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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멀리 곳곳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습격을 당하고 불태워진 마을들이리라. 모두 다 가볼 수는 없기에 무시한 진은 발자국이 나 있는 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며 자신의 대검을 고쳐 쥐다 문득 그것을 다시 살펴보았다.
“음?”
마기를 많이 먹어서 그런 것일까? 전체적으로 모양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크기가 조금 줄어든 것 같은데, 손에 쥐는 느낌은 더 좋아졌다.
아마도 사용자에게 어울리는 모양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한 검이었다.
“뽑아오길 잘했네.”
그것은 단순한 철과 같은 금속이 아니었다. 섬에서 나무들을 베고 다닐 때 살펴봤었지만 날이 빠진 부분이나 몇몇 상처들을 통해 보니 확실히 철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끝을 조금 부러뜨려 보기도 했었다.
그냥은 안 부러지기에 마기를 주입한 검을 마찬가지로 마기를 주입한 금속 갑옷이나 다른 검에 대고 내리쳐 아주 작은 파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새삼 그것이 생각난 진은 아공간에 넣어두었던 작은 파편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기를 불어넣어 보았다.
“…….”
눈곱 크기의 파편이 마기를 집어넣자 조금씩 증식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확실히 커졌다.
“평범한 금속은 아닌 모양인데.”
마기를 통한 형상기억합금 같은 것일까? 마기를 넣는 것을 중단한 진은 파편을 계속 키우면 어떤 모양이 될까 생각해 봤지만 그럴 만큼 마기가 넘치진 않는 터라 다시 아공간에 넣어두고 멈췄던 걸음을 이어가다 다시 멈추었다.
“음.”
그는 오른쪽 어깨에 걸쳐 들고 있던 자신의 검을 눈앞에 들어보았다.
“…….”
마기를 불어넣으면 시커멓게 변하며 강한 힘을 내는 그것은 의식적으로 마기를 주입하지 않아도 아주 적은 양이지만 그의 손에서 마기를 빼앗아가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마검, 마검이라고 부르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진은 문득 그것이 마기를 빨아들이는 습성을 갖고 있는 금속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이 땅을 조금씩이나마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푸욱.
진은 마검을 역으로 쥐고 땅에 깊이 찔러 넣은 후 손을 떼었다.
“…….”
그리고 가만히 관찰하던 그는 마검이 박힌 땅 주변으로 마기의 흐름이 조금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땅의 흙을 조금 들춰보니 여전히 시커멓게 변색된 흙이었지만 조금 더 떨어진 곳에 비해선 그 색이 덜한 것 같았다.
땅 위로 드러난 마검의 색이 점점 검게 물들고 있는 것을 보아도 마기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것을 도로 뽑아낸 진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연기를 향했다.
저 연기는 마을을 불태워 생겨난 것이 아닐 것이다. 느낌이 많이 달랐다.

*
*
*

사냥꾼들의 마을은 작은 분지에 있었다.
그곳을 둘러싼 사방의 언덕 위에는 경비병들이 있었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 복장과 무장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 있는 것마저 힘에 부치는지 털썩 주저앉아 조잡한 창대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
다른 이들을 습격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 살림살이가 좋은 것도 아닌지 저런 말단 보초들은 한스와 비교해 보아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영양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보초 하나의 시야 안으로 접근해 언덕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진은 아공간에서 꺼낸 빵 하나를 주먹 크기로 떼어내어 위쪽으로 툭 던졌다.
“으음?”
주저앉아 졸고 있던 후줄근한 사내는 문득 얼굴을 때리는 무언가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자려는데 조금 앞에 떨어진 빵 조각이 보였다.
“…….”
사내는 다시금 주위를 돌아보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다른 보초들을 살피던 그는 곧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눈빛이 변해 있었다.
슬금슬금 움직여 언덕을 내려가던 그는 동료들에게 들킬세라 발소리마저 죽이고 있었다. 이어 비탈을 내려가 빵 조각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던 그의 귓가에 한 줄기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퍽!
“이런.”
보초를 덮쳐 뒷목을 후려친 진은 단순히 기절만 시키려고 했는데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어긋나 버리는 사내를 보며 움찔 놀랐다.
목이 부러져 버린 것 같다.
큭, 하고 한 걸음 물러섰던 진은 후우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힘 조절이 쉽지 않네.”
첫 살인은 아니다.
그의 첫 살인은 자신이었다. 스스로 굶어죽은 것이 그의 첫 살인이다.
자신을 죽여 보았기 때문인지 눈앞에 있는 시체를 보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사이코패스라도 된 건가.”
중얼거리던 진은 죽은 보초가 걸치고 있던 누더기 망토를 벗겨 자신의 옷 위에 걸치고, 옆에 떨어져 있던 어설픈 나무창을 주워 들고 언덕을 향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슬쩍 그를 보았던 다른 보초도 다시금 앞을 보며 멍하니 졸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무기를 들고 달려들거나 몬스터가 아닌 이상 누가 침입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보초들의 표정에 진은 쥐고 있던 나무창을 옆에 버려두고 언덕 안으로 내려갔다.
마을의 규모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세민의 마을이 불타지 않았다고 가정해 본 것의 세 배 정도긴 하지만 대부분 천막이나 움막이었고, 역시 나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나무가 귀한가 보군.”
생각해 보니 오던 중에 나무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딱히 생각나는 나무가 있다면 세민의 마을로 향하던 도중에 만났던 시커멓고 말라빠진 나무들이었지만 그것들은 나무라 보기 좀 그랬다.
나무를 구하기 쉬웠다면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갔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진은 사방을 돌아보며 기감을 확장했다.
느껴지는 기척은 마을의 북쪽과 동쪽. 상대적으로 사람이 없이 대부분 비어 있는 남쪽과 서쪽과는 달리 북쪽과 동쪽엔 빽빽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특히 동쪽이 심했다. 한 덩어리라고까지 느껴지는 기운을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납치해 간 사람들을 한곳에 잔뜩 가둬놓은 모양이었다.
“흐음.”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마을의 남쪽이었다. 빈 천막이나 움막들이 가득했다. 그곳의 주인들이 북쪽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을을 비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쪽으로 향하려던 발을 멈추고 북쪽으로 바꾸었다.
“시끄럽기만 하겠지.”
최악의 상황에서 지푸라기 하나가 보이면 누구에게나 광기가 생겨난다. 침묵이 중요한 상황에서 살려달라는 고함이 터져 나올 게 뻔하다.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진은 이리저리 몸을 숨기며 북쪽으로 접근했지만 가면 갈수록 사람의 숫자가 무척 적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무척이나 적었다. 세민이나 한스에게 들었던 것에 비해서도 말이다.
아마도 또 다른 마을을 습격하러 간 모양이다. 오다가 보았던 연기로 생각해보면 사냥꾼들의 숫자를 나누어 분산시켜 보낸 것이라 추측되었다.
간간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 남자였다. 여자도 종종 보였는데 거의 헐벗다시피 한 여성들이 우악스런 남성들에게 붙잡혀 움막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여성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것은 짙은 체념이었다.
“음.”
그렇게 걷던 진은 다른 사내들에 비해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는 자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제법 강해 보였기에 제대로 긴장하고 보법을 밟았지만 10여 미터 후방에서 달려드는데도 바로 뒤에 도착했을 즈음에야 돌아볼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퍼억!
진은 손날을 세워 그자의 뒷목을 후려쳤다.
힘을 뺀다고 뺐는데, 목이 부러지진 않은 것 같은데 숨을 안 쉬었다.
“이런.”
가능하면 부하 수를 늘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힘 조절이 잘 안 되고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 약한 존재였던가 하고 한숨을 내쉬던 진은 서둘러 사내의 두 다리를 잡아 옆에 있던 빈 움막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다시 본 남자의 무장은 역시나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
가죽 갑옷도 당장 입어도 괜찮을 정도고, 제대로 된 장검도 차고 있었다. 날이 좀 빠지긴 했지만 녹이 슬진 않았다.
사내의 무장을 벗겨 아공간에 집어넣고 있던 진은 그의 왼쪽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발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교차된 검 두 자루와 더불어 ‘칼페르스’라는 문구가 보였다.
“음.”
아마도 용병단의 표식인 것 같다. 아니면 어딘가의 부대 마크일 수도 있었기에 다시금 눈여겨보았다.
끼야아―!
비명이 들려왔다. 북쪽이었다.
여성의 목소리였기에 기회라 생각한 진은 쓰러진 사내의 목에 손을 대보았지만 역시나 맥이 느껴지지 않았다.
“…….”
진은 그대로 사내의 목을 쥐었다. 우둑, 소리와 함께 손이 움푹 들어가자 그제야 눈을 부릅뜬 사내의 입에서 컥, 하는 단발마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핏발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사내의 고개가 떨어지자 진은 가만히 침묵한 채로 손을 떼었다.
실전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군대는 다녀왔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까? 왠지 사내가 죽지 않은 것 같아 확인사살을 했고, 그게 적중했다.
숨을 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장박동을 의식적으로 줄일 수 있는 기술이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진은 옷에 대고 툭툭 턴 후 자리에서 일어나 움막을 나섰다.
비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안타까운 상황인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게도 진에겐 그저 좋은 기회일 뿐이었다.
다만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면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라 여기며 보법을 밟았다.
북쪽은 움막이 대부분인 다른 곳들과 달리 좀 더 넓은 천막이 많이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의 주축 세력이 북쪽에 머무는 모양인데, 천막들 가운데로 작은 공터가 있었다.
비명은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진은 그곳으로 접근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스무 명 남짓한 사내들 너머로 공터 한가운데, 수직으로 땅에 박혀 있는 열 개의 나무기둥들을 볼 수 있었다.
나무기둥들은 두 개가 한 쌍을 이뤄 다섯 쌍이었다. 양쪽의 두 자리는 비어 있고, 가운데 세 곳에 각각 사람들이 선 채로 묶여 있었다.
두 개의 나무기둥 사이에 밧줄로 팔다리가 묶여 X자 형태로 서 있는 모습들이었다. 모두 벌거벗은 이들이며, 한 명의 여성과 두 명의 남성이었는데 남성 중 하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고개가 뒤로 넘어가 있는 것을 보아 죽은 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해 주듯 앞쪽에 준비된 상석에 앉아 있던 자가 그곳에 서서 채찍을 고쳐 쥐고 있던 마른 사내에게 물었다.
“죽었나?”
“그런 것 같습니다.”
“쳇. 여덟 대나 남았는데 벌써 뒤지다니.”
상석에 앉은 사내는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상체는 무수히 많은 상처들로 뒤덮여 있었다.
앞으로 내밀어 여전히 나무에 매달려 있는 시체를 가리키는 사내의 팔을 본 진은 그곳에서 그가 죽인 자의 팔에 있던 것과 똑같은 문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놈이 죽인 우리 식구가 다섯이다. 다섯.”
“…….”
사내의 말에 채찍을 쥐고 있던 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오십 대를 때리라고 했잖아. 죽인 한 명당 열 대씩.”
“소, 송구합니다. 나머지 여덟 대는 이쪽 녀석에게 더하겠습니다.”
우물쭈물 말하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다른 사내를 가리키는 그자였다.
이미 그쪽의 사내 역시 적지 않게 맞았는지 등이 파헤쳐진 것처럼 엉망이었지만 그 너머에 있던 상석의 사내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것도 나쁘지 않군.”
“헤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채찍을 쥔 사내가 실실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형제라고 했던가? 형의 잘못은 동생이 책임져줄 줄도 알아야지. 그놈은 몇 대 남았지?”
사내의 물음에 채찍을 쥔 자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직 스무 대 남았습니다. 더하면 스물여덟 대입니다.”
그의 대답에 상석의 사내가 의자 깊이 등을 묻으며 우락부락한 자신의 턱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 녀석이 남기면 그 옆에 있는 계집에게 더해.”
그 말에 가운데 묶여 있던 사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은 보지 않아도 그 표정을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긴 수만큼의 사내를 받게 하는 것도 좋겠군. 노예로 팔아야 하는데 겉에 흠집을 남기면 값이 떨어지겠지.”
“그거 좋습니다!”
“대장 최고!”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껄껄대며 웃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