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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누가 더 잘나고 누가 더 못나서 무기를 쥐고 못 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저들은 싸우고, 너희는 일한다. 그 차이다.”
그리 말한 진은 앞에 있던 한스를 손짓해 불렀다.
“예. 부, 부르셨습니까.”
“세민과 함께 사람들을 나눠라. 여성, 남성, 할 줄 아는 것과 이곳에서 해야 할 일 등등. 할 수 있겠어?”
“무, 물론입니다. 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오아시스로 모두 쳐들어가는 것은 여러 모로 안 좋은 일이 될 거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적들이 누구든, 인간이라면 아직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던 진이지만 지금 이대로 사람들을 줄줄이 달고 쳐들어간다면 대다수가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것도 확실했다.
“지금 이 자리는 안전한 편인가?”
“멀리 버, 벗어나지만 않으면 벼, 별다른 위험은 없습니다.”
“그럼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야겠군.”
“그, 그게 좋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 사냥을 시작하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내가 지시한 것만 신경 써.”
“알겠습니다.”
세차게 끄덕이는 한스의 등을 두드려 준 진은 서둘러 돌아가는 한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비전투 인원들을 향했다.
“앞으로는 모두의 식사 역시 비전투 인원들이 담당하여 관리하고 분배한다.”
쿵. 쿠웅―
뒤이어 꺼낸 하울페그의 커다란 고기와 넓적다리 등을 본 몇몇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울페그?”
“우, 우리가 먹은 게 하울페그였다고?”
“게다가 다 자란 놈이야.”
놀라운 목소리가 전염처럼 퍼져 나간 이후 전투 인원도 비전투 인원도 모두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남자는 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였다.
게다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보통의 인간이 아닌 ‘다키안’이라고 했다. 다키안이면서도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가족이 다키안으로 변해 끔찍한 짓을 벌이는 것을 직접 본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있어 다키안이라는 말은 지옥의 사자보다도 더한 의미였다.
“당분간은 지금 이곳에서 지낸다. 편성이 끝나면 비전투 인원들이 천막들을 설치하고, 고기를 적재하도록. 전투 소대와 예비 소대는 나를 따른다.”
전투 소대원들은 원하는 무기들을 모두 고른 듯 보였다. 아직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몇 가지의 무기와 방어구들이 있었기에 그것을 도로 아공간에 넣은 진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전투 소대와 그 옆에서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예비 소대의 시선을 돌아보며 왠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나는 전쟁놀이였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다.
몇 시간 전에 수십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니 조금은 씁쓸한 느낌이 있었지만 죄책감 같은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냥하던 자들이 사냥 당했을 뿐이다. 그저 그뿐이다.
몬스터에게 죽든 인간에게 죽든 죽음 그 자체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자신에게 죽은 것은 오히려 몬스터에게 죽은 것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던 진은 인원 편성과 천막 설치를 시작한 비전투 인원들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공터에 두 소대원 50여 명을 모아놓고 해멀슨과 케이델을 앞으로 불러냈다.
“각 십인대장들은 이쪽으로.”
진의 부름에 자신의 대원들과 얼굴을 익히며 친분을 쌓던 세 명의 십인대장이 후다닥 달려와 그 앞에 섰다.
“모두에게 고르게 배급하도록.”
진이 내려놓은 것은 무척 많은 양의 빵과 과일이었다. 그것을 서둘러 품에 가득 안아 든 십인대장들은 자신의 대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기 위해 기 싸움을 벌였지만 ‘고르게’를 강조하며 다시 말하는 진의 목소리에 싸움을 멈추고 비슷한 양을 챙겨가기 시작했다.
십인대장들이 빵과 과일을 챙겨가 전투 소대원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본 예비 소대원들의 시선에 짙은 부러움이 서렸다. 고기를 먹긴 했지만 그동안 먹은 것이 변변치 못했던 터라 밑 빠진 독에 물 한 바가지를 부은 것처럼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이건 예비 소대의 몫이다.”
다시금 빵과 과일을 꺼내놓은 진이었지만 그 양은 전투 소대에 비해 확실히 적었다. 한 명 한 명 나눠주면 그 양이 훨씬 적을 거라는 것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전투 소대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늘었지?”
대답하는 이는 없었지만 예비 소대원들의 눈빛은 더욱더 달라져 있었다. 의도적인 차별은 그 대상에 대한 악감정을 일으키지만 동기부여에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아껴 먹지 마라. 남긴 사람은 더 안 준다.”
뒤이은 진의 말에 과일이나 빵을 따로 숨겨두었던 몇몇 이들이 흠칫 놀라며 도로 꺼내 먹기 시작했다. 아마 두었다 먹거나 누군가에게 전해줄 생각이었겠지만 그렇게 둘 진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 챙기다 네가 칼 한 번 휘두를 힘이 모자라면 너도 죽고 그 사람도 죽고 다 죽는 거야.”
진의 말에 아직도 숨겨둔 것을 꺼내지 않던 나머지 전투 인원들이 모두 주섬주섬 도로 꺼내 먹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배급받은 식량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던 진은 그들이 식사를 마친 후, 적당히 소란스러워질 정도로 여유가 생겨났을 때서야 그들을 이끌고 한쪽 방향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저, 이 방향은…….”
병력을 이끌고 뒤를 따르던 해멀슨과 케이델의 물음에 진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먹었으니 소화를 시켜야지.”
“그 말씀은?”
케이델은 이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굳은 표정을 보며 다시금 끄덕인 진은 허공에서 그의 검을 뽑아 어깨에 척 걸쳤다.
“오아시스로 간다.”
제9화 암살자, 블러디 핸드
미래는 현재에 의해서 얻어진다.
―새뮤얼 존슨―
또 한 마리의 덩치 큰 캐딜레스가 애써 들고 있던 고개를 푹 떨구었다. 헐떡이던 숨이 멎은 캐딜레스의 몸통에서 시커먼 검을 거칠게 뽑아낸 진은 자신의 목덜미에 난 얕지 않은 상처를 만져보며 얼굴을 구겼다.
“물러나지 말고 옆으로 피하라는 거다. 물러나면 약해 보이고, 약해 보이면 목표가 된다니까.”
“죄, 죄송합니다!”
투덜대듯 말하자 옆에서 거듭 고개를 숙이는 청년은 평범한 장검을 굳게 쥐고 있던 전투 소대원이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 캐딜레스의 공격권 안으로 뛰어들다가 목덜미에 흠집이 생긴 것이다.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그것을 본 청년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지만 그런 모습을 처음 본 것도 아니기에 금세 가라앉히고 서둘러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가 캐딜레스의 사체를 분해하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떠도는 놈들 말고는 별것 없다며? 무슨 떠돌이가 이렇게 많아?”
“면목 없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케이델을 보며 쓴웃음을 짓던 진은 병사들에 의해 적당히 토막 쳐진 캐딜레스의 사체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다시금 선두에 섰다.
“오아시스가 눈에 보이는 위치에서 휴식할 것이다. 그 전엔 휴식 없다.”
“예!”
지금껏 몇 번이고 반복한 말이지만 처음에 비해 그 반응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쉬고 싶어 하던 이들도 조금씩 눈빛이 달라지더니 그동안 사람들을 잡아먹던 몬스터와 마수들을 역으로 사냥하고 있음을 실감했는지 이제는 전투가 마무리되어도 누구 하나 앉아 쉬려 하지 않았다.
마을을 떠나 지금까지 사냥한 몬스터의 숫자만 다섯이었다. 진에겐 익숙한 캐딜레스와 더불어 하울페그도 두 마리나 사냥했고, 타조를 닮은 외모에 마찬가지로 날지 못하는 포악한 육식몬스터 페일라칸 또한 두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지난 다섯 번의 전투 동안 사망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진이 자신의 기감에 잡힌 몬스터를 가장 먼저 상대하며 시선을 집중한 탓도 있지만 조금 전처럼 병사가 위험에 빠지면 진이 막아주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 마리씩이라 다행이야.”
부하들의 위험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상대하는 몬스터가 하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한 마리라면 어떤 공격이든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마리 이상이라면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자신 혼자라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50여 명에 이르는 오합지졸들을 짐으로 데리고 있으니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 것이다.
차라리 길잡이 하나둘만 데리고 오는 편이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었다. 진 역시 출발하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몇 명 정도는 죽게 할 각오로 끌고 온 것이었다.
진은 그들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그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가 그들을 부린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켜 줘야 했다. 더불어 그들이 힘을 합치면 무서운 몬스터도 사냥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일깨워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사냥한 몬스터들 역시 그가 시선을 끌어주긴 했지만 치명상을 입힌 것은 단 한 번, 마지막의 캐딜레스뿐이었다. 나머지 몬스터들은 병사들의 검이나 도끼, 어떤 것은 예비 소대원의 조잡한 창에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무기의 수준이 떨어져도 상대를 해칠 수는 있다. 그 사실이 예비 소대원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
“으음.”
하지만 위기를 지날수록 누군가가 죽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병사들 사이에 감돌기 시작하자 조금씩 위축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보폭이 줄어들고, 어깨가 내려갔다.
유일하게 좋아지는 것은 눈빛이었다. 몸이 움츠러드는 것과 정반대로 각각의 눈들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자들의 눈이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어느 누구도 행렬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집단에서 떨어지게 되면 오히려 위험하게 된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하게 뭉쳐 갔다.
그런 식으로 세 번의 전투를 더 겪고 나서야 첫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어느새 해가 하늘 저편으로 저물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진은 해멀슨과 케이델의 부상자 보고를 들었다.
“카이만의 오른팔은 포션으로 치료했습니다만 당분간은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유일한 중상자였다. 오른팔이 적잖게 찢겨졌던 카이만이라는 전투 소대원은 포션으로 치료하고 붕대를 감긴 했지만 해멀슨의 말처럼 당분간은 오른팔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그 상처가 깊었다.
“부상자는 후열로 배려하고, 이 그림자가 이 위치에 올 때까지 휴식한다.”
땅에 박은 자신의 검 앞에 발을 뻗어 선을 긋자, 해밀턴과 케이델이 가볍게 끄덕인 후 부하들에게 돌아갔다.
진은 다시금 기감을 확장하여 주변을 살폈다.
앉아서 쉬고 있던 병사들 중 마을을 떠난 후 진이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몇몇 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들은 편하게 쉬던 자세에서 조금 허리를 펴 자신들의 무구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쉬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 무구를 점검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저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무기를 닦거나 손보기 시작했다. 그런 병사들을 만류하거나 하지 않고 다시금 정면을 향한 진은 멀리 언덕 아래로 보이는 저지대, 울창한 숲과 그 옆의 호숫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호숫가엔 대저택들이 있었다. 한 번도 마수나 몬스터의 침입을 받지 않은 것처럼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몇몇 무장한 인물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말도 보였다. 마차인지 수레인지 잘 안 보였지만 무언가를 끌고 가고 있었다. 다시금 자세히 노려본 진은 그것이 큼직한 수레 위에 놓인 우리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안으로 얼핏 보이는 것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노예로 팔기 위해 운반하는 것인지 무장한 인원들이 그 수레를 둘러싸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
당장 달려가 구해낼 수는 없었다. 안타깝지만 저 사람들의 운이 나쁜 것이다. 진은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수레와 사람들을 외면한 채로 다시금 호수 주변을 바라보았다.
무장한 병력이 꽤 많이 보였다. 눈에 띄는 자들은 모두 무장했다고 보면 되었다. 누가 상인이고 누가 용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기본적인 무장은 지니고 있었다.
호수 일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의 시선이 다시금 먼 방향으로 옮겨갔다.
마을을 벗어나는 수레가 한 대가 아니었다. 대략 열 대가 넘어가는 수레들이 각각 그것들을 둘러싼 병력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누군가 운이 없다면 그 운은 다른 누군가에게 있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진은 땅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방에 보이는 나무숲을 중간 기점으로 삼는다. 몬스터나 마수의 기운은 없다. 저곳에서 은폐 엄폐를 실시하고 차후 지시에 대기하라, 이상.”
“이후의 모든 대화를 금지한다. 대원들은 각 지휘자들의 신호에 따라 이동한다!”
해멀슨의 낮은 외침에 이어 전투 소대의 이동이 시작되자 비슷한 속도로 예비 소대의 이동 역시 시작되었다.
그런 병사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은 그들과 별개로 흑영보를 밟아 그곳에서 사라졌다. 달리는 방향은 병사들이 향하는 방향과 동일했지만, 그보다 먼저 그곳에 혹시나 있을지 모를 덫이나 장애물, 몬스터의 여부를 직접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생각대로 숲과 인접한 곳에 땅을 굴토하고 꼬챙이를 박아둔 단순한 함정이나 짐승용 덫 등이 숨겨져 있었기에 하나하나 해제하거나 표시하며 달려간 진은 숲으로 들어선 이후엔 조금 속도를 줄여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의 덫과 포획 장치를 발견하고 무력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