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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나와도 괜찮아. 난 네가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니까. 사실 그리 다를 것 같진 않지만.”
시체를 보면서도 별 감흥이 없던 것을 생각하며 말하자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한스는 먼저 조심조심 토굴 밖으로 나온 후, 그 안에 있던 몇 명의 소년 소녀들을 밖으로 이끌었다.
대략 열다섯 안 쪽 나이로 보이는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한눈에 돌아본 진은 역시나 못 먹어서 그런지 체구가 작고 팔다리가 가느다란 아이들의 모습에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서로 손을 꼭 잡거나 부둥켜안고 잔뜩 움츠린 채로 주위를 돌아보는 아이들의 눈에는 새까맣게 불타고 있는 집들, 그들이 살던 마을이 사라지는 모습이 깊게 새겨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아이들의 표정 한곳엔 약간의 체념 비슷한 것이 묻어 있었다. 진은 아이들과 함께 어색하게 서 있던 한스를 보며 물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그의 물음에 한스는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다, 시체들을 태우고 있는 광경을 발견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바, 발각되었습니다. 누구, 군가가 미, 밀고를 했겠지요.”
“밀고?”
눈썹을 오므리며 되묻자 한스 대신 옆에 다가온 세민이 답했다.
“종종 있는 일입니다. 다른 이들을 팔아넘기고 투항하려는 이들이 있지요.”
그녀의 말에 진은 가만히 끄덕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런 생각을 품는 이들이 나올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립 오빠는?”
“필립 형이라면 나쁜 놈들을 물리쳐 줄 거야!”
문득 뭉쳐 있던 아이들 가운데서 몇 명의 아이들이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며 잔뜩 고무되는 것을 본 진은 그게 누구냐고 묻듯 세민을 향했다.
“마을 식구 중에서 가장 강한 분이세요.”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엔 묘한 기대와 함께 약간의 동경이 담겨 있었다.
“간간이 들짐승이나 작은 몬스터를 사냥하시기도 하죠. 엊그제 사냥을 나가셨으니 돌아오실 때가 되었는데…….”
그녀의 말에 진은 이상하게도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물었다.
“필립이라는 사내는 어떻게 생겼지?”
그의 물음에 세민이 우물쭈물 답하기 시작했다. 언뜻 들어선 평범할 수 있는 설명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둘 더해지자 진은 얼핏 떠오른 짐작이 조금씩 사실로 굳어지고 있음을 느끼며 얼굴을 굳혔다.
“필립 형은?”
“필립 형은 언제 와요?”
꾀죄죄한 몰골의 꼬마들을 내려다본 진은 어깨에 묶어 메고 있던 자루를 풀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아팔을 꺼내 아이들에게 고루 나눠주었다.
“천천히 먹어라. 탈난다.”
얼마나 굶었는지 그 작은 아팔을 두 손으로 꼭 쥔 아이들이 하나같은 얼굴로 군침을 꼴깍거렸지만 한스나 세민을 보고는 아무도 먹지 않았다.
그 둘에게도 하나씩 건네주자 그제야 조심조심 먹기 시작하는 아이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진은 그제야 잊고 지냈던 감정 하나가 가슴 언저리에 조그맣게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측은함이었다.
“…….”
그때였다.
조용히 눈치를 보던 세민이 진의 가죽조끼 옆 자락을 조심스레 쥐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기에 몇 걸음 옆으로 걸어가니 그 옆으로 천천히 따라온 세민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질문은 왜 하신 것인지…….”
무척 어려워하며 조용히 묻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진은 잠시 생각하다 무심한 눈으로 돌아와 말했다.
“필립이라는 사내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의 말에 가슴속에 품고 있던 무언가를 떨어뜨린 사람처럼 덜컥 휘청하던 그녀는 어렵사리 중심을 잡고 서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그녀가 말했던 외모대로라면 필립이라는 청년은 진이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오면서 처음으로 만났던 사람이 확실할 것이다.
다만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는 것, 지금은 그 시체조차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이해한 듯 참고 있던 눈물을 주르륵 흘리던 세민은 어느새 옆에 다가와 그녀의 남루한 옷깃을 붙잡고 올려다보는 한 소녀를 마주보며 애써 웃음 지었다.
진은 가만히 생존자들을 돌아보았다.
세민과 한스, 그리고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두 여덟 명. 자신을 제외하면 열 명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조금만 걸어도 픽픽 쓰러질 것처럼 야윈 모습에 진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여전히 불타고 있는 시체 더미를 향했다.
왠지 익숙한 모습인지 한스도 세민도 아이들의 눈을 가려주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 역시 근처에서 시체 더미가 불타고 있는데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오히려 어색한 쪽은 진이었다.
어느새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진은 옆쪽에 서 있던 세민과 한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겠나? 난 정보가 필요해.”
진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왜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지.
어째서 사냥을 당하는 처지면서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묻는 진의 표정을 살피던 세민과 한스는 머뭇머뭇 대답을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에발딘의 동북부입니다.”
세민은 이곳을 대륙에 있는 수많은 나라 중 하나인 에발딘이라는 곳이라 했다. 그들은 나라 바깥을 가본 적도 없을뿐더러, 지금까지 살아온 터전 말고는 그저 소문을 통해 전해 들었을 뿐이기에 그 에발딘이라는 나라의 규모나 주변 정세와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곳은 에발딘이라는 나라의 동북부 오지로서,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불쑥 솟아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에는 내륙과 사이에 높고 커다란 방벽 하나가 자리 잡아 그들을 지나갈 수 없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의 목적은 마수들의 침입 차단이었습니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진이 기존에 살았던 세상에서의 역사 중에도 외세의 침입 따위를 막기 위한 성벽 같은 것이 많이 있었다.
오래전 마계의 괴물들이 땅 위에 생겨나 대지를 오염시킨 후, 제대로 정화되지 않은 땅들이 생겨났는데 이곳 역시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고 했다.
동식물들이 오염되어 변질되거나 죽기 시작하고, 사람 역시도 미치거나 괴물이 되자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질병처럼 공포와 두려움이 확산되었다.
기존의 귀족들은 죽거나 달아난 지 오래였고, 뒤늦게 임금의 결단에 의해 아주 높고 두꺼운 방벽이 건설되어 본토와 이곳을 차단하기에 이르렀는데, 문제는 이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위에 줄을 댈 수 있었던 귀족들은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경계로 결정된 그곳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넘으려 하면 여지없이 자행되는 공격에 목숨을 잃었고, 그 이유는 ‘오염 여부’, 혹은 ‘변질의 가능성’ 정도였다.
마기에 오염된 인간은 자아를 잃고 괴물이 된다. 다른 동식물들과 같다. 본연의 모습을 잃은 채 몬스터와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변이한 인간이나 동식물, 즉 마수가 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간에는 아주 커다란 외모 상의 차이들이 있다. 눈으로 보아도 그자가 오염된 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곳에 살던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죽거나, 살거나.
죽는 것은 대부분은 경계를 넘어가려다 화살, 혹은 그곳으로 가는 도중 마주한 몬스터나 마수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방벽이 건설된 이후에는 바로 그 안에서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들이 있어도 그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방벽 너머 이곳은 더 이상 그들의 나라가 아닌 것이다. 지도상으로는 여전히 그들의 땅이지만 그들에겐 아니다. 그들은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렸다.
“구, 국왕의 서, 선함을 알리기도 하, 하지요.”
한스의 말이 이어졌다.
역시나 잔뜩 더듬고 있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이 나라의 왕은 언젠가부터 성군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역시 언젠가부터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고 있어서라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진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온갖 죄목을 들어 사형을 당했을 수많은 사람들, 물론 개중에는 정말로 죽어 마땅할 악행을 일삼은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 안에 섞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대신 먼 오지로의 유배, 즉 방벽 너머인 이쪽으로 추방을 시킨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목숨을 살려주는 은총이자 덕이었지만 그 안을 보면 더하면 더했지 전혀 은덕이라 볼 수 없었다.
이쪽으로 유배된 이들은 그동안 겪었던 고문과 감옥살이 등등으로 피폐해진 몸뚱이다. 몬스터나 마수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인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만나기 전 사냥당해 죽게 된다. 사형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세민과 한스가 살던 마을은 인구가 천 명이 넘어가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방벽이 건설된 이후, 갈 곳 없는 몬스터들의 광분과 더불어 남아 있던 인간들의 파벌 형성에 갈기갈기 찢겨졌다고 말하던 세민의 표정에는 잔뜩 그늘이 져 있었다.
처음엔 대략 열 곳 정도의 크고 작은 파벌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거나 흡수, 통합되어 지금은 세 곳 정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데 간밤에 그들을 죽이고 사냥한 이들 역시 기존 그들의 마을에 속해 있던 파벌 중 하나라고 했다.
인간 사냥꾼이라는 자들이 외지인이 아니라 한때 이웃으로 함께 살던 이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해당 파벌의 주축은 당시 마을에 머물렀던 외지인 용병들이었지만, 그들을 돕거나 하여 목숨을 부지하던 이들이 점점 그들에 동화된 것인지 이제는 그들에 비해 그리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백 명 정도의 구성원에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병력이 십여 명. 그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해당 파벌의 규모였다.
“오염된 땅이라고 해서 모두 이런 것은 아닙니다. 몇 곳은 아직 동식물이 살 수 있어요.”
세민의 말에 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가장 강한 파벌이 현재 온전한 땅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들은 다른 파벌을 습격하여 사람을 납치, 성벽의 병사들과 내통하여 노예로 팔아넘긴다는 이야기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저희가 살던 마을 말고도 다른 마을들이 무척 많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사람의 숫자가 부쩍 줄었어요.”
숨어 산다고 해서 사람 간의 교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일로 해서 조우하는 경우 간혹 새로이 건너온 사람들의 이야기나 어떤 마을의 몰락과 같은 소식을 접할 수 있었지만 세민의 말처럼 최근 몇 년간 사람의 숫자가 퍽 줄어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저 각각의 습격을 피해 오지로 달아났기에 점점 더 만나기 어려워졌다고.
“잡혀간 이들은 누구인가.”
진의 말에 세민의 시선이 한스를 향했다.
쭈뼛쭈뼛 몸을 움츠리던 한스는 마찬가지로 자신을 향하는 진의 눈빛을 받고는 더욱 몸을 숙이며 답했다.
스무 살 안팎의 처녀들과 아직은 건강한 편인 사내 몇, 조금 자란 소년 몇 명 정도가 잡혀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대략 서른 명 정도라 했다. 아마도 나이가 들거나 외모가 보잘 것 없거나, 혹은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 모양이었다.
잡혀간 이들 중에는 지금 이곳에 있는 소년 소녀들의 가족도 있다고 했다. 세민이 그런 말을 하는 동안 진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어떠한 간절함이 있었다.
“…….”
그런 아이들의 눈들을 가만히 돌아본 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어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너희를 도와주면 너희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그의 물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저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지만 그런 아이들의 곁에서 비슷한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고 있던 세민은 달랐다.
파르르 어깨를 떨던 그녀는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보잘 것 없지만…….”
“…….”
이들에게 별다른 재물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그녀가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뚱이 뿐이었다.
그런 그녀와 그 옆에서 존재감 없이 움츠리고 있던 한스를 바라본 진의 표정이 적잖게 굳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스스로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나?”
그의 말에 일말의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얼굴을 하던 세민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저 강한 자가 있으니 어떻게든 도움을 받고 싶다는 건가? 자주성은? 그런 말을 알긴 하나?”
강하게 몰아세우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한 질타였다.
하지만 진의 말에도 모두 머뭇거리고만 있을 뿐 전혀 알아듣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고개를 숙인 이는 다름 아닌 한스였다. 진은 그런 한스를 보며 물었다.
“겁쟁이 한스. 넌 왜 도망치지 않고 숨는 것을 택했지?”
“그, 그것이 살아나, 남을 가능성이 가, 가장 높았기 때문입니다.”
마을이 번성하던 시절, 그는 상점의 점원이었다고 했다.
계산에 능하고 상황 판단에 강하던 그는 일이 벌어진 이후 몸을 잔뜩 움츠리고 눈치를 살피기 시작해 겁쟁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지만 어쨌든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