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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제6화 버려진 땅
궁핍은 영혼과 정신을 낳고
불행은 위대한 인물을 낳는다.
―빅토르 위고―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조금 더 나은 환경이겠지 생각하던 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땅보다 훨씬 좋지 못한 땅이 이어지고 있었다. 겉보기에도 시커먼 흙이 드러날 정도로 오염의 정도가 심했다. 잡초마저 자라기 어려운 땅이었다.
세민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수록 땅만이 아니라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마기의 농도까지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혹시 위험한 곳으로 유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안내하고 있는 그녀 역시 위험해질 것이다.
“…….”
진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 칼의 함정에 빠졌던 것을 기억해 내고, 혹시나 함정이 있을 경우를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내딛었다.
구오오오―
바람 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
한두 가지 찝찝함이 생겨나니까 지금껏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언덕을 넘기 위해 천천히 올라서던 진은 앞장서서 걸어가던 세민을 보며 물었다.
“여긴 뭐지?”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조금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던 세민이 목소리를 죽인 채 답했다.
“이곳을 지나가야 제가 사는 곳이 나옵니다.”
“보통 나무들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진의 말에 다시금 언덕 아래를 바라본 세민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언덕 아래로 보이는 것은 아주 넓은 지대에 걸쳐 땅 위에 불쑥 불쑥 솟아 있는 메마른 나무들이었다. 이파리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은 채 시커멓게 말라 있는 나무들은 언뜻 보면 순식간에 지나간 화마(火魔)에 의해 불타 버린 숲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진은 그곳에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괜찮습니다.”
세민의 말에 진은 불신의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아공간에서 그의 대검을 꺼내 어깨에 턱 걸쳐 들었다.
단지 언덕 하나를 더 넘었을 뿐인데 흐르고 있는 마기의 수준이 급격하게 달라져 있었다. 일종의 분지 형태로 고여 있는 것도 같았다.
진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해가 질 것 같았다.
“서둘러야겠군.”
진의 말에 세민도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렇게 수백, 수천 그루의 시커먼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 동안 진은 피부에 와 닿는 확실한 마기를 느끼며 기감을 한껏 열어두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까진 괜찮다는 이야기는 해가 지고 나서는 괜찮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말해주는 세민이었다.
“나무들이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라진 사람도 있고…….”
“생존자는?”
“옷가지나 피의 흔적은 몇 번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만…….”
거듭 뒤를 흐리는 그녀의 말투에는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런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지나왔다는 것일까? 확실히 두려움보단 굶주림이 더욱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 아닌 숲을 거의 지났을 무렵, 문득 근처에 있던 나무 하나가 뿌드득거리며 살짝 움직이는 것을 느낀 진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대검을 고쳐 쥐었다.
정말로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가만히 땅에 박혀 있던 나무들이 바람과는 무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럭저럭 큰일이 벌어지기 전 그곳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땅과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조금씩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진은 문득 걷고 있던 땅을 찍어 차 살짝 훑어보았다.
“검군.”
짙은 갈색을 띠는 지표면과 달리, 그 안에 있는 흙은 검은색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원유 유출로 피해를 입은 해안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이런 위험한 곳에 살고 있지?”
그의 물음에 적잖게 지쳐 숨을 몰아쉬던 세민이 그늘진 얼굴로 답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있어야 그들이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
“사냥꾼들.”
그녀는 그렇게 답하며 문득 진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두려움과 의심이 느껴지는 그 시선에 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사냥한다는 건가?”
“젊은 여자와 아이는 비싸요. 건강한 남자도 인기가 있지만 이젠 찾기 어렵고.”
노예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세민의 얼굴에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짙은 한이 묻어 있었다.
“아직 멀었나?”
“반나절 정도만 더 가면 됩니다. 위험한 곳은 조금 전의 블랙우드뿐이에요. 다른 길보다는 훨씬 돌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가장 안전한 길이라서…….”
그리 말한 세민은 다시금 품 안에 있던 빵을 소중히 감싸 안았다.
“…….”
마을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런 이들을 사냥하는 자들이 있다.
마기가 흐르는 땅. 위험한 나무들. 다른 곳에는 또 다른 위험들이 있다고 하는 이곳은 어디인가?
진은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현재까지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상황을 파악해 보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있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지고, 조금씩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앗.”
횃불 따위를 들고 있지도 않았기에 그저 어둠 속에서 묵묵히 걷고 있던 진은 앞에서 걷던 세민이 문득문득 발을 헛딛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 하는 것을 한 손으로 잡아주며 계속해서 걸었지만, 계속해서 비틀거리는 그녀를 보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아 아공간에서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다듬어 건네주었다.
“고, 고맙습니다.”
그것을 지팡이 삼아 의지하기 시작하자 조금 걷는 속도가 빨라진 그녀는 몇 개의 언덕과 개울을 지나며 이곳의 물은 먹을 수 없다거나 먹을 수 있는 물은 먼 곳에 있는 작은 샘, 혹은 바다까지 가서 바닷물을 길러다 증류해야 한다며 시키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딱히 물이 필요하진 않았다. 진의 아공간에는 술통에 담긴 물이 대략 1톤가량 있지만 지금은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행군 중에는 물을 많이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지닌 물이 없어서인지 별로 목말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지금껏 지나왔던 것과 같은 또 다른 언덕 하나를 앞에 둔 지점이었다. 이미 해가 진 지 오래라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해야 했는데, 언덕 너머에서부터 밝은 빛이 보였다.
“저곳이 마을인가?”
진의 물음에 세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는 세민을 보며 갸웃하던 진은 문득 코끝에 와 닿는 것이 매캐한 연기의 끝자락임을 느끼며 다시금 언덕 쪽을 향했다.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뒤늦게 뭐라 뭐라 소리치며 달려가려는 세민의 허리를 붙잡고 입을 틀어막은 진은 서둘러 기감을 끌어올리며 언덕 너머와 주변 일대를 노려보았지만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을에 몇 명이 살고 있지?”
“쉬, 쉰 명 정도요.”
발버둥을 치던 세민은 재차 묻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반쯤 울먹이는 소리로 답했다.
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기감에 잡히는 움직임은 열 명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역시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다시금 기감을 끌어올려도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언덕 위로 올라가보니 그 너머에 있던 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
어설픈 흙집, 혹은 지푸라기와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진 움막도 있었고 약간의 나무나 돌을 사용한 주거지의 형태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반 이상 불타고 있었다.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낮게 꿈틀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 가장 가까운 시체를 내려다본 진은 그 말라빠진 중년남성이 그가 처음 세민을 보았을 때, 넘어진 그녀를 두고 달아났던 이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아주 짧은 시간 보았음에도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다.
반쯤 갈라진 허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아직 굳지 않은 것이었다. 약간의 온기도 남아 있었다.
진은 주변 일대에 나 있는 발자국들 중 조금 다른 모양의 것들을 발견하고 눈여겨보았다.
묵직한 발자국의 형태로 보아 금속으로 만든 부츠인 모양인데, 발자국의 주인도 꽤 무게가 나가는 자이거나 그만큼의 무장을 지니고 있을 거라 여겨졌다.
“후우.”
시야에 잡히는 어느 곳에도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목숨이 붙어 있던 자들이 간혹 있었지만 한마디의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두 숨을 거두었다.
수많은 시체들, 끔찍한 광경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왠지 감흥이 없었다. 진은 문득 그가 죽기 전 여관방에서 보았던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그때와 다름없이, 그저 평면을 보듯 실감이 나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혈향과 시야 가득 들어오는 끔찍한 시체에도 굳어 있는 그의 감정은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습격한 자들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시체들을 확인하던 세민은 문득 나지막이 말하는 진을 보곤 그가 시선을 향하는 곳으로 눈을 향했다.
진은 불타고 있는 집들 가운데의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멈춘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그쪽으로 달려간 세민이 목청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로미! 몰리! 거기 있니?”
나름 크게 외치려 하는 것 같았지만 체력이 엉망이어서인지 그리 큰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있으면 대답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은 그쪽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떠났어! 이제 나와도 괜찮아!”
울면서 소리치는 세민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거듭 소리치던 그녀는 그쪽으로 더 다가가려 했지만 뒤에서 제지하는 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스스로 나올 때까지 그대로 둬라.”
그 안의 움직임에는 적대감이 없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짙은 두려움들뿐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의 세민은 뒤이어 곳곳에 있던 시체들을 붙들고 질질 끌어 한 데 모으기 시작했다.
“…….”
열 구가 넘어가는 시체를 하나하나 끌어 모으려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진은 곧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도와 다른 시체들을 끌어 모았다.
워낙 못 먹은 이들이어서 그런지 죽었음에도 무척이나 가벼웠다. 피를 많이 흘려 가벼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씁쓸해졌던 진은 시체들을 한 데 모은 그녀가 불타고 있는 집들 중 한곳에서 가져온 지푸라기들과 불이 붙은 나무토막으로 그것들을 불태우는 것을 보았다.
“불이 꺼지기 전에 시체를 없애야 해요. 이 근방의 몬스터들은 시체 냄새와 피 냄새를 무척 잘 맡아요.”
덤덤하게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는 그녀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진은 시체들 위에 아공간에서 꺼낸 자잘한 나뭇가지들을 얹어 흉한 것을 가려주고 불씨를 더해주었다.
쉽게 커지지 않던 불이 그가 얹어준 마른 가지 덕에 조금씩 확대되어 몸집을 불리더니 곧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움찔 움찔.
그제야 먼 곳의 흙바닥이 희미하게 움직이더니 곧 드르륵, 하며 옆으로 열리고 한 사내의 머리가 슬쩍 그 위로 올라왔다.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다. 물론 세민의 얼굴로 따져본 것이지, 그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마흔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고생과 굶주림에 쪄든 얼굴이었다.
그는 주위 동태를 살피려 하던 것 같았는데 고개를 내밀자마자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진과 눈이 마주쳐 흠칫 놀란 상태로 바싹 굳어버렸다.
“겁쟁이 한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세민의 목소리에 진은 천천히 한스라는 청년 쪽으로 다가가 몇 발치 앞에 서서 물었다.
“도로 안 숨나?”
그의 물음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한스는 그 토굴 안과 바깥을 거듭 번갈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이 안은 마, 막혀 있으니 숨어봐, 봐야 도, 도, 독 안에 가, 갇힌 꼴입니다.”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답하는 한스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쪽에서 느껴지던 두려움의 대부분이 한스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