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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진은 그런 한스를 보며 물었다.
“내 사람이 되겠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지만 그 앞에 있던 한스는 주저 않고 풀썩 두 무릎을 꿇었다.
“망설이지 않는 건가?”
진의 물음에 한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답했다.
“이, 이곳에는 더 이상 수, 숨을 곳이 없습니다. 지금 가, 가장 안전한 곳이 있다면 다,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
“다, 당신은 가, 가,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세민 또한 퍼뜩 표정을 바꾸며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진이 그녀를 내려다보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시선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담담하지만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말이기도 했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한숨을 내쉬던 진은 멀뚱멀뚱 서서 어른들의 행동을 바라보던 아이들 중 그나마 눈빛이 맑던 소년 하나가 천천히 걸어와 무릎을 꿇자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그를 따라 무릎을 꿇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조금 커진 한숨이 다시금 이어졌다.
무언가 실망하고 있는 얼굴 같기도 했다.
한참이나 말없이 그들을 돌아보고 있던 진은 보이지 않게 조금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너무 적어.”
이제 시작이다.
제국을 상대하려는 첫걸음으로 생각하기엔 너무나 초라하다.
병사도 아니다. 빼빼마르고 힘도 없는 여자 하나에 겁쟁이 하나, 나머지는 당장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아이들뿐이다.
“후우.”
하지만 이런 이들이 아니라면 누가 그의 밑으로 들어올까 하는 생각도 이어졌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음에 진은 다시금 쓴웃음이 섞인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사람은 늘리면 된다. 늘려야 하기도 하다.
‘일단은 잡혀갔다는 이들을 구해서 최대한 흡수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던 진은 가능하다면 저쪽의 파벌 역시도 흡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악행을 하기도 했지만 성벽의 병사들과 내통하고 있다면 그 라인을 이어받아 차후에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섬을 떠나올 때만 해도 조용하게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진이지만 왠지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쳇.”
그는 완전한 드래곤은 아니지만 드래곤의 몸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블랙드래곤의 능력인 앱서브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칼의 요구에 응했던 것이 맹약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능력껏 해주겠다.’라고 답했던 그것이 맹약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칼이 남긴 진정한 마지막 한 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진은 다시금 쓴웃음을 지으며 아공간에서 커다란 솥 하나를 꺼내 옆 땅에 내려놓았다.
“어.”
“와.”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탄성을 질렀다.
그들과 비슷한 얼굴로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바라보던 한스와 세민은 뒤이어 허공에서 자잘한 나뭇가지와 부스러기들을 잔뜩 꺼낸 진이 근처에서 가져온 불씨를 옮겨 만든 모닥불 위에 솥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꺼낸 것은 물이 가득 담긴 나무 술통이었다. 그것을 솥에 적당히 부은 진은 물이 반쯤 담긴 커다란 솥에 그가 이곳에 건너와 처음 잡았던 하울페그의 몸통 조각 하나를 넣은 후, 사용하지 않았던 작은 노 하나를 꺼내 솥에 꽂아 넣었다.
“…….”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일어나 구경했다.
잘게 자르지 않아 커다란 덩어리일 뿐인 고기를 멍하니 들여다보던 한스의 눈이 부르르 떨리며 빛났다.
“하, 하울, 하울페그.”
한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한스는 뒤이어 단검 하나와 도끼 한 자루를 건네는 진을 보며 조심조심 받아 들었다.
겁쟁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렇게 왜소하거나 한 몸은 아니었다. 단련하고 잘 먹으면 한 사내 몫은 해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진은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곳엔 몬스터들이 안 오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근방의 몬스터들은 야행성입니다. 해가 뜬 이후엔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세민의 말에 진은 끄덕이며 돌아섰다.
“이 고기가 다 익기 전에 돌아오겠다.”
그 말에 세민과 한스가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벗어나지 마라. 이건 너희에 대한 내 시험이라 생각해도 좋다.”
“…….”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 자들은 짐일 뿐이야. 난 짐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해.”
“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더듬던 한스는 단검을 세민에게 건넨 후, 도끼를 내려두고 솥으로 가 그곳에 있던 노를 천천히 젓기 시작했다.
그런 한스와 그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세민, 근처에 서서 그들과 자신을 번갈아보고 있는 아이들을 돌아본 진은 다시금 몸을 돌려 한쪽으로 향했다.
“흠.”
발자국들이 향하는 곳은 한 방향이다.
무언가가 질질 끌린 것 같은 자국도 더러 섞여 있었다.
생존자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쫓아올 테면 와보라는 것인지 당당한 보폭들이 이어지고 있는 땅 위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진은 멈춰 있던 걸음을 천천히 내딛었다.



제7화 다키안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데 익숙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가 되고 만다.

―아브라함 링컨―



인간들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주 쉽게 그것을 따라 걷던 진은 그 중간마다 생겨난 또 다른 흔적, 이리저리 난잡하게 찍혀 있는 발자국들과 더불어 인간의 것이 아니라 여겨지는 흔적과 더불어 몇몇 까맣게 죽어 있는 혈흔과 같은 것들이 몬스터와의 조우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다.
걸음을 멈춘 진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고여 있던 검붉은 피, 이제는 거의 땅에 스며들어 흔적만 남아 있던 그것을 손끝으로 슥 문질러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
보통의 몬스터가 아닌 것 같다. 희미하지만 마기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땅에 흐르고 있는 마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별개의 느낌을 갖고 있었다.
“마수인가.”
작게 중얼거리던 진은 손을 털며 일어나 대검을 고쳐 들었다.
키이이익!
멀리서부터 달려오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인간은 아니었다. 마치 고양이 과의 동물처럼 보이는 커다란 무언가의 몸뚱이 위로 시커먼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스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은 하울페그를 상대했을 때처럼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검에 마기를 주입하기 시작하자 시커멓게 변색된 검이 우우웅, 낮은 울음을 발했다.
킥!
그런데 그가 마기를 일으키자 달려오던 녀석이 채 열 걸음을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급하게 멈춘 것이 눈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였는데, 그 눈빛이 이상했다.
거리가 줄어들자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 녀석의 생김새는 검은 고양이를 그대로 확대시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집은 호랑이 정도로 커다랗지만 머리에 비해 몸통이 좀 작고, 상대적으로 네 개의 다리가 좀 짧은 것 같았다.
키이익.
마기를 가진 자를 알아보는 것일까?
마수의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깊은 광기와 더불어 약간의 두려움이었다. 진은 녀석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보며 검을 고쳐 쥐었다.
크아앙―!
녀석의 눈빛이 바뀌었다.
광기가 두려움을 눌러 버린 것일까? 갑자기 쿠왕, 하며 고함을 내지른 녀석이 멈춰 있던 몸을 날려 앞발을 휘둘러 왔다.
“……윽!”
앞발이 무섭다.
이번에도 방심했던 것일까?
평범한 길이였던 녀석의 앞발은 몸통 안으로 숨겨진 부분이 더 있는 구조인지,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주욱 늘어나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를 할퀴었다.
“쳇.”
순간적인 판단으로 물러날 수 있었지만 녀석의 시커먼 발톱에 팔뚝이 스쳐 길고 붉은 줄이 세 개나 생겨 버렸다. 벌어진 살 틈으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오염될 수도 있겠군.”
마수에게 공격을 당하여 피가 오염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진은 그래봐야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보다 자신의 피에 내재된 마기가 훨씬 농도가 짙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팔을 아래로 두어 번 털어주고 난 후 다시금 대검을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키, 키익.
문득 한 걸음 물러난 녀석이 그를 할퀴었던 왼쪽 앞발을 들어 코앞으로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
그러더니 낼름 혀를 내밀어 핥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지켜보던 진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내 피가 맛있는 편인가?”
그리 맘에 들지 않아 하며 말하던 진은 자신의 피를 핥아먹은 녀석의 눈에 광기가 더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피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더 많은 피를 갈구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씁쓸한 얼굴로 검을 고쳐 쥔 진은 재차 달려드는 녀석의 앞발이 또다시 중간 즈음에서 휘익 늘어나는 것을 보고 눈을 좁혔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 당한 것을 또 당하진 않는다. 진은 그대로 녀석의 앞발을 베어버리고 그 틈으로 파고들어 그 옆구리에 대검을 박아 넣었다.
끼이이익―!
그의 대검이 절반 가까이 박힐 만큼 깊은 찌르기였다.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한 비명을 지르던 녀석이 몸을 뒤틀며 이빨을 드러내 그를 노렸지만 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자신의 검을 그대로 놓아버린 진은 훌쩍 뛰어올라, 마기를 듬뿍 담은 팔꿈치로 녀석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우드드득.
무언가가 잔뜩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V자를 그리며 내려앉은 녀석의 머리.
훌쩍 내려온 진은 그대로 쓰러져 꿈틀거리다 멎은 녀석의 옆구리, 여전히 꽂혀 있던 자신의 검을 쥐고 말했다.
“앱서브.”
그러자 검이 틀어박힌 곳에서부터 마수의 피부가 괴사하는 것처럼 시커멓게 말라 버리기 시작했다.
뿌드득거리며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도 들리며 마수의 몸이 전체적으로 찌그러들고 있었다.
“역시 되는군.”
이 검은 마기를 먹고산다. 한데 단순히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통로 역할을 해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렴풋이 남아 있는 누군가의 기억을 토대로 실험삼아 해보았는데 확실했다.
“끄윽!”
검을 통해 전해져 오는 마기와 더불어, 녀석의 기억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칼의 레어에서 바퀴벌레 마수를 죽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격한 고통으로 시작되었다.
“끄아악―!”
머리가 부서지는 고통에 이어 뱃속을 헤집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뒤이어 한쪽 팔이 끊어지는 아픔이 이어지고 난 후, 순차적으로 역행되는 수많은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수의 이름은 캐딜레스.
기억 속에서 달아나고 있던 사람들의 비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녀석의 능력은 날렵한 몸놀림이다. 덩치에 안 맞게 재빠르고 유연한 신체를 지니고 있던 녀석의 능력이 흡수되자 문득 몸 곳곳에서 우둑거리며 무언가가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프진 않았다.
“후우.”
흡수가 끝난 진은 얼굴에 흐르던 진땀을 팔로 대충 훔쳐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무척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무게가 가벼워졌다기보다 좀 더 마음과 몸이 일체화된, 잘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캐딜레스의 날렵함이 몸에 새겨진 것이었다. 흑영보와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앱서브가 끝난 캐딜레스의 몸은 피를 완전히 제거한 것처럼 뻣뻣하게 말라 있었다.
그래도 먹을 수는 있겠지 생각하며 가죽을 벗기고 뼈와 함께 여러 조각 토막을 쳐 아공간에 쑤셔 넣은 진은 흡수한 캐딜레스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통해 주변에 또 다른 소규모 인간 부락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에 가장 가까운 쪽을 향했다.
사냥꾼들의 발자국도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흔적을 더듬어 주변을 수색해 보던 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세민의 마을처럼 습격을 당한 듯, 새까맣게 타버린 작은 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체는 없었다. 젊은 사람만 있던 마을이었을까?
무거운 발자국과 무언가 끌려간 흔적이 다시금 어딘가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본 진은 발자국이 새겨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거침없이 흑영보를 밟으며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