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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마법은 없는 건가.”
그가 갖고 있던 기억의 파편에는 마법을 통한 덫이나 경보장치 또한 존재했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조심조심 접근하던 진은 예상외로 마법 장치는 발견되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숲에서 본 오아시스는 성벽 안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라는 별명에 걸맞을 만큼 고요하고 잔잔했다. 맑고 투명한 호수를 감싼 형태로 자리한 수많은 크고 작은 건물들 사이로 여전히 수레에 태워지거나 이동하고 있는 수많은 노예들이 보였다.
“…….”
사냥꾼 마을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현재 이송 중인 수레만 해도 얼핏 본 것만 50여 대, 각각의 수레에 탄 사람의 숫자가 적어도 세 명인 것을 생각해 보면 백 명이 훌쩍 넘어가는 숫자의 노예들이 이동하고 있었고, 또 그 뒤를 이어 다른 수레에 오르고 있었다.
“장날인가?”
조금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주기적으로 날을 잡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 파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적은 수의 노예와 적은 수의 병력으로 오가는 것보다 저 편이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진은 문득 숲 한쪽에 자리한 높다란 나무 한 그루, 나무의 겉에 발판과 사다리를 설치한 망루를 발견하고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런 곳에 이런 식으로 망루가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병력이 발각되기 전에 망루를 무력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보법을 밟던 진은 그의 기감에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며 망루 위로 소리 죽여 올라갔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는지, 아니면 자리를 비운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다시금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주변에 집중하던 진은 적어도 반경 1킬로미터 안에 사람에 준하는 생물체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망루 위에서 좀 더 확실히 보이는 마을 쪽의 모습을 살폈다.
“사람이 부족했던 모양이네.”
몇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망루가 있었지만 그곳 역시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경계 병력까지 쥐어짜 노예 호송에 투입한 듯했다.
확실한 방심이었다. 아마도 이곳을 넘볼 만한 이들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찌할까 생각하던 진은 지금 마을을 떠나고 있는 병력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언제든 돌아와 반격할 수 있음을 알기에 이제야 숲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병사들을 돌아보며 다음 해야 할 일을 몇 가지 떠올려 보았다.
“단순히 공격하고 빠지는 게 아니야. 모조리 쓸어버리고 이곳을 차지해야 하는 거지.”
굴러온 돌이 되어 박힌 돌을 빼내야 한다. 아니, 아예 박힌 돌 자체를 부수고 그 자리에 틀어박혀야 하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진은 문득 저들의 수레 행렬 가운데 유일하게 휘장으로 그 안이 가려진 고급 수레 하나를 발견하고 눈을 좁혔다.
“노예가 아닌가?”
하지만 그 수레 역시 보통의 우리와 동일한 규격의 수레였고, 다만 그 우리 겉으로 휘장을 둘러 가렸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수레 하나를 둘러싼 병력이 수십 명이었다. 한 수레 당 두 세 명의 병사들이 에워싼 것이 보통인 반면 저건 너무 티가 날 만큼 두터운 경계였다.
얼마나 귀한 것이 실려 있기에 저럴까 생각하던 진은 문득 기감 멀리에서 포착된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
소리 없이 이동하고 있는 존재는 분명 인간이거나 그에 준하는 존재였고, 그 방향은 순식간에 숲을 지나 마을, 정확히는 현재 이동하고 있는 행렬 가운데의 그 가려진 수레를 향하고 있었다.
노골적일 만큼 직선코스로 이동하고 있는 기척은 짙은 살기를 품고 있었다. 혹시나 그 존재에게 자신의 기척을 들킬까 숨을 죽이고 있던 진은 그가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망루에서 훌쩍 뛰어내려 착지하고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소리를 죽이고 달려온 해멀슨과 케이델을 돌아본 진은 그가 파악한 마을의 현재 상황을 알렸다.
“이쪽 방향으로 직진하면 붉은 지붕의 이층 건물 하나가 있다. 정원이 포함된 주택이고, 현재 사람은 없다. 그 정원을 중간 기점으로 하여 그 주변의 건물을 하나씩 장악한다.”
그 건물 말고도 주변의 건물 대부분이 비어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노예들을 호송하는 것을 관리감독하고 있을 것이다.
집 안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 해치는 것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무언가를 해치는 것이 훨씬 쉽다. 그것을 거듭 강조한 진은 검을 고쳐 쥐고 말했다.
“내가 헤집어주는 동안 남부를 장악해야 해. 한 건물 한 건물 확실하게 수색 섬멸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믿음직스럽게 답하는 두 소대장이 자신의 소대로 향하는 것을 본 진은 그곳에서 돌아서서 최대 속도로 흑영보를 전개했다.
*
*
*
마을을 멀리 우회한 진은 이동하고 있던 노예 호송 행렬의 선두를 들이쳐, 수레를 끌던 말의 목을 쳐버렸다.
쿠당탕!
“뭐, 뭐야?”
“공격자다! 공격자가…… 크억!”
주위를 경계하며 검을 뽑아 들던 철갑 병사의 가슴팍에 긴 골짜기가 생겨나며 붉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검은 아지랑이?”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잔상에 가까운 검은색의 흐름이었다.
마치 아지랑이와 같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들이 그처럼 하나하나 피를 뿌리며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 뒤에 있던 호송 인원들이 겁에 질려 물러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대체…… 으악!”
선두는 멈춰 버렸고, 뒤에선 뭣 모르는 행렬이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지만 폭풍처럼 몰아치는 피보라가 그들을 하나둘 집어삼켰다.
“선두가 멈췄다!”
“무슨 일이야?”
지금 출발해야 밤을 지나 새벽에 성벽에 도착할 수 있다.
이 근방의 몬스터와 마수들은 밤엔 움직이지 않는 편이라 어서 서둘러야 했기에 상황을 알아보려고 말을 몰아 달려오던 두 명의 철갑 병사들이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허공에서 반으로 갈려 떨어져 버리자 무심히 앞을 보던 나머지 병력이 다급히 무기를 고쳐 쥐고 그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벼워지면 좋겠는데.”
그 커다란 검에 시커먼 마기를 잔뜩 집어넣은 채로 이리저리 휘두르던 진은 검이 길어서 좋긴 하지만 조금 무겁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기나 마나가 아니었으면 들지도 못할 무게였다. 게다가 할 수 있는 최대 속도의 흑영보를 유지하고 있던 터라 체력의 소모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끄악!”
또 한 명의 적을 가른 진은 뒤이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수십 명의 병사들을 발견하고, 차라리 와주는 편이 편하다고 중얼거리며 검을 고쳐 쥐었다.
늑대 무리를 마주한 사자가 된 기분이었다.
“늑대도 아니지. 살쾡이 정도일까.”
아마도 정말 강한 자들은 아까 보았던 그 수레를 둘러싸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힘을 비축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의 공기엔 마기가 풍부하게 흐르고 있어 소모된 것도 몇 번의 호흡이면 적잖게 회복되고 있었다. 마을을 그리 멀리 벗어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다른 것이다.
어쩌면 호수가 가진 순수한 마나의 기운이 그 주변의 마기를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범위를 넘어서면 이렇듯 급격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선두를 시작으로 마을을 향해 내달리며 병사들을 쓸어버리고 있던 진은 그나 지나간 수레들에서부터 시작된 환호와 함성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의문의 수레, 그리고 동료들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은 채 그곳만 둘러싸고 있는 수십 명의 병사들을 보았다.
“…….”
진은 그 의문의 수레 바로 앞의 수레를 호송하던 자들까지 처리한 후 그대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내 목표는 노예가 아니니까, 일단은.”
그대로 우회한 진은 긴장한 채로 원진을 구축하고 있는 해당 병력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만만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지만 제대로 쓸면 쓸리긴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그건 저 치가 알아서 하겠지.”
진의 시선은 멀리 바위 옆에 반쯤 몸을 숨긴 검은 망토의 존재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 의문의 수레 하나만을 노리고 접근하던 그 존재는 진이 다른 수레의 병력들을 공격하는 동안에도 그저 기회를 살피듯 가만히 서서 저쪽만 노려보고 있었다.
딱히 막을 이유도 없기에 그대로 두고 다시금 멀리 우회한 진은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우왕좌왕하고 있는 마을 중심의 행렬 끝을 덮치려다 그 중간 즈음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와아아아―!
모두 쓸어버려라!
어느새 마을을 장악한 부하들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행렬 후미를 공격하고 있었다.
“흐음.”
그 기세가 자못 날카롭고, 상대적으로 그쪽 역시 호송 병력의 수준이 높지 않은 것을 확인한 진은 다시금 발을 돌려 이동하며 중간 중간 부하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기세를 품고 있는 자들을 베어 넘기며 의문의 수레로 향했다.
어찌 되었든 그곳의 병력 역시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들이었다. 다만 기회를 넘보고 있던 그자가 먼저 나서준다면 힘을 덜 빼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진은 그의 기대대로 되었는지 한참 피바람이 불고 있는 전방의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하는군.”
적병들을 혼자 상대하고 있는 검은 망토의 존재는 그의 흑영보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빠른 보법을 가진 듯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서는 속도로 움직이며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흑영보보다 못한 보법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움직임이 진의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인 목적은 흑영보와 비슷한 잠행, 은신인 것 같은데 수준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저자의 성취가 떨어지는 건지 그 속도가 현재 진이 행할 수 있는 최대 속도의 흑영보에 비해 절반 가까이 느렸다.
“크억!”
“끄으윽……!”
저자는 철저하게 적병들의 갑주가 보호해 주지 않는 목 위를 노리고 있었다. 잔인한 짓이지만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챙―!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적병들의 숫자가 열 명가량으로 줄어들자 처음으로 그의 단검을 막아낸 사람이 생겨났다.
지친 것인지, 아니면 남아 있는 자들이 그만큼 강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검은 망토의 저자가 처음에 비해 현저하게 느려졌다는 것이었다.
채앵―!
“크윽!”
또 하나의 적을 쓰러뜨렸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나는 사내였다. 숨을 고르는 모양인데 그 때문에 기세를 뺏겨 오히려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 중간 목적은 같은 자였다. 왠지 죽게 두기 아깝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기에 옆쪽 구덩이에 숨어 모습을 감추고 있던 진은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바지에 슥슥 닦아낸 후, 다시금 검을 고쳐 쥐고 훌쩍 몸을 날렸다.
“윽!”
타이밍이 좀 안 맞았는지 그가 뛰어들기 직전에 옆구리를 당한 망토 사내였다. 사내임을 알게 된 것은 그가 흘린 신음 소리 때문이었다. 남자밖에 낼 수 없는 톤의 소리였고, 몸의 골격을 보아도 확실한 남자였다.
한 번 공격을 당하자 그대로 무너져 버리듯 주춤거리며 방어에 급급하던 그자는 뒤이어 적들의 옆을 뚫고 들어와 헤집어 버리는 진의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쩌저적!
“끄악!”
“막는다고 막히는 게 아니야.”
그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지 다급히 몸을 숙이며 검을 위로 휘두르던 적 하나를 그 검과 함께 갈라 버린 진은 뒤이어 그를 노리는 또 다른 적들을 보며 눈빛을 달리 했다.
“마나인가.”
그들의 검과 창 겉에는 은은한 마나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기에 마나를 주입할 때와는 뭔가가 많이 달랐다.
콰직!
“……!”
마기를 잔뜩 머금은 검을 휘둘러 맞서보았더니 상대의 검이 그대로 터져 버리듯 수십 조각으로 박살나 버렸다.
다급히 물러나는 적을 대신해 또 다른 자가 비슷한 마나를 머금은 창을 찔러왔지만 그대로 피해내고 달려든 진은 가볍게 지나치듯 그자의 허리를 베어내고 연이은 공격으로 그 뒤에 있던 검 없는 자의 목을 취했다.
“항복하겠어?”
하나 남은 병사는 문득 자신을 보며 묻는 진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는 진의 온전한 모습을 지금 막 본 것이기도 했다. 그가 흑영보를 밟던 동안에는 그저 희미한 잔상만을 보았을 뿐, 동료들이 죽는 동안에도 아무런 대비를 할 수가 없었다.
“…….”
주위를 돌아본 그자는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듯 그저 주변에 널려 있는 동료들, 조금 전까지도 함께 숨을 쉬고 농담을 하던 동료들이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두 무릎을 꿇었다.
“항복하겠소.”
체념한 얼굴로 말한 사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 진은 그대로 검을 휘둘러 사내의 목을 날렸다.
“…….”
옆으로 굴러 떨어진 사내의 얼굴엔 자신이 죽을 거라는 두려움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옆으로 스르르 무너지는 병사의 몸뚱이를 내려다보던 진은 마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떨어내며 말했다.
“항복, 잘 받았다.”
“…….”