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1화
“이곳이 오아시스입니다. 형과 함께 이 근방까지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주변 여건은?”
“환경은 나쁘지 않습니다. 호수가 있고, 작은 숲도 있습니다.”
“아니, 그 환경 말고.”
진의 말에 아, 하며 뭔가 깨달은 케이델이 얼굴을 굳혔다.
“몬스터는 없습니다. 적어도 근방에는 없고, 간혹 떠도는 몬스터나 마수가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호수와 숲이 있고 몬스터가 잘 나타나지 않는 곳.
그야말로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그런 장소였다.
“나무가 있는데 왜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서지 않는 거지?”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들이 있었다. 특히 바로 저것이 가장 궁금했다.
“상인들은 예전, 그러니까 성벽이 생겨나기 전보다도 더욱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귀족도 없는 땅이라 그들이 귀족인 셈이죠.”
케이델의 말에 이어 한스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 사, 사람 숫자가 저, 적어서.”
그 말에 진은 가만히 끄덕였다.
애초 세민과 한스가 살던 마을만 해도 천 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 마을 외에 다른 마을 출신들까지 있는데도 숫자가 2백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 합류하지 않은 이들을 합해도 3백이 될까 말까 하는 숫자다. 나이든 이들이 죽고, 젊은이들은 끝없이 사냥당한 탓이다.
“오아시스를 가져야겠어.”
한참이나 생각하던 진은 그것 외엔 답이 없음을 알기에 입 밖에 꺼내었다.
“…….”
“아아.”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제각각의 생각이 담긴 표정들을 했다.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감싸는 청년들. 짐짓 두려움과 긴장을 감추며 애써 이를 앙다문 청년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그 팔에 매달려 있는 비슷한 또래의 소녀를 돌아본 진은 문득 성큼성큼 걸어와 그의 앞에 선 해멀슨을 보았다.
“배식 마쳤습니다.”
그 커다란 고기를 백 조각이 넘게 최대한 균일하게 잘라야 했으니 느껴지는 피로가 적지 않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 있는 해멀슨을 보며 진은 왠지 듬직한 기분이 들어 그 굵은 팔을 탁탁 두드려 주었다.
“자경단 출신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우렁차게 답하는 해멀슨의 목소리가 맘에 들어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던 진은 그와 그 옆에 있던 케이델을 보며 말했다.
“당장 무기를 쓸 수 있는 자,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해서 나누어라. 남녀 구분 없다. 정확하게 골격과 가진 힘, 신체 조건으로 따져 선정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갑작스런 지시에 놀라긴 했지만 서둘러 사람들을 모아 양쪽으로 나누기 시작한 해멀슨과 케이델이었다. 두 줄로 서기 시작한 사람들이 둘의 평가와 지시에 따라 좌우로 갈라져 긴장한 얼굴로 진을 향했다.
“어리다고 빼거나 그런 것 없다. 아직 어려서 무기를 휘두를 힘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함께 싸워라.”
“……!”
그의 말에 막 나이가 어려 비전투인 쪽으로 분류될 뻔했던 소년 하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건장한 청년들의 무리로 향했다.
“열다섯입니다.”
“그래서?”
케이델의 말에 가만히 되물은 진은 어색한 얼굴로 답하지 못하는 케이델을 향해 나지막이 덧붙였다.
“누구나 죽어. 싸울 수 있는데 못 싸우고 죽으면 그 억울함은 누가 풀어줄 거야?”
“맞습니다!”
방금 전투 인원에 합류한 열다섯이라던 소년이 크게 소리쳐 답했지만 잔뜩 긴장한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금방 지칠 사람은 뽑지 마. 싸우고 싶은 것과 싸울 수 있는 것은 다르다.”
“알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투 인원 30여 명, 비전투 인원 80여 명의 분류가 완료되었다. 해멀슨과 케이델이 꼼꼼하게 심사했는지 전투 인원에 뽑힌 이들은 확실히 조금 야윈 것은 있지만 골격이 단단하고 눈빛들이 좋았다. 사이사이 몇 명의 여성도 끼어 있어 조금 의외였지만 자세히 보니 역시나 체구의 차이는 있어도 싸울 수는 있어 보였다.
“열 명 정도씩 셋으로 나눠야겠군.”
전투 인원들을 하나하나 돌아본 진은 당장 흠잡을 곳은 없기에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전투 인원들은 이 시간부터 ‘전투 소대’로 칭하고, 소대장의 위치에 해멀슨이 들어간다.”
“알겠습니다.”
진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모여 있던 전투 소대원들은 지금도 서로서로 상대방을 살펴가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는데, 그 누구도 당장 해멀슨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라 여겨질 만큼 체구나 기세가 차이 났다.
“소대는 세 개의 십인대로 나누고, 각각 십인대장을 선발하여 비슷한 인원으로 편성한다. 십인대장 임명 권한은 소대장에게 일임한다. 차후 소대의 인원이 백 명이 넘어갈 경우, 소대의 명칭을 백인대로 바꾸고, 소대장은 백인대장으로 직위를 교체한다.”
나지막이 지시하는 진의 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전투 소대만이 아닌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채로 귀를 기울였다.
“십인대장의 임명권은 소대장에게 있지만 그 기준에 나이와 성별은 적용하지 않도록 명한다. 철저하게 그 사람의 인품과 리더십, 다른 이들을 이끌 수 있는 재질만 갖고 판단하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차후 한 달에 한 번 전투 소대 전체 개편을 실시하겠다. 소대장 또한 그때 그때 다시 임명할 것이다. 물론 재임명도 가능하다.”
개편이라는 말에 해멀슨이 조금 긴장한 눈치였지만 사실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하던 이들에게 있어 한 달 후라는 말은 너무나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소대장은 3개 십인대 편성과 십인대장을 임명하도록. 아, 케이델은 이쪽으로 열외.”
“예?”
“따로 빠지라고.”
“아, 예.”
해멀슨에게 이후를 맡기고 돌아선 진은 옆쪽에 따로 서 있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스윽 돌아보았다. 확실히 전투 소대에 비해 전체적으로 약해 보이는 이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조금만 몸을 만들면 전투 소대에 넣어도 될 것 같은 이들 역시 적잖게 끼어 있었다.
어정쩡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케이델을 본 진은 다시금 비전투 인원을 한눈에 돌아본 후, 옆에 선 케이델과 무언가 비교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스무 명 정도 나오겠군.”
“예?”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묻던 케이델을 보며 진이 비전투 인원을 가리켰다.
“아슬아슬하게 전투 인원에 편성되지 못한 이들 중에서 조금 기준을 낮춰서 스무 명 선발해.”
“스무 명…….”
조금 곤란해 하는 얼굴이던 케이델은 곧 표정을 고치더니 비전투 인원의 행렬 가운데서 몇 사람들을 집어내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골라내는 케이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진은 그가 걸러낸 인원이 서른 명이 넘는 것을 보며 눈썹을 오므렸다.
“여기서 다시 분류하겠습니다.”
“그래.”
쩔쩔매던 케이델은 눈빛을 고치고 다시금 몇 사람을 선별해 원래 행렬로 돌려보냈다. 전혀 불만을 갖지 않는 것을 보아 역시 싸움에 어울리는 정신력은 아니라 생각하던 진은 문득 옆쪽의 해멀슨 주위에서 보이지 않는 기 싸움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저 싸움에서 승리한 세 명이 십인대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누가 될 것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스무 명 분류하였습니다.”
“현재 분류된 스무 명을 ‘예비 소대’로 지칭하고 예비 소대장에 케이델을 임명한다.”
“…….”
움찔 놀라는 케이델을 무시한 채 진은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예비 소대는 조금만 더 다듬으면 바로 전투 소대로 편입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다. 그 말 그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전투 소대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비 소대는 별도의 십인대를 구분하지 않는다. 십인대장의 임명 또한 없다. 모든 것은 예비 소대장인 케이델에게 일임한다.”
“알겠습니다!”
과장되게 소리쳐 답한 케이델은 서둘러 예비 소대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아아 하며 손바닥을 친 진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전투 소대로 향했다.
“편성과 임명은 끝났나?”
“그렇습니다. 십인대장들은 앞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던 해멀슨의 고함에 뭉쳐 있던 소대원들 사이에서 세 명의 사내, 아니,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1십인대장 우하달, 스무 살입니다.”
가장 먼저 앞에 나선 이는 170센티미터가 살짝 넘는 듯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가 옆으로 빠지자 그 뒤로 열 명가량의 소대원들이 우루루 빠져 줄을 섰다.
“2십인대장 제스퍼. 열일곱입니다.”
다음으로 나선 이는 확실히 십인대장이 될 거라 생각했던 2미터 남짓한 키의 청년이었다.
“몇 살이라고?”
“열일곱입니다!”
“…….”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참았다.
다시금 우루루 그 뒤에 서는 2십인대원들을 주욱 본 진은 마지막으로 앞에 나온 160센티미터 정도 키의 여성을 내려다보았다.
“3십인대장 샤미넬입니다. 스물세 살입니다.”
키도 작고 힘도 별로 없어보였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진은 문득 자신을 올려다보는 샤미넬의 눈을 보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했지?”
“…….”
“성벽이 생기기 전 말이야.”
“식당에서 일했습니다.”
“주방이겠군.”
“네.”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을 죽여 본 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다 해도 보통 사람에 비해 더 쉽고 거침없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
다시금 그녀의 눈을 본 진은 어쩌면 짐승만 죽여 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캐묻진 않고 가만히 끄덕였다.
전투 소대에 속한 여성들은 모두 3십인대에 들어가 있었다. 여러모로 그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 진은 뒤이어 몇 걸음 물러나더니 허공에 손을 휘저어 무언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콰라랑.
채챙―!
허공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각종 무기와 장비들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전투 소대원이 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진은 해멀슨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무기와 방어구를 택해 가질 수 있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적잖게 놀라고 있던 해멀슨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의 손에 딱 맞는 전투도끼 두 자루를 챙겨 드는 것을 시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나와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가죽 갑옷이나 부츠, 검과 창, 방패 따위를 골라 갖는 것을 본 예비 소대원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무구는 정식 전투 소대원과 두 소대장에게만 지급된다.”
케이델에게 가 그에게도 무구 선택권을 주며 말한 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무 명의 예비 소대원들을 마주보았다.
“전투 소대원이 죽어 빈자리가 생겨도 그의 무구를 물려주거나 하진 않는다.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곧바로 예비 소대원을 편제 이동시키지도 않는다.”
“…….”
“능력이 된 이들만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쓸 수 있는 이들에게만 무기가 지급된다. 알겠나?”
“예!”
거칠게 소리치는 예비 소대원들을 돌아본 진은 그들의 옆에도 무언가를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다름 아닌 사냥꾼 마을에서 보초들이나 일반인들이 지니고 있던 조잡한 창이었다. 그 숫자가 50개를 넘어갔다.
“하나를 들어도 되고 두 개를 들어도 된다. 잘라서 사용해도 된다. 가장 자신 있는 형태로 가공해서 사용하도록.”
그의 말에 모여 있던 예비 소대원들이 바닥에 놓인 조잡한 창들을 하나, 혹은 두 자루씩 챙기기 시작했다. 당장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무기였다. 벌써부터 휙휙 휘둘러보거나 찌르기 연습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전투 소대와 예비 소대를 바라보는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에는 약간의 부러움과 더불어 아쉬움과 안타까움, 또 다른 기대들이 뒤섞여 있었다.
진은 나머지 인원들의 앞에 서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저들이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그 말에 몇몇 이들은 안도하는 얼굴이었지만 몇몇 이들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면 죽게 된다.”
“…….”
그렇게 뒷말을 잇던 진은 우울해진 얼굴들을 돌아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저들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무기를 든 것이지 너희를 지키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 말한 진은 혹시나 자신들을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것 같은 얼굴 얼굴들을 돌아보았다.
“희생은 없다. 모두 똑같이 행하고, 똑같이 나눠가진다. 그렇다면 너희는 저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고 죽는 것에 대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
우당탕!
쿠지쿵―!
그들의 앞에 쏟아진 것은 두꺼운 가죽들과 낡은 나무들, 긴 밧줄 따위였다. 그것들은 사냥꾼 마을에서 해체시켰던 천막 재료들이었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 외의 모든 것이 너희가 할 일이다. 너희가 하지 않는 것을 대신해 주는 저들 대신, 너희는 그들이 하지 않는 것들을 해야 한다.”
뒤이어 진은 톱과 삽, 곡괭이, 커다란 망치 등등 각종 도구들을 꺼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