국을 벌한다는 단순한 계획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런 오지에 봉인당한 이후, 그가 계획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지 인간에게 복수하겠다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났다.
그가 소멸시킨 마룡 카락슈탈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영원한 잠에 들었다. 그의 복수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할 이유가 없다.
다만 애초에 약속했던 대로 자신의 능력이 닿는 만큼은 해줄 작정이었다. 그것은 한 번의 죽음으로 의미 없이 끝났어야 했을 그의 생에 두 번째 기회를 준 것에 대한 아주 작은 보상이다.
어쩌면 그저 스스로의 만족감을 위한 구실인지도 모른다. 딱히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칼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가 있었고, 제안이 있었다. 진은 그것을 수락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더 있었다고 해서 애초의 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조금 과한 억지였다.
물론 그가 원했던 작은 복수를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받거나 벌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내키는 대로 할 것이다.
“내 멋대로 할 거야. 그게 너에 대한 나의 복수다.”
진은 마치 그 시절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 후, 들고 있던 손도끼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일주일 동안 배를 말렸다.
원래 삼 일만 말리려고 했었는데 중간에 비가 한번 와서 도루묵이 됐다.
통나무를 만들면서 생겨난 자잘한 나무토막과 가지들 역시 쓸어 담듯 아공간에 쟁여놓은 진은 작은 풀들과 잘려 나간 나무둥치만이 가득한 작은 섬을 떠나기 위해 그가 만든 배를 바다에 띄웠다. 잘 말랐는지 처음보다 물에 잘 뜨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조금 몰고 나갔다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며 물속에 무엇이 있는지, 배에는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보수할 부분을 보수하는 데에 또다시 하루가 걸렸다.
비로소 다음 날 제대로 준비하고 배에 오른 진은 양쪽 측면에 파놓은 홈에 길고 굵은 노를 걸고 조심조심 저어보기 시작했다.
노를 젓는 일은 몇 번 해본 적 없었지만 조금 젓다 보니 군에서 공격단정을 탔던 때가 떠올랐다.
그 시절에는 이렇게 풍경을 즐기거나 할 여유 없이 죽자 사자 노를 저으며 타군 병력을 실어 날랐을 뿐이지만 노의 길이와 배의 형태가 다를 뿐, 기본적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조금 익숙해지자 팔에 힘을 준 진은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자세를 파악해 가며 최소한의 힘으로 최적의 움직임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노를 고쳐 쥐었다.
“음?”
그러던 그는 문득문득 배가 갈지자를 그리는 것 같아 방향을 바로잡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역시 잘못 만들었나.”
가라앉지 않는 게 어디인가 싶어 다시금 힘을 주어 노를 젓기 시작한 진은 적당히 방향을 유지해 가며 양쪽 노를 젓는 힘을 조절했다.

육지가 보이는 방향으로 섬을 반 바퀴 돌아보니 가파른 절벽 위로 레어 입구가 눈에 보였다. 진은 잠시 노를 멈춘 진은 그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곳은 그가 태어난 곳이었다. 그에겐 고향과 다름없었다.
절벽으로 드러난 지층의 모습은 마치 어딘가에서 쩌억 하고 떨어져 나온 것 같은 형상이었다.
“…….”
아쉬움은 없었다. 아공간에서 빵 하나를 꺼내 입에 문 그는 다시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쾌청한 날씨였다.
혹시나 눈에 보이는 육지가 신기루는 아닐까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별수 없었다. 떠나온 섬이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면 그 방향이 바로 저곳이기에 그 외에는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진은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온 후에도 노를 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팔이 아파 속도를 조금 줄이긴 했지만 노를 놓거나 배를 멈추진 않았고, 너무 아파 견디기 어려워진 후엔 고통을 일부 차단해 가며 둔한 감각으로 계속해서 노를 저었다.
근육이 다치더라도 마기가 있으니 오래지 않아 회복될 것이다. 그가 멈추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지.”
해가 솟아오를 즈음, 사위가 밝아오는 것을 본 진은 정확히 정면에 있던 육지가 조금 왼쪽으로 옮겨져 있는 것을 보며 중얼거리곤 방향을 틀어 다시금 정면으로 맞춰놓았다.
편히 잠들었으면 어디로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흘러갔을지 모른다.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
바닷물은 티 없이 맑아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예전 세상에서 티비를 통해 보았던 어딘가의 바다를 닮은 물속에서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모습을 보며 노를 저었지만, 그 속도가 첫날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노를 거두고 자리에 드러누운 그는 무척이나 저린 두 팔을 꾹꾹 주무르며 처음으로 휴식을 취했다.
육지가 무척 가까워졌다.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던 진은 조금씩 커져 가는 육지의 모습을 보며 확실히 신기루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의 단면은 역시나 섬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한 덩어리였다가 떨어져 나간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엉뚱한 곳으로 가더라도 원래 방향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정도로 가까워진 후에야 처음으로 바다 위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꼬박 사흘 밤을 새우며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노를 저었던 진은 적잖게 지쳐 있던 터라 금세 잠이 들었다.

밤사이 그렇게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다행히도 이쪽의 바다는 무척이나 잔잔하다.
오히려 육지 방향으로 움직였는지 해가 지기 전보다 훨씬 크게 다가온 육지를 보며 다시금 노를 젓던 팔에 힘을 더하던 진은 문득 1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것 같은 거리, 갈색 지층이 드러난 높은 절벽 위에서 훌쩍 떨어지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허연 것 같은데 정확히는 알 수 없던 그것은 절벽 가까이까지 접근하고 나서야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
물속 깊은 곳에 시체 하나가 가라앉아 있었다. 큼직한 바위에 다리가 묶여 있던 시체는 확실히 남자였고, 벌거벗은 몸이었다.
건장한 체구에 약간의 근육도 붙어 있는 금발의 청년. 그의 사인(死因)은 검이었다.
가슴팍을 관통하여 여전히 꽂혀 있는 장검 하나가 보였다. 그것을 뽑지 않아서인지 피도 그리 많이 흘러나오진 않고 있었다.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저 시체가 바다로 떨어진 지도 조금 시간이 흐른 상황이었다.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끄응.”
들어가서 꺼내줄까 생각해 보던 진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는 수영을 못한다. 게다가 피 냄새를 맡았는지 멀찍이서 다가오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상어와 닮았지만 등지느러미가 없는 그것들은 물 바닥에 배를 붙인 듯 깊이 잠수한 채로 그림자처럼 스멀스멀 접근하고 있었다.
그 시커먼 녀석들을 보니 다음 장면이 어찌 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진은 천천히 배를 돌려 절벽 옆을 타고 돌았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안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좋군.”
적당히 배를 몬 진은 절벽 한쪽, 올라가기 수월해 보이는 완만한 경사 지대를 찾아 배를 바짝 대어 멈추고 물로 뛰어들어 그쪽 사면을 딛고 올라섰다.
“음.”
흔들거리는 배를 어째야 하나 생각했다.
이제는 필요가 없긴 한데, 막상 그대로 두려니 아까운 게 사실이었다. 진은 그것을 아공간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이미 제 역할을 다한 배지만 써먹지 못한 비상용 배와 함께 차후 재활용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정 안 되면 땔감으로 써도 된다. 아껴야 잘산다.
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법 단단한 토질이라 부스러지지 않아 다행이었고, 경사도 어림잡아 60도 정도로 그리 심하지 않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쉬어가며 절벽 위로 올라선 진은 슬쩍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주 넓은 땅이었다. 바다를 보니 멀리 그가 떠나온 섬이 보여야 할 텐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쪽에선 이쪽이 확실히 보였는데 여기선 그곳이 안 보이는 것이다. 아마도 마법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어이쿠.”
바다 반대쪽으로는 드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토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가문 걸까 발로 구르고 살짝 찍어보니 그리 바싹 마른 것 같진 않은데 풀이 별로 없었다.
풀이라고 있는 것도 질긴 잡초 종류가 다였다. 나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허리를 굽혀 손으로 땅의 흙을 만져보던 진은 손 안에서 부스러지는 갈색 흙 위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오염된 건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던 진은 이 땅에 마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주 희박한 수준이었지만 그 정도로도 식물이 자라는 데는 큰 악조건인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사람이 살까 싶었다.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환경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지만 아까 전 보았던 시체는 분명 사람이었기에 근처에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는 있었다.
진은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어야 할지 알 수 없기에 흑영보를 배제하고 보통의 보폭으로 걸었지만 한참을 걸어가며 몇 개의 언덕을 넘는 동안에도 여전히 퍽퍽한 땅만 이어질 뿐,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무덤덤한 얼굴로 큼직한 언덕 하나를 넘고 나서야 처음으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데 그들에겐 그다지 반겨줄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끼야아아―!”
“사람 살려!”
“도망쳐요, 어서!”
누더기 같은, 아니, 확실한 누더기를 걸친 몇 명의 사람들이 무언가에 쫓겨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쿠뤠액―!
덩치 크고 시커먼 것이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는데, 멀리서 본 그것은 멧돼지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멧돼지로 보기엔 너무 크다는 것, 황소도 찜 쪄 먹을 만큼 커다란 녀석이었다.
“…….”
언덕 위에서 먼 아래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진은 사실 도울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곧 지금 고민하는 그 자체를 두고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사람의 위기를 보고 도울까 말까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말라 있었다. 새삼 다시 생각해 보니 섬을 떠나 처음으로 사람을 발견했는데도 그리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몸도 마음도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쳇.”
오른손을 뻗어 허공에서 그의 대검을 뽑아 든 진은 간만에 그의 마기를 빨아들인 검이 기분 좋은 울음을 토해내는 것을 보며 뺨을 씰룩거렸다.
“멧돼지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그는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소문으로는 최전방의 경우 야생 멧돼지를 오인사격하거나 하는 경우가 생긴다던데 그게 그렇게 맛있다고 들었다.
물론 부풀려진 바가 없지 않겠지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은 검을 고쳐 쥐고 흑영보를 밟았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언덕에서 사라졌다.
쿠웨웨웩―!
“엄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