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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주르륵.
벌거벗고 있던 젊은 여성의 다리 사이로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크고 거칠어졌다.
“…….”
진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내들의 얼굴이 다르지 않았다.
“부하로 건질 만 한 놈이 없는 것 같네.”
진은 최대한 힘을 덜 주고 있던 손을 제대로 고쳐 쥐고 두 주먹에 마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어?”
“음?”
그 앞에 서 있던 두 사내는 문득 자신들의 목에 닿는 누군가의 손에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두둑.
콰득.
무너지는 두 사내의 모습에도 광장만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들은 뒤이어 대여섯 명의 동료들이 같은 식으로 쓰러질 즈음에야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고 기겁했다.
“죠이! 모헬슨!”
“주, 죽었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가운데 누군가가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다!”
“헉!”
일제히 그곳을 바라보던 사내들은 다시금 우둑거리는 소리에 이어 순식간에 쓰러진 동료들을 돌아보고 자신들의 조잡한 무기들을 뽑아 들기 시작했지만 이미 그 수가 반 이상이나 줄어 있었다.
“저쪽이다!”
“어디! 어디!”
다시금 누군가의 외침에 이어 그쪽을 향하던 사내들은 뒤이어 상석에서 벌떡 일어난 대장의 외침에 기겁했다.
“이 머저리들아, 소리친 그놈이 범인이다!”
“헉!”
다시금 조금 전 소리친 자를 향했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동료의 목을 부러뜨리고 있는 진이 있었다.
“괴, 괴물이다.”
“히익!”
한 손으로 사람의 목을 쥐어 부러뜨리고 있는 진의 모습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게다가 그의 두 손에선 시커먼 마기가 풀풀 피어나고 있었다.
“오, 오염된 자다!”
“도망쳐!”
그 시커먼 마기를 목격한 자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로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진은 의외의 반응에 조금 놀랐지만 하나라도 놓칠 수 없어 서둘러 흑영보를 밟아 가까운 자들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들켜 버린 이상 일부러 목을 노리는 것 자체가 불편해졌다. 그저 마기를 담은 주먹을 휘둘러 진일권의 살의를 담아 후려치고 다니자 곳곳에서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망치지 마라! 죽여라! 죽여 버리란 말이다!”
거칠게 소리치던 상석의 사내가 옆에 서 있던 철갑의 부하를 보았다.
“헨릴.”
“맡겨주십쇼.”
그러자 옆에 있던 커다란 양날 도끼를 두 손으로 움켜쥔 헨릴이라는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가 진의 앞을 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다.
쿠쾅―!
상석 앞에 서 있던 대장은 방금 걸어 나간 자신의 오른팔 헨릴이 그의 주무기인, 이 근방의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광란의 도끼’를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저 오염된 자는 헨릴의 도끼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
지금껏 헨릴의 도끼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살아남은 자는 없다. 자신 역시도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한데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수직으로 휘둘러지던 헨릴의 도끼가 터져 버렸다. 그렇다. 터졌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끄으악!”
터져 버린 도끼의 파편이 헨릴의 온몸에 쑤셔 박혔다. 붉은 피가 울컥 터져 나오며 뒤로 훌쩍 날려진 헨릴이 그의 옆을 지나쳐,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나무로 만든 상석을 부수며 틀어 박혔다.
“…….”
그대로 절명한 듯 움직이지 않는 헨릴을 보며 대장이라 불리던 사내는 반대쪽, 또 다른 믿음직한 부하인 모레슨을 향했지만 이미 그는 그곳에 없었다.
“대, 대장님. 도, 도망…….”
어느새 앞으로 달려 나갔는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던 모레슨의 등 한가운데에 검붉은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시커먼 마기를 흘리고 있는 그것은 사람의 주먹이었다.
“다, 다키안.”
다키안. 오염된 자.
그것은 마기에 중독되어 변이하거나 자아를 상실한 자를 말한다.
지금껏 그는 이곳에 살면서 수많은 다키안들을 목격했다. 개중에는 정말 강하고 두려웠던 자도 있었지만 결국 그와 부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다키안은 그저 인간의 자아를 상실한 괴물일 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한데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그렇지 않았다. 뭔가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생각을 갖고 있다. 말을 할 수도 있다.
부하들로 하여금 다른 곳을 쳐다보게 하고 순식간에 목을 꺾어버릴 정도의 흉악함을 지닌 자였다.
털썩.
가슴팍에 구멍이 뚫린 채로 무너져 버린 자신의 왼팔 모레슨을 내려다보던 대장은 그 너머에서 탁탁 손을 털어 피를 뿌리고 있는 사내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다키안의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다. 분명한 다키안이다.
하지만 그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포악함이나 광기가 아니었다.
아주 깊은, 깊어서 그 끝을 볼 수 없는 어둠 그 자체였다.
텁.
그는 순간적으로 느낀 살기에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의 검자루를 쥐었다. 그러자 어깨를 들던 사내가 한 걸음 물러났다.
비로소 다키안의 얼굴에 표정이 생겨났다.
그는 웃고 있었다.
“…….”
뒤로 물러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오기도 아니었다.
발이 안 움직여졌다.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두려움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로 그 두려움이었다.
“다키안이라.”
진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영어의 다크(Dark)와 비슷한 말일까? 오염된 자라고도 하는 것 같으니 아마도 마기로 인해 변이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
살아 있는 자가 없었다. 적어도 이 공터에는 말이다.
멀리서 접근하고 있는 몇몇 기척들을 보니 오던 중에 보았던 사내들이나 외곽의 보초들이 몰려오고 있는 모양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지금 이곳에 누워 식어가고 있는 자들보다 약하다.
오히려 찾아가기 전에 와주는 편이 편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진은 문득 자신이 만들어낸 끔찍한 풍경을 보면서도 그저 시체의 숫자를 세어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의 웃음에 앞에 있던 대장이라던 자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뽑을 것처럼 검자루를 쥐고 있긴 한데, 왠지 그 모양새가 이상했다.
아까만 해도 그 기세가 제법 강했었다. 지금 보이는 몸을 보아도 백전노장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강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긴장이 되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어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진은 다시금 한 걸음 물러났다.
휘익!
뒤이어 장검을 뽑아 휘두른 대장의 공세가 제법 날카롭지만 그저 평범한 검이었다. 마나가 실려 있거나 하진 않았다.
“칼페르스.”
진의 말에 대장의 눈가가 좁아졌다.
“용병단인가?”
“…….”
대답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맞는 모양이었다. 용병단이 주축이 된 파벌이라고 했으니 맞을 것이다.
“너는 누구냐?”
침묵하던 그가 처음 물어온 것은 그의 정체였다.
그는 궁금했다. 두려움만큼이나 궁금증 또한 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 난 진이라고 한다.”
그러자 표정을 바꾸어 한 손을 내미는 진이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 손에서 일렁이는 검은 기운을 보고도 손을 내밀어 맞잡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이름을 밝혔는데, 그쪽은 안 말해주나?”
“…….”
재차 묻는 진을 보고도 대장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그러자 내밀고 있던 손을 도로 수습한 진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라도 알아야 비석을 세워주든 할 텐데.”
“죽어!”
빈틈이었다. 이 틈을 파고들지 못하면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장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40여 년의 세월 중 가장 필사적으로, 가장 정확하고 빠른 일검을 휘둘렀다.
기기긱.
목을 베려고 했다. 벤 줄 알았다.
“…….”
“큰일 날 뻔했네.”
하지만 그의 검 끝에서 느껴진 것은 사람의 목을 벤 촉감이 아니었다.
진이 어느새 아공간에서 꺼낸 마검으로 대장의 검을 막은 것이었다.
“대장이니까 대장답게 보내줄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지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서둘러 물러나려던 대장은 순간 한 줄기의 바람과 같은 것이 자신을 뚫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한 줄기의 바람. 하지만 그것은 무척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대장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에 이르는 상체에 가느다란 혈선이 생겨나더니 그대로 스르륵 무너지며 몸이 둘로 나뉘었다.
“그러니까 이름을 말했어야지.”
진은 피조차 묻어 있지 않은 마검을 고쳐 쥐고 뒤로 돌았다.
어느새 주위에 몰렸던 수많은 사내들이 공포에 절은 얼굴로 그를 향하고 있었다.
“너희는 이름을 말할 테냐?”
진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몇몇 사내들은 다리가 풀렸는지 풀썩 주저앉은 채로 가랑이를 적시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누군가가 목숨을 구걸하자 뒤이어 봇물 터지듯 무릎을 꿇고 비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배가 고파서 그랬소!”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그런 이들을 한눈에 돌아본 진은 방금 배가 고파서 그랬다고 외치던 자가 아까 전 체념한 얼굴의 여성 하나를 움막으로 끌고 가던 자임을 알아보고 픽 웃음을 흘렸다.
“개과천선이라.”
진은 뚜벅뚜벅 걸어 그들을 향했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지. 실수도 할 수 있고.”
“…….”
“뉘우칠 수 있고, 개선할 수도 있지. 좋은 일이야.”
짐짓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하던 진은 생각에 잠긴 듯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때, 등을 돌려 달아나던 한 사내는 채 열 걸음을 가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끄아악!”
일검에 허리가 잘린 터라 아무리 달리라고 머리에서 명령을 내려도 두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도망치던 자가 끔찍하게 죽어버리자 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자들이 절망 어린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앞으로 어떻게 사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
검을 고쳐 쥔 진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것의 결과야.”
“우으윽!”
누군가가 울컥하며 먹은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커억, 허억.”
한참 허리를 숙인 채 토악질을 하던 사내는 문득 주변이 고요한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
조금 전까지 무릎을 꿇고 빌거나 아예 엎드려 있던 자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살아 있는 자는 그 혼자였다.
“아, 으아…….”
뭐라 말해보려 했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웅얼거림일 뿐, 말이 되지 못한 채 입술 밖으로 흘러내렸다.
뭔가 번쩍 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 또한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몸에서 떨어져 나와 어딘가로 향했다.
털썩.
무너진 마지막 사내의 시체에서 돌아선 진은 여전히 공터 가운데 묶여 있던 세 사람, 그중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시체 가운데서 괜찮은 수준의 장비들을 찾아 벗기기 시작했다.
그가 주변을 돌며 시체들의 무장을 벗겨 아공간에 넣는 동안 신기하게도 묶여 있던 이들은 도와달라거나 살려달라는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기절한 것일까 하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남녀의 얼굴엔 극한의 피로감과 더불어 일말의 희망, 그리고 그것만큼 큰 두려움이 뒤섞인 무언가가 있었다.
시체들을 한곳에 모아 쌓을 때까지도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주변의 천막 일부를 허물어 시체 더미 위에 쌓아올린 진은 부서진 상석 옆에 있던 커다란 화로 안에서 여전히 잘 타고 있던 나무토막 하나를 맨손으로 집어 들고 그대로 가져가 불을 붙였다.
“…….”
뒤이어 진의 발이 빨라졌다.
단순히 빨라졌다라고 말하기 뭐할 만큼 재빠른 것은 흑영보 때문이었다.
“아. 태우지 말걸.”
일단 시체들을 태우는 데 써버린 천막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은 충분히 재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