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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케이델의 등엔 피투성이의 형이 업혀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의 형 버레인이 살아 있었다.
진은 그에게 포션을 두 병이나 먹여주었다. 아깝다는 표정이 전혀 없는 그를 보며 케이델은 형 이외에 처음으로 누군가를 따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자신의 형보다 더 큰 무언가를 지닌 사람 같았다.
그렇게 케이델이 형과 함께 진의 뒤를 따르자 레나와 에린이 그 뒤를 따랐다.
레나는 버레인의 약혼녀였다. 하지만 버레인의 은인이며 그가 함께 간다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진을 따르고 싶었다.
그렇게 네 명의 남녀가 뒤를 따르자 몇몇 청년들과 소년들이 남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은 채 서둘러 진의 뒤에 뭉쳐 가기 시작했다.
행렬이 시작되자 따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눈치를 살피는 사람으로 나뉘게 되었다.
“나를 따른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는 게 아냐.”
이어진 진의 말에 눈치를 보며 따르던 이들이 행렬에서 떨어져 그곳에 남았다. 그렇게 진을 따르는 이들이 백 명가량, 그곳에 남은 이들이 또한 백 명가량이 되었다.
“저들은 어떻게 될까요?”
어느새 그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 익숙해진 에린은 그가 주었던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죽겠지.”
“네?”
움찔 놀라며 되묻던 그녀는 이어진 진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인간은 누구나 죽어.”
“…….”
“저들은 좀 빨리 죽겠지.”
이어 대꾸하던 진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들에게 남은 게 있나? 식량도 없고, 무기도, 갈 곳도 없지. 있는 건 사람뿐이야. 오히려 탈나기 좋아.”
“그건 우리도…….”
슬쩍 옆을 따르며 말하는 케이델과 그 등에 업힌 버레인을 본 진은 문득 후들거리는 케이델의 다리를 보며 허리춤의 자루에서 아팔 하나를 꺼내 반으로 쪼개어 입에 물려주었다.
“……!”
“너희한텐 내가 있다.”
입에 들어온 아팔 반 조각을 우적우적 깨물어 삼킨 케이델은 뒤이어 나머지 반을 내미는 진에 서둘러 고개를 내밀어 받아먹었다.
꿀꺽.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이 군침을 삼켰다. 몇몇은 꼬르륵거리는 배를 쥐고 애처로운 눈을 했지만 진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먹고 싶으면 누구 하나를 업고 가라. 아니면 참아.”
그 말에 아무도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로 온 것이다.
마을에서 풍겨오는 무언가를 굽는 냄새가 사람들의 코를 자극했다.
“음. 적당히 익었군.”
진은 슬슬 겉이 타기 시작하는 고깃덩어리를 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네, 네. 자, 잘 익었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한스가 머뭇머뭇 답하자 진이 뭐 하고 있냐며 자신의 검을 뽑아 그 커다란 고기를 푹 찔러 번쩍 들어올렸다.
“와아.”
지켜보고 있던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의 신위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아주 커다란 고기가, 잘 익은 고기가 눈앞에 있었기에 절로 탄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뒤이어 뭔가를 고민하던 진이 꺼낸 것은 사냥꾼들의 마을에서 가져온 커다란 탁자였다. 대장의 천막에 있던 그것을 꺼내 그 위에 고기를 턱 올려둔 진은 뽑아낸 검을 횡으로 휘둘러 고기를 두 조각내 그 옆에 내려두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거기, 너.”
“예! 해멀슨입니다!”
진이 가리킨 사람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였다. 못 먹어서 마른 몸이었지만 기본적인 골격이 아주 튼튼해 보이던 그는 한 마을의 자경단 출신이라고 했었다.
“해멀슨이 배식 담당이다.”
“알겠습니다!”
아공간을 뒤져 그럭저럭 길지도 짧지도 않은 넓적한 면의 칼 하나를 꺼내 고기에 턱 꽂아준 진은 해멀슨에게 자리를 맡기고 물러났다.
“고, 고기입니다! 고기라고요, 여러분.”
뜻 모를 감정에 잔뜩 심취해 소리치던 해멀슨은 진이 남겨둔 칼을 뽑아 커다란 고기를 턱턱 내려쳐 썰기 시작했다. 잘 삶아져서인지 서걱거리며 부드럽게 썰리는 고기의 틈새로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보는 사람들을 안달하게 했지만 누구도 앞으로 먼저 나서거나 들이대는 사람 없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자. 앞으로 가라.”
“고마워요, 형.”
그리고 몇몇 청년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양보를 하며 앞에 세워주고 있었다.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는 두려움이 적지 않게 사라진 얼굴들엔 약간의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여전히 불 위에 얹혀 있던 솥을 아공간에 집어넣은 진은 그 뜨거운 솥을 그냥 잡은 탓에 화상으로 일그러진 손바닥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보며 그 옆에서 움찔 놀라던 세민과 한스를 보았다.
“입식구가 늘었다.”
“그, 그렇습니다.”
더듬거리던 한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괘, 괜찮은 것 같습니다.”
“뭐가?”
“어, 얼굴 말입니다.”
그의 말에 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몇 번 걸렀으니까.”
“…….”
분류 작업은 사냥꾼들의 마을을 떠나오면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던 길에 몇 차례나 조우한 몬스터들을 이용하여 그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겁쟁이들을 정리했다.
동정심은 필요 없었다. 진은 그들을 아껴줄 이유가 없었다.
겁쟁이의 숫자가 줄어들면 그만큼 살아남은 이들이 누릴 것이 많아진다. 때문에 철저하게 거르고 걸러 여기까지 왔다.
지금 줄을 서서 고기를 배식 받고 있는 이들은 나이가 적건 많건 관계없이 그런 진의 의도를 확실히 알게 된 이들이었다. 눈치를 보며 살 궁리를 하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이들을 방패삼아 목숨을 부지하거나 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
“무엇이 필요하겠나?”
침묵하고 있던 한스를 보며 묻자 그가 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 물이 필요합니다.”
“물이라.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니까.”
끄덕이던 진은 옆에 말없이 서 있던 세민을 보다가 아, 하고 아공간에서 빵 하나를 꺼내 건넸다.
“안내해 주면 하나 더 주겠다고 했었지.”
“아.”
조금 놀랐던 그녀는 그녀조차 잊고 있던 것을 말하며 건네준 빵을 소중히 안아 들었다. 고기를 먹고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그런 세민과 그녀의 품에 있던 빵을 보며 부러운 눈을 했지만 이미 그들 또한 무언가를 먹고 있어서인지 욕심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다, 다른 파벌이 하나 더 이, 있습니다.”
한스의 말에 세민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크게 세 곳이 남았다고 했었지 않나? 한 곳은 여기였지만 무너졌었고, 사냥꾼들도 사라졌으니 한 군데 남았겠지.”
그게 어디냐는 눈을 하자 주위를 돌아보던 한스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오아시스입니다.”
“…….”
진은 자신이 알고 있던 말과 같은 뜻일까 생각했지만 곧이어 이어진 세민의 덧붙임에 그것이 맞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땅과 호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이 있는데 왜 다들 그곳에 있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냥꾼들은 성벽과 직접 거래하지 않습니다.”
그리 말한 세민은 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더했다.
“오아시스는 상인들의 파벌입니다. 그들은 자체적인 방어 병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상인들에게 팔고, 상인들이 성벽으로 데려가 거래한다는 거군.”
진의 말에 한스와 세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사냥꾼들을 상대해 본 진은 그들이 어느 정도 강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허무하리만치 쉽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건 자신이 강했기 때문이지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목을 베려 했던 사냥꾼 대장의 일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방심 때문이었지만 자칫하면 당했을 정도로 아슬아슬했었다.
제대로 맞붙기 전에 해치워 버렸지만 그의 두 심복들 역시 지닌 기세가 남달랐었다. 그래서 더 빨리 해치운 것이기도 했다.
그런 사냥꾼들이 넘보지 못할 정도라면 오아시스라는 곳의 세력이 훨씬 강하다는 이야기였다. 상인들의 방어 병력이라면 아마도 그들의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들이 아닐까 생각하던 진은 새삼 이런 곳에서 돈을 받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돈을 받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상인들이 성벽 너머와 거래를 한다면 그 물품은 아마도 이곳에서 필요한 것들, 즉 식량이나 무구 등일 가능성이 크다.
성벽 방어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이쪽의 인간들이 성벽만 넘어서지 않으면 된다고 여기고 있다 들었다. 현재로서 성벽을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예로 팔려가는 것뿐이다.
“노예라.”
진은 문득 노예로 위장하면 성벽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성벽 너머로 팔려간 노예는 어찌 되지?”
그의 물음에 한스도 세민도 잘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여러 종류로 갈리게 됩니다.”
그러자 들려온 목소리는 어느새 다가온 에린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벗다시피 한 몸이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곳들은 잘 가리는 수준이었다.
옷감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녀를 배려하자면 다른 모든 이들도 동일하게 생각해 줘야 했다. 특별대우는 귀찮은 일을 수반하게 된다. 딱히 기온이 낮은 것도 아니기에 그대로 무시한 진은 그녀가 하는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몸 상태와 골격, 외모 등등을 따져 남자의 경우 노예병으로 넘어가거나 기사들의 종자로 팔리게 되고, 일부는 귀부인들의 색노로 팔리기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에린은 잠시 어깨를 움츠리더니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여성은 별다른 구분이 없습니다. 매음굴에 팔리거나 개인에게 팔려갑니다.”
그걸 어찌 그리 자세히 아냐고 묻고 싶었던 진은 문득 그녀의 몸 곳곳에 나 있는 멍과 상처, 다리 사이에 아직 남아 있는 말라붙은 피의 흔적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진을 알아차렸는지 에린의 어깨가 또 조금 움츠러들었다.
“이거라도 걸쳐.”
진은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 그가 사냥꾼 마을로 진입하며 처음으로 죽인 보초에게서 벗겨 아직 입고 있던 누더기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잠시 머뭇거리던 에린은 감사히 고개 숙이며 그것을 받아 걸쳤다.
“언니는 어때.”
진의 물음에 에린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케이델의 옆에서 버레인의 간호를 돕고 있는 레나가 있었다.
표정을 보니 그럭저럭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진은 다시금 조금 전 생각해 보던 문제에 대해 떠올렸다.
노예로 위장하여 성벽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리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고 성벽을 부수던지 해야겠군.”
“네?”
중얼거리던 진은 놀란 눈으로 되묻는 세민과 비슷한 얼굴의 에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혼잣말이다.”
그리고 한스를 향한 진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이, 이곳에 오, 오래 머물 수 어, 없습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한스에게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에린보다도 어깨를 더 움츠린 한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렵게 말을 이었다.
“사, 사냥꾼들이 지속……적으로 사람을 고, 공급하지 않으면…….”
애써 말을 잇던 한스는 점점 더해지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다 듣지 않아도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인들의 파벌은 자체적인 사냥보다는 사냥꾼들에게서 노예를 공급받아, 그들을 성 너머에 팔아넘기는 것으로 생필품과 재물을 얻고 있다. 그 공급이 끊긴 이상 그들의 생계가 타격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직접 사냥에 나설 가능성이 컸다.
문득 마검을 거꾸로 쥔 진이 땅바닥에 길게 줄을 그었다.
“이게 성벽.”
그리고 안 쪽 한곳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게 여기라고 하면, 오아시스는 어느 쪽에 있지?”
그의 물음에 한스는 쩔쩔매며 애를 먹었고, 세민도 그런 식으로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지 고개를 저었다.
“필립 씨였다면 알았을 텐데…….”
다시금 죽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탄식하는 세민을 무시한 진은 옆에 있던 에린이 후다닥 달려가더니 케이델을 불러오는 것을 보았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에린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오자마자 이야기한 케이델은 바닥에 그려둔 긴 선과 동그라미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곧 발끝으로 그 사이 한곳에 좀 더 큰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