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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흑영보를 밟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진에 의해 공터 주변에 있던 천막들이 풀썩 풀썩 쓰러지더니 곧이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움막보다야 천막이 낫지.”
여전히 묶여 있던 남녀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그제야 조심조심 입을 연 여성이 순간 바람처럼 지나가 또 다른 천막을 해체하기 시작한 진을 향했다.
“저, 저어.”
하지만 목소리가 작아서인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천막 하나를 해체하고 어디론가 훅 집어넣은 진이 또 다른 천막을 향하는 것을 본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쥐어짰다.
“저기요…….”
“말해. 귀 안 먹었어.”
다시금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진이 또 다른 천막을 해체하며 말했다.
“저, 저희를 어쩌……실 건 가요?”
뒷말을 흐리며 울먹이기 시작한 그녀의 말에 진은 문득 행동을 멈추고 그쪽을 향했다.
“이름이 뭐야?”
그의 물음에 그녀와 그 옆에 있던 상태 엉망인 사내가 동시에 입을 다물고 몸을 떨었다.
“왜 겁을 먹지?”
고개를 갸웃하던 진은 둘이 아무 말 없자 계속해서 쓸 만한 천막을 찾아 해체하고 챙기는 일을 이어갔다. 10분도 안 되어 북쪽에 있던 천막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역시. 어딜 가든 윗대가리는 챙긴다니까.”
천막이 사라지자 그 안에 있던 각종 물건이나 가구, 잡동사니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중 몇몇 곳에는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무구나 옷감, 약간의 식량이 숨겨져 있었다.
특히 가장 커다란 천막이 최고였다.
아마도 대장이라던 자의 천막인 모양인데, 그 한쪽 구석에 숨겨져 있던 상자에는 그동안 노예들을 팔아 번 것인지 금화와 은화, 동화가 뒤섞여 잔뜩 들어 있었다.
별도의 주먹 크기 주머니에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금붙이와 은붙이가 들어 있었다. 모두 싹 쓸어 챙긴 진은 마찬가지로 다른 천막들을 뒤져 쓸 만한 것은 챙기고, 아닌 것들은 모두 시체 더미를 태우고 있는 불에 던져 넣었다.
“아아.”
그때였다.
어디선가 다가온 몇 명의 헐벗은 여성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
진은 잠깐 고민했다.
힘이 없는 여자라고 해도 결국 시류에 영합하여 자신의 배를 채웠던 이들이다.
“불가항력이라.”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진은 앞쪽 땅에 꽂아두었던 자신의 마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 다가오던 여성들 가운데서 누군가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나 언니?”
여기저기 멍이 든 몸, 터진 입술.
끽해야 스물도 되지 않은 것 같은 왜소한 체구의 여성이 누군가를 부르자 그 대답이 들려온 곳은 공터 가운데의 통나무였다.
“에린? 에린이니?”
등을 보인 채로 묶여 있던 가운데의 여성이 온몸을 뒤틀며 뒤를 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언니!”
울음을 터뜨리며 그곳으로 달려가려던 에린이라는 여성은 문득 그쪽에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
진은 쥐고 있던 검과 그녀를 번갈아보며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언니…….”
울먹이며 말하는 에린의 목소리에 레나라던 여성은 문득 자신의 앞쪽에 서서 그녀의 등 뒤쪽을 바라보고 있는 진을 보았다.
“사, 살려주세요.”
“…….”
“노예로 팔려가긴 싫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더 이상 흘러나올 것이 없는 것처럼 말라버린 몸이지만 여전히 눈물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울며불며 말하는 레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은 그 너머에서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는 여성들, 마찬가지로 비슷한 무력감과 체념이 얼굴에서 느껴지는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을 돌아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인가?”
“에, 에린은 제 동생입니다. 제발 그 아이만이라도…….”
레나의 말에 진은 다시금 에린이라는 여성을 보았다. 그녀의 주위에서 나머지 세 명의 여성이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감싸주고 있었는데, 문득 휙 하고 움직인 진이 다가오던 그녀들과 레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 언니를 살려주세요. 제, 제가 대신 드릴게요.”
“뭘.”
“저, 저기. 저기.”
뭘 주겠다는 것인지 야윈 몸으로 쩔쩔매며 말하는 에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은 그나마 걸치고 있는 천 쪼가리마저 떨리는 손으로 벗어 내리는 그녀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드릴 게 이것밖에 없어요.”
세민이 떠올랐다. 그녀도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쉽네. 너무 쉽네.”
이곳 여성들은 절개 같은 것이 없나. 그저 안 좋은 상황이면 언제든 내밀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순결인가. 얼굴을 구기던 진은 천천히 에린에게 다가가 검을 내밀었다.
푸욱.
“……!”
경악한 에린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비틀비틀 옆으로 물러났다.
“끼약!”
그녀의 옆에 있던 여성들이 소리치며 물러나자 이 상황을 보지 못한 레나가 손목과 발목이 쓸려 피가 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부림을 치며 뒤를 보려 했다.
조금 느슨해진 밧줄 덕에 어렵사리 고개를 돌릴 수 있던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는지 온몸에 멍이 가득한 여동생이 한 쪽 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그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의 가슴팍에 커다란 검이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끄, 끄윽.”
신음과 함께 주르륵 피를 흘리는 젊은 여성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은 검을 그대로 쥔 채, 슬쩍 다리를 뻗어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넣고 좌우로 툭툭 쳐 벌렸다.
“맞잖아. 칼페르스.”
그녀의 왼쪽 허벅지.
벌리지 않으면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곳에 칼페르스의 문신이 있었다. 새겨진지 오래된 문신이었다.
떨그렁.
그녀가 뒤에 숨겨 쥐고 있던 단검 한 자루가 땅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뒤이어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에 박힌 대검을 뽑아보려 애를 쓰던 그녀였지만 점점 힘이 빠지는지 그저 허우적거릴 뿐이던 두 팔은 곧 아래로 축 늘어졌다.
푸학.
가슴 복판을 뚫고 등 뒤로 빠져나갈 만큼 깊이 찔렀던 검을 수습한 진은 지지할 곳이 없어지자 그대로 무너져 버린 여성의 시체 옆에서 그녀가 떨어뜨린 단검을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폈지만 평범한 단검이었다.
“…….”
뒤이어 진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조금 물러난 채로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나머지 여성들이 다급히 다리를 벌려 허벅지 안쪽을 보여주었다.
“굳이 보여줄 필요 없어. 문신으로 찾은 게 아니니까.”
손을 내저은 진은 들고 있던 단검을 옆에 주저앉아 있던 에린의 손에 쥐어주었다.
“네 가족은 네가 구해.”
“네? ……네!”
그러자 비슬비슬 일어난 에린이 애써 힘을 내며 달려가 묶여 있던 사람들의 밧줄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람들을 구하는 동안 천막 해제 작업을 이어간 진은 묶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풀려날 즈음 대부분의 천막을 챙길 수 있었다.



제8화 또 다른 파벌. 오아시스(Oasis)


진정한 지도자는 현재의 상황을 이끌어가는 자가 아니라
미래의 상황을 끌어가는 자이다.

― 에드먼드 버크 ―



세민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옆에선 한스가 두 팔을 주무르며 쉬고 있었다.
솥에는 물이 바싹 마른 채 다 익다 못해 점점 마르기 시작하는 하울페그의 고깃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이 탈까 봐 노로 이리저리 뒤집고 있던 세민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한스를 보고 그의 시선을 따라 한곳을 향했다.
“아아.”
사람들이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잔뜩 움츠린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한스는 문득 무엇을 보았는지 긴장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 오시는구나.”
“그래요?”
세민이 노를 넘기자 한스가 그것을 받아 고기를 뒤집는 일을 이어갔다.
그런 식으로 교대로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처음엔 솥의 물을 젓는 일이었지만 물이 다 증발한 이후엔 고기가 타지 않도록 이리저리 굴리는 일로 바뀌었다.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기에 조금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들의 응석에도 꾹꾹 참고 버텼다.
이젠 그분 말고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남아 있던 약간의 식량은 모두 약탈당했기에 당장 이것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길어야 며칠일 뿐, 그 이후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레, 레나인가?”
한스는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한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세민 역시 놀란 얼굴로 그곳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파악했다.
대략 백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위를 쉴 새 없이 돌며 호위하고 있는 인물은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분이었다.
“오.”
곧 마을로 도착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에 하나같은 얼굴로 군침을 삼켰다. 잡혀간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스물 셋일 정도로 어리거나 젊은이들이었기에 당장 느껴지는 허기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진의 눈치를 살폈다.

진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커다란 우리 안에 갇혀 있던 그들을 그대로 둔 채로 마을 전체의 움막들을 뒤져대던 그는 움막 역시 좋은 땔감이 되겠다며 허공으로 슥슥 집어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공터로 바뀌어 버렸다. 공터 한가운데의 우리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먼 북쪽에 거대한 불이 있을 뿐, 그들을 잡아온 자들 중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사냥을 떠났던 열 명 남짓한 무리들이 몇 명의 남녀를 잡아 돌아왔을 때 그들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웅성대던 자들의 이름을 묻던 진은 그들이 대답하지 않자 그대로 휘몰아치듯 거대한 검을 휘둘러 도륙하기 시작했다.
“비석은 필요 없겠군.”
사냥꾼들을 모두 죽인 그가 내뱉은 말은 그 한마디였다.
우리의 입구를 부숴 열어준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선별하듯 주의 깊게 살핀 후에야 풀어주었다. 그 과정에서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진 역시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있던 몇몇 생존자들, 특히 에린이 조용히 설명해 주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은 이들은 모두 스파이였다. 하나같이 언젠가 길에서 마주쳐 그들의 마을에 합류하게 된 인원들이었고, 겉보기에 약해 빠진 것으로 보여 위험하다 생각하지 않았었다.
죽은 자들의 몸 여기저기 숨겨진 문신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발견한 생존자들은 다시금 진이라는 남자의 무서움을 알게 되어, 그 강함에 이끌렸다.
“사람이 되고 싶나, 노예가 되고 싶나.”
진의 물음에 모두 사람이 되고 싶다 답했다.
누구도 노예가 되고 싶은 자는 없다. 어찌 보면 우스운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하지만 진은 웃었다. 크게 웃었다.
그는 부서진 우리 입구가 아닌, 옆쪽의 다른 곳으로 걸어가 성큼성큼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우리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것 봐. 이렇게 쉬운데 말이야.”
다시금 틈새를 벌리고 바깥으로 빠져나온 그는 그런 식으로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을 열 곳 이상이나 금방 찾아내 보여주었다.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지. 죽을지도 모르니까.”
약해 빠졌어.
진의 말에 그곳에 있던 누구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런 틈을 발견했으면서도 나가지 못하고 망설이던 이들은 더욱 부끄러워했다.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내 사람이 되어라. 그게 싫다면 너희는 언제가 되었든 결국 노예가 될 거야.”
강제성이 없는 말이었다. 그 말만 남기고 진은 뒤돌아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물쭈물 망설이던 이들 중 가장 먼저 진의 뒤를 따른 이는 케이델. 형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붙잡혀 고초를 당했던 열여덟의 청년이었다.
―처음 써보는데, 아프려나?
아공간에서 꺼낸 칼의 포션을 부어주고 먹여준 진이었다. 약효가 좋은지 한 병의 절반은 상처에 붓고 나머지 반병을 마셨을 뿐인데 거센 채찍질에 엉망이 된 몸이 적잖게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