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3화


울부짖으며 달려가던 일단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의 여성이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서둘러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를 다쳤는지 쉽게 일어나지 못하던 그녀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투걱. 투걱.
거친 발소리가 땅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보니 채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걸쭉한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는 하울페그가 보였다.
그동안 하울페그에 잡아먹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녀가 그 처지가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었다.
“…….”
녀석들은 산 채로 팔다리부터 뜯어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팔다리를 잔뜩 오므렸다.
쿠웨애―!
아주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는 것 같았다. 하늘이 모두 가려져 어둠이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이미 몸에 있던 기운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처럼 눈조차 감아보지 못하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티캉! 티캉! 부그그극―!
문득 귓가에 들려온 소리가 있었다.
둔탁한 무언가가 맞부딪는 소리가 짧게 두 번 이어진 후, 단단한 가죽 북이 찢겨지는 것 같은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꾸워어억!
후두두둑. 무언가가 그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뜨거운 흙먼지를 흠뻑 끼얹었다.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이어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
그녀가 바라본 정면엔 아무것도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니 그곳에 널브러져 꿈틀대고 있는 하울페그의 거대한 덩치가 보였다.
“히익!”
바로 옆이었다. 그대로 뒹굴면 깔릴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녀는 혼백이 달아난 얼굴로 벌벌 기며 뒷걸음을 쳤지만 곧 동작을 멈추고 다시금 하울페그를 보았다.
길게 이어진 길을 만들며 널브러진 녀석의 뒤로 시뻘건 피와 내장이 쏟아져 있었다.
게다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서 훌쩍 뛰어넘어 온 검은 머리의 사내가 무척 거대한 검을 휘둘러 녀석의 목을 반 정도나 갈라 버렸다.
“아아.”
하울페그가 죽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새끼도 아니고 다 자란 하울페그가 사냥당한 것이다.

진은 천천히 뒤로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여자인 것은 지금 보아서 알게 되었다.
“…….”
멀리서 볼 때 누더기였던 차림새는 가까이 와서 보니 훨씬 심했다. 차림새가 엉망인 건 둘째치고 언제 씻었는지 모를 만큼 지저분해서 여자인 줄 몰랐었다.
다른 이들이 달아난 것은 이미 보아서 알고 있었다. 배려심이나 용기가 없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미 예전부터 약속된 것처럼 한 명이 넘어지자 다른 이들이 더욱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모함이나 음모는 아닐 것이다. 달아나는 이들에게서 느껴졌던 것은 단순한 생존 본능이었다. 아마도 부상자를 어떻게 한다고 해서 함께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이리라.
그것은 암묵적인 합의와 같은 것. 다행히 목숨을 건진 여자였지만 이 자리에 그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옆에서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는 저 녀석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다 다시금 풀썩 주저앉은 여성의 다리를 보니 뛰다가 돌을 밟고 넘어졌는지 발목 한쪽이 빠진 것 같았다.
“…….”
뚜벅뚜벅 다가가며 그녀의 다리를 향하는 진을 올려다본 여성의 표정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
필사적인 표정이었지만 다가가 한쪽 다리를 잡자 신음을 삼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체념이라도 한 듯 조금 멍해진 얼굴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여성의 다리를 만져보고 있던 진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름이 뭐지?”
“네?”
“이름.”
“제, 제 이름은…….”
우둑.
“끼야악!”
그녀가 이름을 말하려 할 때, 진이 단번에 발목을 맞춰 끼워 박았다. 군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경험 덕에 제대로 맞출 수 있었다.
“흑. 흐흑.”
너무나 아팠는지 낮게 울기 시작하던 그녀는 곧 자신에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다시금 하울페그의 시체를 향하는 진을 볼 수 있었다.
진이 다시금 여성을 향한 것은 잠시 후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세, 세민입니다.”
겉보기로는 스물도 되지 않아 보이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 때문에 자연히 존대가 나오던 그녀는 뒤이은 진의 물음에 멍한 얼굴을 했다.
“불 피울 줄 아나?”
“…….”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진은 흐음, 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곤란하군. 이 맛있다는 걸 두고.”
진심으로 난감해하는 진을 본 세민은 맛있다는 그의 이야기에 아연실색했다.
그녀는 하울페그가 사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하울페그들은 이 일대에서 가장 위험한 몬스터였고, 오히려 인간들이 사냥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진은 그동안 불을 피워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새삼 뺨을 긁었다. 레어에서도 불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주식은 빵, 말린 고기, 과일이나 애초부터 훈제되어 있던 고기 정도였다. 생고기도 있긴 했지만 다른 먹거리도 많은데 굳이 불을 피워 익혀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었다.
“별수 없군.”
진은 옆 땅에 박아두었던 그의 대검을 뽑아 녀석의 머리를 완전히 베어냈다.
사실 녀석을 죽인 것은 반쯤 우연이었다. 그럭저럭 쉽게 벨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녀석의 가죽이 의외로 무척이나 단단했고, 머리에 나 있는 뿔은 더욱 심해 그의 검을 튕겨낼뿐더러 손아귀마저 얼얼했다.
결국 두 번이나 검을 튕겨낸 녀석이 훌쩍 뛰어올라 덮치려 할 때, 그 아래로 피하면서 대검을 세워들자 녀석이 스스로 그 위를 지나가며 자신의 배를 갈라 버린 것이었다.
뒤이어 녀석의 목을 벨 수 있던 이유는 마기였다. 마기를 씌우고 나서야 제대로 벨 수 있었다.
조금 기분이 나빠진 진은 마기를 실은 발로 녀석의 몸통을 걷어차 뒤집었다. 열려 있는 뱃가죽 안쪽에 남아 있던 약간의 내장과 고여 있던 피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하면 되나, 아 이렇게. 음.”
대검을 들고 자로 재듯 이곳저곳을 따져보던 진은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마기가 실린 검으로 녀석의 뼈와 살을 대강 분리하고 고기를 토막 치기 시작했다.
가죽을 따로 벗겨내는 일이 귀찮기도 했지만 막상 커다랗던 시체를 조각내고 보니 그것에 붙어 있던 가죽 크기가 제법 적당했다. 단검을 뽑아 녀석의 가죽을 하나하나 벗겨낸 그는 뼈와 고기, 머리통과 따로 분류하여 모아두었다.
“내장이라.”
이건 먹기에 좀 그런 모습이지만 역시 아껴야 잘산다는 생각으로 나머지와 함께 몽땅 아공간에 집어넣은 진은 어차피 따로 분류되는 것이니 다른 것들과 뒤섞일 걱정은 없기에 피가 묻은 검을 대충 떨어내며 중얼거렸다.
“불이 필요할 텐데.”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는 무척 필요할 것이다. 사람은 불 없이 살 수 없다. 그에겐 집도 없다. 야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온 유지다.
“불…….”
투덜대듯 말하던 진은 문득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던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음?”
빨갛게 달아오른 두 손바닥은 금방이라도 불타 버릴 것처럼 뜨거운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었다. 순간 기억 속에 있는 무언가가 떠올라 지금의 상황을 이해시키려 했다.
“용언의 일종인가?”
불은 아니었다.
아마도 완전하지 못한 모양이라 그나마도 금세 식어버렸다.
다시금 두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입맛을 다시던 진은 옆 땅에 박아두었던 대검을 뽑아 아공간에 밀어 넣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아공간이라는 건 참 좋은 것 같았다. 문득 팔이 잘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 진은 자신의 오른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을 움직였다.
그의 팔뚝에 새겨져 있던 황금빛의 작은 문신이 천천히 팔을 타고 움직여 가슴 왼쪽에 자리 잡았다.
“이 정도면 죽기 전엔 괜찮겠지.”
만족스런 얼굴로 끄덕인 진은 아직까지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세민을 향했다.
시큼한 냄새가 느껴졌다. 무언가 흘린 것인지 지린내가 코를 찔렀지만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지독하던 터라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다.
위생 상태가 상당히 좋지 못한 것 같기에 하층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진은 그녀의 몸이 뼈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이나 말라 있는 것을 보며 영양 상태 역시 엉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은 등에 메고 있던 작은 자루에서 아팔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사과를 닮았지만 그 크기가 테니스공 정도로 작은 것이 아팔이다. 당도가 무척 높아 맛있는 그것을 조심스레 건네받은 세민은 처음엔 의심하는 기색이 조금 있었지만 곧 옷에 문질러 닦고 입으로 가져갔다.
옷이 더 더러울 텐데.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던 진은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문 세민이 씨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하나를 더 꺼내주었다.
“인간인가?”
아팔을 건네받던 세민은 문득 자신에게 말하는 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겉모습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저렇게 물어오니 어색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할 수 있는 것 같고.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지?”
진의 물음에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 저는 너무 배가 고파서……. 영역을 넘은 것은 알고 있지만 배가, 배가 너무 고파서.”
영역? 진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역이라니. 땅에 경계를 두고 사는 것일까? 영지와 같은 개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우스워졌다.
이런 엉망인 땅에서 서로 금을 긋고 싸워봐야 뭐가 이득일지.
“이런 곳에 먹을 게 있나?”
진의 물음에 그녀가 품에 감춰두고 있던 뭔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땅에서 캐낸 듯 보이는 그것은 검은 흙이 묻어 있는, 얼핏 보아서는 감자와 비슷한데 대여섯 개를 다 합쳐봐야 주먹 크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볼품이 없었다.
딱히 맛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도 구황작물인 듯했다.
“가족은 있나?”
“제, 제발! 제발 저 하나로 끝내주십시오. 가족들은 제발……. 저 혼자 한 짓이니 가족들은 제발.”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진은 얼굴을 구겼다.
“그냥 물어본 거다. 가족들이 있나?”
그녀는 여전히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할 뿐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진은 그녀가 중간에 흘깃 바라본 방향을 놓치지 않았다.
“저쪽에 사람이 있는 건가.”
“으, 은인이시여! 제발 살려주세요!”
깜짝 놀라 그의 발을 붙들고 울며불며 사정하던 세민은 문득 코앞에서 느껴지는 고소한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진이 내민 손에는 그녀의 머리만큼 큼직한 빵 하나가 있었다.
“……?”
“안내해라.”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으려던 세민은 이어진 진의 말에 퍼뜩 놀라 손을 도로 물렸다.
“해칠 거였으면 먹을 걸 주지도 않아.”
“…….”
“방향도 알고 있는데 내가 널 살려둘 이유가 있나? 네가 두려워하는 그 누군가라면 말이야.”
그 말이 맞는지 그제야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빵을 건네받은 그녀는 그것에서 풍겨져 나오는 먹음직스런 냄새에 코를 떼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억눌러 참는지 얼굴을 잔뜩 굳히며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안내를 마치면 그런 것 하나를 더 주지.”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들고 있던 빵을 옷 속 품에 꼭 감추더니, 다시금 옷을 조금 들춰 그 안에 있는 빵을 들여다보았다.
진은 그녀의 얼굴에 새로이 생겨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탐욕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조금 더 순수하고, 조금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안내할 거야?”
“네? ……네!”
말을 더듬던 그녀는 서둘러 앞장서서 진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진은 너무나 앙상한 그녀의 몸을 보며 나이를 물었지만, 열여덟이라는 그녀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적어도 서른은 넘었을 거라 생각할 만큼 고생에 찌든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진은 자루에서 꺼낸 아팔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보석이라도 선물 받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지만 바로 먹지 않고 마찬가지로 품속에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